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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광주.제주

무주 양수발전소와 적상산 안국사


적상호 댐과 전망대

적상호 상부댐 저수지



양수상부댐의 제원



 적상산 안국사 일주문...

적상산 사고터에서 굽이돌아 오르는 안국사의 초입에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목조 맞배건물인 일주문이 있다. 낮은 단층기단 위에 다듬지 않은 2개의 기둥을 일렬로 세운 뒤 창방과 평방을 얹고 그 위에 화려하기 그지없는 다포로 장엄하였다. 일주문에는 1992년 강암(剛菴) 송성용(宋成鏞)이 쓴 ‘적상산 안국사(赤裳山 安國寺)’라는 편액과 1995년 여산(如山) 권갑석(權甲石)이 쓴 ‘국중제일정토도장(國中第一淨土道場)’이라는 2기의 편액이 걸려 있다. 특히 권갑석(權甲石)이 쓴 편액 ‘國中第一淨土道場’은 무학대사가 이곳을 ‘국중제일의 길지’라고 한 설화에서 유래한 편액으로, ‘안국(安國)’과 ‘정토(淨土)’를 바라는 안국사의 염원을 담고 있다.들어 갈 때 차에서 내리기싫어 지나처서 가져온사진

 안국사

적상산성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고찰 안국사는 고려 충렬왕 3년(1277)에 월인화상이 지었다고 전한다.

 광해군6년(1614) 적상산성 내에 사각이 설치되고, 인조 19년(1641)에 선운각이 설치되어 적상산 사고로 조선왕조실록과

 왕의 족보인 선원록이 봉안되었다. 이때 사고를 방비하기 위하여 호국사를 지었으며, 안국사는 그 전부터 있던 절이었으나,

호국사와 더불어 이 사각을 지키기 위한 승병들의 숙소로 사용되어 안국사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졌다.

적상산 양수발전소 건설 때문에 이 사찰은 호국사지의 위치로 옮겨져 안국사가 호국사지에 있다.

전각 15여 개로 1995년 이건, 중창되었고 산 정상에 산정호수가 조성되어 있다. 가을철 단풍이 절경이며, 산 정상까지 2차선

포장도로를 따라 드라이브할 수 있다. 인근에는 무주리조트와 라제통문 구천동 계곡이 있다.

주요문화재는 보물 제1267호 영산회상괘불과, 유형문화재 제42호 극락전, 제85호 호국사비, 사적 제146호 적상산성,

기념물 제88호 사고 등이 있으며, 세계의 불상을 수집하여 모신 성보박물관이 있다.

   적상산성 호국사비...

호국사비는 적상산에 지은 호국사의 창건과정을 기록한 비로, 안국사 가람 축대 아래에 자리잡고 있다. 높이 103㎝로 장방형의 몸돌에 음각으로 기록하였으며, 상부 개석에는 쌍룡을 양각하였다. 1645년에 세워졌으며, 현재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되어 팔작건물의 비각 내에 봉안되어 있다. 호국사는 조선 인조때 전라감사로 있던 윤명은이 창건비용을 부담하여 지은 절이나, 1949년 여순사건 때 물타 버리고 지금은 타만 남았다. 적상산은 사면이 절벽으로 둘러 쌓인 천혜의 요새로, 고려말에 최영장군이 군사를 훈련시키던 곳이라 한다.

  적상산성

무주군 적상면에 있는 적상산(1,034m)은 사방이 층암절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 산 위의 안국사가 있던 너른 분지에 무주양수발전소 상부 댐인 적상호가 자리를 잡았고 이 산정호수를

에워싼 능선을 따라 길이 8,143m의 적상산성이 있다.고려 때 거란의 침입이 있었을 때마다 인근 수십군의

 백성들이 난을 피해 목숨을 보전했고, 고려말 왜구들의 침입때는 삼도안렴사가 병사들을 이끌고 들어와

진을 쳤던 고성(古城)이다.


고려 말 공민왕 23년(1374) 삼도도통사 최영(崔瑩)장군이 제주를 토벌하고 서울로 오르는 길에 이곳을

 지나다가 사면이 깎아 세운듯한 암벽으로 둘러싸여 천혜의 요새를 이룬 준험함에감탄하고 훗날을 대비하여

 성을 쌓을 것을 왕에게 건의한 바 있었다. 그 후 조선시대에 이르러 산성을 수축하고,5대 사고 북쪽

 요향산사고가 북쪽 지방이 위험해지자 천혜의 요새인 적상산에 적상산 사고를 설치하여

우리나라 국사(國史)를 지켜왔던 유서깊은 사적지이다.

청하루
안국사의 누각건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목조 맞배건물이다. 1990년대 적상호의 수몰로 인해 안국사 옛터에 있던 누각을 해체한 후 1992년에 복원한 것으로, 현재 불교용품점과 무주 33경의 비경을 엿볼 수 있는 전망대로 활용되고 있다. 건물 외부는 이중구조로 누각 아래로 출입하며, 건물 내부에는 ‘석실비장(石室秘藏)’ㆍ‘청하루(淸霞樓)’ㆍ‘극락전(極樂殿)’ㆍ‘산신각(山神閣)’ 등 수몰되기 전 안국사에 있던 현판들이 걸려 있다. 특히 이 가운데 현판 ‘淸霞樓’는 송석(松石) 이도익(李都翼)의 글씨로 1859년에 쓴 것으로, 가로 165㎝, 세로 55㎝의 장방형 목판에 활달한 필체로 양각되어 있다.

   안국사 극락전

높게 쌓아 올린 축대를 한 걸음 올라서면 누각 위로 구름에 두둥실 떠 있는 듯한 안국사의 큰 법당이 보인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목조 맞배건물로, 1991년 원행(圓行) 스님이 옛 안국사 터에서 옮겨지은 것이다. 잘 다듬어진 자연석 축대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두리기둥을 사용하였으며, 정면 3칸에는 꽃빗살문을 칸마다 설치하였다. 정면과 좌측은 4분합이나 우측은 2분합으로 협칸의 구조가 특이한 평면을 보여준다. 건물 외부는 정면과 배면에 다포계양식의 공포를 설치하였는데, 외부는 3출목으로 되어 있으나 내부는 4출목으로 쇠서는 연봉으로 장엄한 화려한 모습을 보여준다. 또 건물 외벽은 삼면에 심우도(尋牛圖)를 비롯하여 석가탄생도 등 다양한 설화적 도상을 표현하였으며, 단청은 얼금모로단청으로 화려하게 장엄하였으나, 극락전 우측창방 쪽에는 안국사의 설화를 입증하듯 딱 하루만큼 단청할 분량의 목재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안국사 지장전

1992년에 원행(圓行) 스님이 극락전 아래 세운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낮은 단층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얹고 그 위에 원형의 기둥을 세운 주심포계 건물로, 평방 없이 창방 위에 익공식 연화공포가 도출되어 있다. 건물 외부는 2ㆍ4분합의 빗살창호와 4기의 주련이 걸려 있으며, 어칸 상부에는 일중거사(一中居士)가 쓴 지장전 편액이 양각되어 있다. 건물 내부는 육엽연화문으로 단청된 우물천장과 불단으로 구성되며, 목조지장보살좌상과 도명존자ㆍ무독귀왕 및 지장탱이 봉안되어 있다.

   안국사 삼성각

극락전 뒤편 언덕에 있는 삼성각은 1992년 원행(圓行) 스님이 지은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건물이다. 건물외부는 주로 녹청을 사용하여 단청하였으며, 4분합의 어칸 띠살문 상부에는 소남(素南) 이규진(李圭鎭)이 쓴 ‘三聖閣’ 편액이 걸려 있다. 건물 내부는 불단 위로 1899년에 조성된 칠성탱과 근래 조성된 산신탱ㆍ독성탱이 봉안되어 있다. 특히 칠성탱은 금어 우송상수(友松爽洙) 스님이 1899년 김천 봉곡사(鳳谷寺) 극락암에서 조성한 것을 옮겨온 것으로, 장방형의 화폭에 중앙의 치성광여래와 좌우에 일광ㆍ월광보살 및 삼태육성과 이십팔수 등 여러 권속을 배치한 모습이다. 이 탱화는 인근 북고사에도 똑같은 칠성탱이 봉안되어 있어, 지리적으로 가까운 김천지방의 금어인 우송스님이 무주지역의 불화불사에 참여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안국사 천불전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건물로 극락전 우측 축대 아래에 있다. 1991년 옛 사고(史庫) 터에 있던 선원각을 옮겨 지은 것으로, 전란의 화마를 입지 않은 유일한 사고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건물은 중간에 가로로 방(枋)을 쳐서 중층의 구조를 가진 독특한 모습으로, 하부는 사고를 수장한 창고를 겸하며 상부는 법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정면 어칸에는 4분합의 빗살문과 강암(剛菴) 선생이 쓴 ‘千佛殿’ 편액이 걸려 있으며, 좌우 측면에는 내부에 채광을 공급하는 특이한 교창이 있다. 건물 내부는 중앙 불단을 중심으로 좌우 보조단이 있으며, 1995년 합성수지로 만든 석가여래좌상과 문수ㆍ보현보살을 비롯하여 석고천불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후불탱은 붉은 바탕에 금니로 출초한 홍탱으로 금어 남인식(南仁植)이 1969년에 조성한 것이다.


후불탱화

석가가 설법하는 장면을 그린 영산회괘불도로, 석가불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다보여래ㆍ문수ㆍ보현보살이 있고, 왼쪽에 아미타불ㆍ관음ㆍ대세지보살이 서 있는 군도양식이다. 이와 같은 구도는 조선시대 대형 불전인 대웅전이나 대광명전 등에 3폭의 불화가 배치되는 형식을 한 화면에 담은 것으로, 본존불을 강조하고 시선을 집중시키는 효과를 기한 것이다. 이 괘불은 길이 10.75m, 폭 7.2m의 대형으로 임금과 왕비ㆍ세자의 만수무강을 위해 발원하였으며, 1750년경 경남 고성의 운흥사(雲興寺)를 중심으로 전국 각처에서 활약한 의겸비구(義謙比丘)가 참여한 것이 주목된다. 주존인 석가모니는 화면 중앙에 서 있는데, 이목구비는 큼직하며 건장하고 각진 어깨,

유난히 길게 늘어진 팔, 짧은 하체 등 이상화된 불상의 이미지를 표현하고 있어, 보는 이를 압도하는 듯하다. 얼굴인상은 원만하지만 다소 불균형한 듯한 신체표현, 통견의를 걸친 어깨에서 느껴지는 묵중하고 건장한 신체와 거신형 광배 등에서 의겸의 화풍을 짐작할 수 있다.채색과 문양은 녹색과 주홍색을 주로 사용하였고 회색ㆍ황색ㆍ분홍 등 중간색을 배합하여 은은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또 연화문ㆍ모란과 변형된 꽃문양이 단청문양처럼 도안화되어 괘불의 군도형식과 더불어 영축산에서의 설법장면을 환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1792년(정조 16)과 1809년(순조 9)에 후배지(後背紙)를 중수한 기록만 전하고 있어 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안국사 극락전 목조아미타삼존불

안국사 극락전에는 목조 아미타여래좌상을 중심으로 관음보살과 세지보살이 있다. 불상의 조성기록은 없으나, 고개 숙인 자세에 굵고 짧은 목, 장방형의 얼굴에 오뚝한 코, 자연스런 천의(天衣)의 옷주름, 사실적인 손표현 등에서 17세기 불상의 양식적인 특징이 보인다. 본존인 아미타여래좌상은 앉은키 67㎝, 무릎 폭 43.5㎝의 중형 불상이다. 전반적으로 고개를 숙여 움츠린 듯한 어깨에 구부정한 자세를 보이며 장방형의 얼굴에 엷은 미소를 띤 원만한 상호를 가지고 있다. 얼굴은 중앙계주와 정상계주를 가진 나발에 턱이 짧아지고 각이 진 모습으로 이목구비가 뚜렷하다. 오뚝한 코에 삼도가 표현된 짧은 목을 지니고 있으며,

법의는 통견의로 자연스런 옷주름과 사실적인 손표현에서 아미타불의 원만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좌협시인 관음보살은 본존불과 흡사한 모습으로 짧은 상투 속에 보관을 착용하였으며, 보관(寶冠) 아래쪽으로 자연스럽게 머리칼을 흘러내리고 있어 보살의 오묘함이 느껴진다. 우협시인 세지보살은 관음보살과 대칭적인 구도로 조각수법에 있어 아미타불상의 특징을 그대로 닮고 있다. 관음과 세지보살은 앉은 키 61㎝, 무릎폭 36.5㎝로 아미타불상과 함께 17세기 불상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목조아미타삼존불상은 현재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01호로 지정되어 있다.

안국사의 범종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8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이 범종은 1788년(정조 12)에 조성된 곳으로써,

종신의 형태는 입구가 약간 벌어진 형태이며 천판(天板) 위에 용뉴(龍紐)가 결실되기는 하였지만, 조선시대 범종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외래 형식을 가미한 조선후기 범종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중앙부 종신(鐘身)에 주성기(鑄成記)가

방형곽을 이루고 있어 범종의 조성연대를 알 수 있다. 또한 주성기에 보이는 주조장인 이만중과 권동삼은 18세기 후반∼

19세기 전반에 활동했던 인물로서, 이는 주조장의 계보를 확실히 보여주고 있어 귀중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안국사 소장 범종 전북 문화재자료 제188호

1788년(정조12)에 조성된 조선후기의 범종으로, 현재 무주 안국사 범종각 내 후면에 안치되어 있다.

천판(天板)위에는 용뉴(龍紐)가 남아 있지 않아 원래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천판 위에 3개의

 구멍이 뚫려있는 것으로 볼 때 아마도 쌍룡(雙龍)의 용뉴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용뉴를 제외한

전체높이가 83cm에 달하는 중형의 종으로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종신(鐘身)의 형태는 입구가 약간 벌어진 형태이며, 천판과 종신이 만나는 부분은 가는 條線으로 구분하였다.

상대에는 2줄의 범자문원권대(梵字文圓圈帶)로 장식하였으며, 상대 아래에는 약간의 간격을 두고 유곽대(乳廓帶)와

 보살상을 교대로 배치하였다. 유곽의 둘레에는 가는 선으로 인동당초문(忍冬唐草文)이 유려하게 장식되었으며,

내부에는 10옆의 연화 위에 乳頭가 도드라져 있어 마치 연꽃이 피어나는 듯 하다.


유곽과 유곽 사이에는 왼쪽으로 몸을 틀고 우아하게 서있는 보살입상이 4구 주조되어 있다.

보살은 머리에는 보관을 쓰고 합장을 하고 구름 위에 서 있는데, 화려하면서도 정교한 보관과 유려한

 옷자락의 표현은 이 보살상이 뛰어난 솜씨의 장인에 의해 조각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주성기(鑄成記)에는 주조장 이만중(李萬重), 권동삼(權東三)과 함께 각수(刻手) 처성(處性)이라는

 이름이 보이고 있어 처성이 보살상을 조각한 것으로 추정된다.

보살상 옆으로는 시주자명단이 얕은 음각으로 새겨져 있는데, 이 부분은 후대에 추가한 것으로 보인다.

   안국사 요사채,

안국사의 종무를 담당하는 종무소 겸 공양간으로, 지장전 축대 아래에 있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목조 맞배건물로 1992년에 세워졌으며, 건물 외부에는 주련 4기와 거암(居巖)
김봉관(金奉官)이 쓴 편액이 걸려 있다. 건물 전면 4칸은 툇마루를 가진 요사채로, 1칸은 부엌으로
 사용되며 그 뒷면에는 가건물을 덧대어 창고로 활용하고 있다.

성보박물관
세계 각국의 불상과 탱화그리고 불교 유물과 도자기 등
오백여점 이상이전시되고 있다





사찰 규모에 비하여 성보박물관이 잘 정돈되어 있다

세계 여러나라의 불상과 불교문화 도자기등 많은 물건들이 보관되어 있어 불교와

별 인연이 없는 분도 한번 쯤 둘러볼만 하다

 우물이라고는 하나 솟아나오는 물이 아니고 바위 틈으로 스며 나오는 물이고

깨끗해 보이지를 않는다 식수로는 부적합한 것 같다


북방에 위치한 묘향산사고(妙香山史庫)가 후금의 위협뿐만 아니라 사고 관리의 소홀로 소장 도서가 망실(亡失)될

 우려가 있었다. 따라서 다른 적당한 장소에 실록을 이치(移置)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다.

1610년(광해군 2) 순안어사(巡按御史) 최현(崔睍)과 무주현감 이유경(李有慶)의 요청에 따라 사관을 적상산에 보내

땅 모양을 살피게 하고 산성을 수리하게 하였다. 1614년 적상산성 안에 실록전(實錄殿)을 건립했으며, 4년 뒤인

 1618년 9월부터 실록이 봉안되기 시작, 1633년(인조 11)까지 묘향산사고의 실록을 모두 이곳으로 옮겨서 보관하였다.


1641년에는 선원각(璿源閣)을 건립하고 『선원록(璿源錄)』을 봉안하여 적상산사고는 완전한 사고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병자호란 때 5사고 중 마니산사고(摩尼山史庫)의 실록이 산실(散失)되어 이를 다시 보완하는 작업이 1666년(현종 7)에 시작되었다.

이 때 적상산 사고본을 근거로 등사·교정 작업을 했는데 3도 유생(三道儒生)이 300명이나 동원되었다.

이 사고의 설치를 계기로 사고의 수호와 산성 수비를 강화하기 위해 승병을 모집하고 수호 사찰(守護寺刹)을 건립하는 등

 여러 방안이 강구되었다.

사고 설치 직후에는 승려 덕웅(德雄)이 승병 92명을 모집해 산성을 수축하는 한편, 분번(分番)으로 사각(史閣)을 수호하였다.

 특히 정묘호란 때에는 사고를 지킬 사람이 없어 승려 상훈(尙訓)이 사고의 서책을 성밖의 석굴(石窟)로 옮겨 보관하다가

 전쟁이 끝난 뒤 사고에 다시 봉안하였다.


사고의 수호가 이와 같이 어려워지자 1643년 산성 안에 호국사(護國寺)를 창건해 수호 사찰로 하였다.

조선 말기에 사고가 퇴락해 1872년(고종 9) 실록전과 선원각을 개수했으며, 1902년에는 대대적인 개수 공사를 하였다.

1910년 조선의 주권을 강탈한 일제는 실록을 구황실문고(舊皇室文庫)로 편입해 장서각에 보관시켰다.


그러나 산질(散秩)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고, 그 뒤 6·25동란 중에 분실되어버렸다.

실록전과 선원각의 건물이 언제 어떻게 없어졌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선원각은 부근 안국사(安國寺) 경내로 옮겨져 천불전(千佛殿)으로 전해오고 있다.







사고를 돌아보고 여기 전망대에 왔다

아래의 안내 간판에는 이곳이 한국 5경중의 하나라고 하며, 호수는 해발 860m에 위치한 인공호수로써 산 아래에

있는 양수발전소에 필요한 물을 공급하기 위한 댐이며, 이 전망대는 만약의 경우 발전소에 이상이 발생하여

발전기가 급정지했을때 수압을 완충시켜주기 위한 거대한 물탱크라고 한다. 이 물탱크 위에 전망대를 설치하여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높은봉우리가 향적봉 오른뽁 끝 무룡산 중간에 망봉 스키장에는 아직도 눈이 쌓여 있는 모습

 중앙뒤 거칠봉 오른쪽이 향적봉 거칠봉과 향적봉 중간에 칠봉

  하부댐 무주호의 모습

적상산

높이 1,030.6m이다. 소백산맥에 솟아 있으며, 덕유산 정상인 향적봉에서 북서쪽으로 약 10㎞ 지점에 있다.

덕유산국립공원 북동부에 있으며, 주위에는 백운산·대호산·단지봉·시루봉 등이 있다. 산정부는 비교적 평탄하나,

사방이 깎아지른 듯한 암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암벽을 치마바위라고도 하며, 가을철이면 온 산이 빨간 옷을

입은 것 같다 하여 적상산이라고 했다. 동안·서안·북안에서는 금강의 지류인 무주남대천이 발원하며, 계곡이 방사상으로

 발달했다. 적상산에는 단풍나무뿐만 아니라 소나무도 많아 주위의 바위와 잘 어울리고, 인근 마을에는 어디에나

 감나무가 많아 가을의 경관이 특히 뛰어나다. 적상산성(사적 제146호)이 있으며, 조선 후기 성내에 적상산사고가

 세워졌다. 성내에는 안국사와 호국사가 있다.

왼쪽에 보이는게 무주읍

전망대

5월1일 여기 높은 곳에는 아직도 벚꽃이 남아 있다

위에는 수량이 풍부할 때의 모습인데 아래에는 지금 물이 전연 없어 폭포라

하기에는 좀 그렇다

천일폭포

'하늘 아래 단 하나 뿐인 폭포'…암벽 사이로 쏟아지는 모습 장관 *
붉게 물든 가을 단풍이 한국 백경중 하나로 손꼽히는 적상산(1,034m)의 천일폭포는 높이 약 30m의 천연 폭포다. '

하늘 아래 단 하나뿐인 폭포'라 해서 천일폭포라는 이름을 얻었다.


병풍처럼 둘러싼 암벽 사이로 쏟아지는 한 줄기의 비폭(飛瀑)은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는 듯 장관을 이루며 심산유곡의

 정적을 깬다. 보통 탐방객들은 별 기대를 않고 가지만 막상 그 아래에 서면 웅장한 모습에 감탄을 하게 된다.

주차장에서 약 0.3km 떨어져 있다. 걸어서 5~10분 정도면 폭포 아래에 도착할 수 있다.


주변에 머루와인동굴, 정상분지의 양수발전소 상부댐인 산정호수(적상호), 안국사, 적상산전망대 등 볼거리가 많다.

 머루와인동굴을 구경하고 승용차로 적상산 상부댐으로 가는 도중에 잠깐 들러 구경하기 좋다.

안국사로 오르는 길가에 겹벚꽃

양수발전은 심야 시간대를 이용해 남는 전력으로 하부댐에서 상부댐으로 물을 올려

낮에 피크시간대에 발전기를 돌려 전력을 공급하는 장치다

이곳 무주호와 적상호는 이러한 역할을 분담하고 있다



무주호 건립기념탑






무주호의 작은 공원을 잘 조성해 놔서 잠시 휴식을 취하기에 아주 좋은 곳이다

적상호 전망대


 양수발전소


무주양수발전소는 1988년 한국 전력이 2872억 원을 투입하여 공사에 착공한 이후 1995년 5월에 준공되었다,
1호기 상업 발전 개시일은 1995년 2월 28일이며, 2호기 상업 발전 개시일은 1995년 4월 30일이다.
 2001년부터 한국 전력 공사에서 분리된 한국 남동 발전이 운영을 시작하였고 2009년에는 양수 발전소 폐 터널을
 무주군에 임대하여 무주군이 머루 와인 저장용 터널로 사용하면서 연간 10만여 명이 관람하는 새로운 무주의
 관광 자원이 되었다.

또한 2010년에 1995년부터 사용되어 오던 양수 주제어 설비를 분산 제어 시스템으로 교체하고, 2011년 1월부터
 한국 수력 원자력이 운영하고 있다





 섬 노린재나무

 섬 노린재나무 처음보는 나무다

잎은 어긋나기하고 넓은 거꿀달걀모양으로 길이 5~8cm, 나비 3~5cm이며 끝은 꼬리처럼 길고 밑은 넓은 쐐기모양이며

가장자리에 길고 뾰족한 톱니가 있으며 뒷면은 연한 녹색으로 맥 위에 털이 있고 엽병은 길이 3~7mm이며 털이 있다.

꽃은 5~6월에 백색으로 피고 새 가지 끝에 원뿔모양꽃차례로 달리며 꽃차례는 길이 4~10cm이다. 꽃받침은 5열하고

 꽃부리는 5개로 깊게 갈라지며 수술은 다수로 5군으로 나뉘고 화관보다 길다.

가지는 회갈색이며 작은 가지에 털이 없고 나무껍질은 엷은 조각으로 떨어진다.

길을 잘못들어 돌아나오는데 이러한 금속 예술품들이 즐비해 몇장 담아본다

제목은 무주 산골 영화제 인 것 같다

이곳 출신 금속공예가 조문기 씨의 작품이 아닌가 생각된다




 Even Now / Nana Mouskou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