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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울산

밀양 표충사

11월 3 주 일요일 집에서 쉴까 했는데 딸네하고 표충사에 가자고한다

비가 내릴 것 같지만 일기예보는 비온다는 말이 없기에 우산을 준비해서 따라나선다

주차장에 들어가니 어린이 동반 했냐고 물어본다 여기는 어린이 놀이터와 주차장을 겸하고 있다

천황봉쪽은 구름에 가려 있고 재약산은 모습을 들어내고 있다

각종 놀이기구들이 잘 갖추어져 있다





잠시 외손녀 놀이기구 타는 시간에 사진 놀이도 해보고

여름에는 계곡에서 물놀이도 할 수 있고 어린이들이 놀기에 딱 맞는 곳이다


손녀 몇 군데 오르랑 내리랑 하더니만 그 것도 실증 나나보다


여기서 표충사까지 1 km 라고 하니 그냥 걸어가기로한다

바쁘고 고달픈 삶에 시달려~~~~~ 사계절 중

제일 아름답고 매력적인 이 가을을 제대로 느껴

보지도 못했는데  벌써 가을이 떠나가네,

아쉬움을 뒤로하고 밑에 영상들로나마 다시 가을을 느껴보리.

꽃샘추위 매운바람 속에 노랑 싹 티여 파랗게 돋아난 나뭇잎이여!

그렇게 태어난 너, 어느새 검푸른 녹색 나뭇잎으로 자라나

이제는 완숙의 멋진 모습으로 우리를 즐겁게 해 주는구나.

정열에 불타는 붉은색, 아름다움 마음껏 뽐내는 단풍잎이여!

너를 보면 마치 농익은 요염한 여인을 보는 것 같아 마음 설렌다.

늦가을, 어느새 나뭇잎 너도 늙어 가누나 녹색의 아름답던 너,

갈색 옷 갈아입고 우리에게 쓸쓸한 마음 들게 해 주는구나.


가을바람에 하나 둘 떨어지는 너, 낙엽이런가!

세 계절 너의 삶이 너무 짧지 않은가 찬 바람

 몰아치는 추운 겨울 너의 무덤이 거기구나.

옮겨온글


역시 주말이라 여기도 많은 인파가 몰려든다

표충사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의 말사이다. 사기(寺記)에 의하면 654년(무열왕 1) 원효대사가 창건하고

 죽림사(竹林寺)라 했으며, 829년(흥덕왕 4) 인도의 고승인 황면(黃面)선사가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할 곳을

 동방에서 찾다가 황록산 남쪽에 오색서운이 감도는 것을 발견하고는 3층석탑을 세워 사리를 봉안하고 절을 중창했다고 한다.


 이때 흥덕왕의 아들이 나병에 걸려 전국의 약수를 찾아 헤매다가 이곳의 약수를 마시고 황면선사의 법력으로 쾌유하자

왕이 기뻐하고 대가람을 이룩한 다음 절 이름은 영정사(靈井寺), 산 이름은 재약산으로 바꾸었다.


고려 문종대(1047~82)에는 당대의 고승인 혜린(惠燐)이 이곳에서 수도했고, 충렬왕대(1275~1308)에는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이 주석하면서 불법을 크게 중흥하니 1286년 충렬왕이 '동방제일선찰'이라는 편액을 내렸다.

1839년(헌종 5) 사명대사의 법손(法孫)인 월파(月坡)선사가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사명대사의 충혼을 기리기 위해

고향인 밀양시 무안면에 세운 표충사(表忠祠)로 옮기면서 가람배치가 크게 변하고 절 이름도 표충사로 바뀌었다.

 

1926년 응진전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화재로 소실된 것을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청동은입사향완(靑銅銀入絲香埦 : 국보 제75호)·3층석탑(보물 제467호)·

대광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31호)·석등(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4호) 등이 있다.

세상에 가을 산 보다 더 아름다운 산이 또 있을까?

신선(神仙)은 날 더러 여기서 살라 하네

이 산에 이 한 몸 영원히 내려놓을까.


 영남알프스의 주산(主山)인 재악산(載嶽山, 載岳山 : 해발1189.2미터)은 원래의 산명입니다   

 이 재악산(載嶽山, 載岳山, 사자봉 獅子峰, 제1봉)을 1925년에 일제(日帝)가 천황산(天皇山)으로 조작했습니다   

 제1봉인 재악산(載嶽山, 载岳山 = 사자봉 獅子峰)을 위와 같이 조작하고, 

 제2봉인 수미봉(須彌峰)은 "역사적 근거와 증거가 없는 재약산(載藥山)"으로 억지로 만들었습니다

아래 현판과 안내문을 보면 현판은 제악산 안내문은 천황산입니다 이제 통일을 시킬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표충사삼층석탑

표충사 경내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석탑. 보물 제467호. 높이 770㎝. 이 석탑은 기단·탑신·상륜부로 이루어졌으며,

 폭이 좁은 지대석 위에 놓여진 기단은 단층으로 각 면에 우주와 탱주가 새겨져 있다. 탑신부의 옥신석과

옥개석은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는데 1층 옥신은 기단보다도 높아 고준한 느낌을 준다. 옥신의 각 면에는

 우주만 새겨져 있고, 옥개는 약간 둔중해 보이며 모서리에는 풍령을 달았던 구멍이 남아 있다. 상륜부는 노반·

복발·앙화·보륜·보개·수연 등이 차례로 얹혀 있는데 나중에 후보된 것도 있으며 그 위에는 철제 찰주가 있다.


이 석탑은 기단이 단층인 점, 옥개석의 층급받침이 4단으로 줄어든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탑양식에서 약간 벗어난 것임을 알 수 있다. 1995년 6월 1일 문화재청에서 주관한 석탑의 해체 보수 공사

 중에 1층 탑신부에서 금동불상, 유리구슬, 명문석 등 유물이 발견되었다. 이 명문석에 적힌 글자를 판독한 결과

 "명재악산영정사야(名載岳山靈井寺也)"라는 제하의 글로 1491년 삼층석탑의 개수 내력을 새긴 것으로 알려졌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57호. 크기는 석가여래좌상의 높이 209㎝, 약사여래좌상의 높이 179㎝, 아미타여래좌상의

 높이 179㎝. 표충사 대광전에 봉안되어 있는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으로, 중앙에 석가여래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아미타여래와 약사여래로 구성된 삼세불상이다.

표충사 대광전 목조삼존여래좌상은 수미단 위에 각각 마련된 연화좌에 단정하면서도 위엄 있는 모습으로 앉아 있다.

 중앙의 석가여래는 좌우의 아미타와 약사여래상보다 크게 조성되어 격을 달리하는 주존불임을 알 수 있다.

세 불상은 신체 비례, 얼굴 등은 대동소이하지만 옷주름 등 세부적인 표현에서 조금씩 차이가 있다.


본존인 석가여래상은 어깨가 넓고 당당하며 결가부좌한 자세에 머리를 앞으로 약간 숙여 아래를 굽어보고 있다.

 수인(手印)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으로, 오른쪽 손끝이 땅을 향하는 촉지인(觸地印)을 하고, 왼손은 다리 위에

놓아 엄지와 구부린 중지를 가볍게 맞대었다.

머리는 육계와의 경계에 중간계주, 정수리에는 원통형의 정상계주가 있다. 넓적한 얼굴에 눈이 수평으로 가늘고 길며,

 오뚝한 작은 코, 입술 양끝을 파낸 듯한 입술모양이 특징적으로 표현되었다.


대의는 오른팔이 드러나게 입은 변형된 편단우견식이며, 옷자락이 팔꿈치까지 길게 내려와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가슴 아래는 5개의 연꽃형으로 모양을 낸 승각기, 다리 앞에 넓은 주름을 중심으로 펼쳐 놓은 균등한 옷주름,

왼쪽 다리 위에 무릎을 감싼 듯한 옷자락 등의 표현은 색난(色難)의 구례 화엄사 각황전 목조불상(1703), 고흥 능가사

 대웅전 목조석가여래좌상(1707) 등의 특징과 매우 유사하다.


거의 동일한 크기의 아미타와 약사여래는 자세나 머리와 얼굴 표현 등이 본존상과 대동소이하다.

아미타여래상의 수인은 왼손을 어깨까지 올리고 오른손은 무릎 위에 두어 엄지와 중지를 자연스럽게 구부려 맞대었다.

약사여래상의 수인은 팔의 위치가 아미타여래상과 반대로 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손바닥에는 약함이 놓여 있다.

 얼굴은 본존에 비해 근엄함이 줄어들고 부드러움을 더했다. 법의는 본존과 다르게 양어깨와 오른팔이 드러나지 않게

 변형통견식으로 입었으며, 오른쪽 어깨, 승각기, 양다리 사이의 옷주름 처리는 유사하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58호. 불상 높이 112㎝, 무릎 너비 74㎝. 표충사 팔상전의 석가여래좌상은

 석가여래후불도를 배경으로 앉아 있다. 얼굴과 신체에 다소 훼손을 입었지만 자세, 옷과 옷주름, 신체

 표현 등이 석굴암 불상 양식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는 고려시대의 불상으로 추정된다.


표충사 팔상전의 석가여래좌상은 머리와 허리를 곧게 세우고 정면을 향해 당당히 앉았다.

어깨가 넓고 허리가 잘록하여 상반신이 당당해 보이며, 무릎 너비와 높이도 적당해 자세에 안정감이 있다.

양손이 모두 파손되어 정확한 모습은 알 수 없지만 팔의 위치와 방향 등으로 보아 오른손은 땅을 가리키는

촉지인을 하고 왼손은 다리 위에 올린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했을 것이다.


머리와 육계의 구분이 분명하며, 그 경계에 중간계주와 정수리에 정상계주를 각각 두었다. 얼굴과 신체는

 흙(호분)과 같은 재료로 수리하여 세부적인 불상의 특징이 드러나지 않는다.


옷은 오른쪽 어깨가 드러나게 편단우견으로 옷을 입었으며, 가슴의 유두, 불상 뒷면 허리 아래로 균등한

 층단식의 옷주름을 표현했다. 결가부좌한 다리의 양발이 드러나며, 무릎 사이에 부채꼴 모양으로 접혀진

옷주름 등의 표현은 석굴암 불상 특징과 매우 유사하다. 그러나 오른쪽 허리에서 왼쪽 어깨 위로 넘긴 대의의

 넓은 띠 모양 옷주름이라든지 왼쪽 팔꿈치 앞으로 물방울처럼 접힌 옷주름 등의 표현은 석굴암 불상 양식을

 이은 10~11세기의 불상 특징으로 주목된다


2층의 누각(樓閣)으로 되어 있을 때는 범종루라 하고, 불전사물 가운데 범종만을 봉안하는 경우에는

 범종각이라고 한다. 이곳에 비치되는 사물은 모두 부처님에게 예배드릴 때 사용되는 불구로서,

우리나라에서는 새벽예불과 사시공양(巳時供養), 저녁예불 때에 사용된다.


이들은 소리로써 불음(佛音)을 전파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범종은 청정한 불사(佛寺)에서 쓰이는

 맑은 소리의 종이라는 뜻이지만 지옥의 중생을 향하여 불음을 전파하고, 홍고는 축생의 무리를 향하여,

 운판은 허공을 나는 생명을 향하여, 목어는 수중의 어류를 향하여 소리를 내보낸다는 상징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규모가 큰 사찰에서는 이 사물을 모두 갖추고 있으며, 규모가 작은 사찰이라도 범종만은 반드시 비치하게 된다.

 이 당우는 산문(山門)을 들어서서 좌측 편에 위치하는 것이 일반적인 통례이다.

우화루

큰스님의 설법을 전파하는 장소로 이용됩니다 그래서 대광전의 마당 앞에 지어져 있습니다

설법의 장소라기 보다는 몸과 마음을 편하게 쉴수 있는 휴식공간입니다

좌측이 관음전 우측이 명부전


관음전은 관세음보살을 모신 곳으로 관세음보살은 불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우리 귀에 무척이나 익숙한 보살입니다.

 관세음보살은 현실 세계에서 고통을 받는 중생들의 소리를 듣는 보살로 현실의 구세주입니다. 우리가 '관세음보살'

이라고 정성을 들여 부르면 재앙을 물리쳐주고 복을 준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표충사 관세음보살은 다른 사찰에 있는 관음보살보다 특이하게 손이 참 많다.

 관음보살은 부처의 자비를 상징하는 보살로 세상의 모든 소리를 살피고 중생이 괴로울 때면 그 음성을 듣고

 구제를 해준다고 합니다. 일반적인 관음보살의 보관에는 화불이 새겨져 있으며, 정병이나 연꽃 등을 들고 있는

 경우가 많으며, 아미타불의 협시불인 경우가 많고 독립상으로 세워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곳 표충사 관음전의 관음보살은 독립상으로 세워진 경우로 손이 많은 것은 중생들에게 여러 다양한 복을

 내리기 위함이 아닌가 생각해보았습니다.

표충사 명부전

명부전은 저승의 세계를 나타내는 곳으로 저승을 사찰 안으로 옮겨온 것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주로 중생을 구제하는 지장보살이 주존으로 모셔지고 좌우에 지옥계의 심판인 시왕(十王)들이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세워져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찰에 명부전이 빠지지 않는 것은 죽은 후에
좋은 곳에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는 후손들의 기원이 많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외손녀와 기념촬영도 하고




딸과 외손녀 옆지기


쑥부쟁이

만일루萬日樓(경남도 문화재자료 제132호)-현판은 "嶺南第一禪院"임

     조선 철종 11년(1860)에 월암상인이 조성한 것으로 H자형의 독특한 구조로 아미타불의 48원을

상징하는 48칸과, 108번뇌를 상징하는 108평으로 되어 안쪽에 아미타불을 모시고있다. 이곳은 중

생을 구하고자 사부대중이 만일회를 결성하였던 곳이다. 후에 참선하는 방인 선방으로 사용하였으

며, 현재 서래각 선원으로 어어져오고 있다. 1926년 소실되어 1929년 중건을 계기로 현판도 영남제

일선원嶺南第一禪院으로 새로 걸었다.

저 산이 사자봉이 아닐까?

표충사 수충루 -

  표충사의 정문 역할을 하는 수충문입니다. 표충사 수충문은 2층 누각으로 1층은 장초석
위에 기둥이 놓인 삼문의 형태이고, 2층은 누마루가 깔린 형태로 표충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보통사찰과 달리 삼문형태 누각이라는게 특징입니다 이곳을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서산대사와

사명대사 기허대사의 충혼을 기리기위한 표충서원과 표충사당이 있기 때문에 사찰 입구를 서원처럼

누각형태로 세웠다고 함

청동은입사향완

표충사에 있는 고려시대 청동은입사향완. 국보 제75호. 높이 27.5㎝, 입지름 26.1㎝. 은입사 기법으로 장식된

불교공예품의 하나로 명문이 있는 것으로는 가장 오래되었다. 형태는 넓은 전이 달린 완형의 몸체에 나팔형의

받침을 갖춘 고배형이다. 향완 전체에 문양이 음각되어 있는데 넓은 전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범자가 새겨진

 6개의 원이 있고 그 사이에 구름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몸체에는 역시 범자가 새겨진 4개의 원이 있으며 턱이 있는 밑부분에는 굵은 윤곽선 안에 가는 평행선으로 표현된

 중판 앙련이 입사되어 있다. 받침에는 운룡무늬[雲龍紋]가 회화적으로 시문되어 있다. 넓은 전의 뒷면에 새겨진

 57자의 명문에 의해 1177년(명종 7)에 만든 것으로 용흥사에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향완은 비례가

이상적일 뿐만 아니라 가는 선과 굵은 선을 이용하여 문양을 적절하게 표현한 것으로 은입사 기법의 정수를

보여주는 뛰어난 작품이다.










중앙에 사명대사  
다음은 일본과 협상하러 대마도에 도착하여 배안에서 지은 시한편이다.  
근래 수염이 세기만 하고
해마다 희어 지는데 8월 남쪽바다에 뗏목을 띄운다. 
팔을 굽히고 허리를 꺽는 일은
내 본 뜻은 아닌데 내가 어찌 머리를 숙여 원수의 집에 들어가나 
원수를 꾸짖어 하늘을 쳐다 보며
말없이 앉아 있으니 침침한 바람은 외로운 배에 비를 뿌리도다. 
 
십년생사는 관산의 달이더니
음흉한 놈들의 나라는 가을이로구나
한여름 바다의 성난 물결은 쉴날이 없는데 
부평초 같은 이신세는 어느 때나 쉬게 될까 

사명대사 왼쪽에는 임란때 금산에서 전사한 기허대사 오른쪽에는 스승인 서산대사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낸다






고백카페의 감나무

 사찰을 돌아보고 늦은 점심을 여기서 먹었는데 주말아라서 많이들 들어와 많이 복잡했다

생생투데이에 나왔는지는 모르겠으나 맛은 괜찮은 편이었다




Comme D` habitude : My 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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