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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광주.제주

무주 한풍루와 최북문학관 . 와인터널

반디랭드에서도 외부 풍경만 보고 왔는데 여기반딧골 전통공예 문화촌에 왔는데

역시나 마찬가지 내부를 들어 갈 수가 없어서 외부에 풍경들만 대충 돌아보게된다


 엣가마터를 재연해 놓고 지금도 사용을하고 있는 것 같다




무주읍 한풍루로에 위치한 전통공예문화촌은 1만여㎡ 부지에 최북미술관, 김환태문학관, 전통공예시연체험관,

전통공예공방, 건강체험관 등이 자리하고 있다.

지난해 6월 개관한 최북미술관에는 최북 작품인 '괴석도' 등 진품과 영인본 80여 점이 전시돼 있다.

김환태 문학관은 개관 이후 '조선시대 화단의 거장들', '김홍도를 만나다', '조선의 프로페셔널 최북'등 다양한 기획전을

열어 6만5천여명의 관람객이 다녀갔다.

이곳은 세미나, 교육, 전시, 출판 등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되면서 문화·예술의 명소로 각광받고 있다

1층에 마련된 옛 생활사 전시체험관에는 갈퀴, 갓, 가마솥 등 154점의 유물이 전시돼 있어 잊혀져가는 우리 것에 대한 향수와

추억을 선사하고 있다 .저렇게 휴관이라고 안내문자가 뜨고 있어 들어 갈 수도 없다


전통공예방은 국새 장인 한상대 선생, 석채화가 김기철 화백, 국악기 장인 소순주 선생, 전통옻칠장인 배종호 선생,

금속공예 장인 조문기 선생 등이 자리하고 있어 작품세계를 감상하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김환태(金煥泰, 1909~1944)

 1934년께 문단에 나와 비평의 독재를 지양하고 작품에 구현된 예술성을 옹호한 평론가다.

그는 1909년 음력 11월 29일 전북 무주군 무주면 읍내리에서 태어난다. 자라는 동안 특기할 만한 사항은 전주고보에 다니던

열다섯 살 때 일본인 교사를 추방하기 위한 동맹 휴학을 벌이다가 퇴학당한 일이다. 보성고보로 적을 옮겨 졸업한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도시샤(同志社)대학 예과에 입학한다. 도시샤대학 예과를 마친 뒤에는 규슈(九洲)제국대학 법문학부 영문과에서 공부한다.


무학여고로 전임해 폐결핵 증세가 깊어진 1943년 9월까지 이 학교의 교사로 재직한다.

김환태는 1934년 4월에 『조선일보』에 투고한 「문예 비평가의 태도에 대하여」를 시작으로 비평 활동에 나선다.

여러 평문을 통해 그는 당대의 주류이던 카프 진영의 계급 문학론에 반기를 든다. 그는 문학을 정치 선전의 도구로 삼는 카프의

 공리주의적 문학관을 비판하며, 문학의 독립성과 순수성을 옹호한다. 비평의 목적을 “재구성적 체험”에 있다고 주장하며, 인상주의

비평의 뼈대를 세운 김환태는 1930년대의 비평 경향에 새바람을 일으킨다.


그의 비평 태도는 “비평가는 언제나 실용적 정치적 관심을 버리고 작품 그것에로 돌아가서 작자가 작품을 사상(思想)한 것과

똑같은 견지에서 사상하고 음미하여야 하며, 한 사상의 이해나 평가란 그 작품의 본질적 내용에 관련하여야만 진정한 이해나

평가가 된다는 것을 언제나 잊어서는 안 됩니다.”라는 말 속에 잘 드러난다. 메슈 아놀드와 월터 페이터의 영향을 받은 그는 서구의

 비평 이론에 정통했고, 기초적인 비평 원리에 충실하려고 애쓴다. 그는 ‘해외 문학파’와 가까이 지냈으며, ‘구인회’의 일원으로

활동하기도 한다.


1940년 김환태는 일제의 탄압에 대한 항거의 표시로 돌연 절필을 한다. 활동 기간은 6~7년밖에 되지 않지만, 문학의 입법자이기보다는

 변호인을 자청한 그의 평론가로서의 입지는 뚜렷하다. 시인으로서는 정지용을, 소설가로서는 김유정을 높이 평가한 그는 현대 한국

 비평 문학의 확립에 이바지한 인물이다.


김환태는 1940년 2월 『문장』에 「주제의 선택과 응시」라는 평론을 마지막으로 발표하고는문단과 절연한 채 일제 말기를 보낸다.

 그가 비평 활동을 멈추고 문단과 담을 쌓고 지낸 것은 건강이 악화된 탓도 있고, 일제의 조선어 말살 정책 등에 대한 반발 심리도

크게 작용한 것으로 알려진다. 1944년 5월 26일, 김환태는 서른다섯 살의 나이로 세상을 뜬다.

금속공예가 조문기 선생의 작품인듯

최북

본관은 무주(茂朱). 초명은 식(埴). 자는 성기(聖器)·유용(有用)·칠칠(七七), 호는 월성(月城)·성재(星齋)·기암(箕庵)·거기재(居基齋)·

삼기재(三奇齋)·호생관(毫生館). 그는 49세의 나이로 일생을 마쳤다고만 전해져 있다. 그러나 그의 행적을 통해 볼 때 대략 1720년

(숙종 46년)에 출생한 것으로 생각된다. 1747년(영조 23년)에서 1748년 사이에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다녀왔다.



심한 술버릇과 기이한 행동으로 점철된 많은 일화를 남겼다. 이에 관해서 남공철(南公轍)의 『금릉집(金陵集)』과 조희룡(趙熙龍)의

 『호산외사(壺山外史)』에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금강산의 구룡연(九龍淵)을 구경하고 즐거움에 술을 잔뜩 마시고 취해 울다 웃다 하면서 “천하 명인 최북은 천하 명산에서

 마땅히 죽어야 한다.”고 외치고는 투신하였던 일이라든가, 어떤 귀인이 그에게 그림을 요청하였다가 얻지 못하여 협박하려 하자

“남이 나를 손대기 전에 내가 나를 손대야겠다.”고 하며 눈 하나를 찔러 멀게 해 버린 이야기 등은 그의 괴팍한 성격을 단적으로

알려 주는 대표적인 일화라 하겠다.


그래서 당시의 사람들은 그를 광생(狂生)이라고까지 지목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평양이나 동래 등지로 그림을 팔러 가면 많은 사람들이 그의 그림을 구하기 위하여 모여들었다고 한다.

 또한 그는 「서상기(西廂記)」와 「수호전」을 즐겨 읽었으며, 김홍도(金弘道)·이인문(李寅文)·김득신(金得臣) 등과 교유하였다.

그리고 『호산외사』에 의하면 원말 사대가(元末四大家)의 한 사람인 황공망(黃公望)의 필법을 존중하였다고 전한다.



현재 남아 있는 그의 작품들에는 인물·화조·초충 등도 포함되어 있으나 대부분이 산수화이다.

그의 괴팍한 기질대로 대체로 치기(稚氣)가 있는 듯하면서 소박하고 시정(詩情) 어린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특히 그의 산수화들은 크게 진경산수화와 남종화 계통의 두 가지 경향으로 나누어진다. 진경산수화에서는 「표훈사도(表訓寺圖)」에

 보이는 바와 같이 정선(鄭敾)의 화풍을 연상시키는 것도 있다.


진경산수에 대하여 최북은 “무릇 사람의 풍속도 중국 사람들의 풍속이 다르고 조선 사람들의 풍속이 다른 것처럼, 산수의 형세도

 중국과 조선이 서로 다른데, 사람들은 모두 중국 산수의 형세를 그린 그림만을 좋아하고 숭상하면서 조선의 산수를 그린 그림은

그림이 아니라고까지 이야기하지만 조선 사람은 마땅히 조선의 산수를 그려야 한다.”고 그 중요성을 크게 강조한 바 있다.


국립광주박물관 소장의 「한강조어도(漢江釣魚圖)」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추경산수도(秋景山水圖)」등을 대표작으로 하는

 그의 남종화 계열의 작품에서는 심사정(沈師正) 등의 영향이 부분적으로 엿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화풍을 계승, 변천시키면서 개인 소장의 「조어도(釣魚圖)」와 「풍설야귀도(風雪夜歸圖)」에 보이는 바와 같이 대담하고도

 파격적인 자신의 조형 양식을 이룩하여 조선 후기 회화의 발전에 기여한 바 크다. 이밖에 대표작으로 개인 소장의

「공산무인도(空山無人圖)」와 간송미술관 소장의 「누각산수도(樓閣山水圖)」 등이 있다.


문학관이나 미술관을 들어 갈 수가 없지만 이고장 출신 김환태 와 최북에 대한 생애를 남겨보고자 한다

 바람에 팔랑개비는 쉼 없이 돌아가고

건강체험관(연면적 973㎡ 규모)은 숯가마, 찜질방, 샤워장, 안마의자, 적삼목 사우나, 매점 등의 시설이 갖춰져 있어 많은 사람이 찾고 있다.

무주 남대천의 풍경들을 감상하며 여유로운 시간을 가져본다

남대천

금강의 제1지류이며 무주 남대천이라고도 한다. 길이는 54㎞. 남대천의 상류는 덕유산(1,614m) 동쪽 지역을 중심으로 무주군

무풍면 일대에서 발원한 도마천•배동천•금평천•미령천, 무주군 설천면 일대에서 발원한 등방천•구천동천•벌한천 등이

내려와 합류한 원당천, 인근의 용화천•미래천•내복천 등의 지천으로 이루어지며, 무주읍 남쪽에 이르러 상곡천•적상천과

 합류한 뒤 무주읍 대차리 남쪽에서 금강 동쪽으로 흘러든다. 상류 일대는 덕유산국립공원에 속하여, 자연경관이 뛰어난

무주구천동과 나제통문·적산산성 등의 유적이 있다.

남대천은 특히 이 강의 곡지를 따라 전개된 1개의 대와 10개의 못, 여러 개의 폭포 등 33경이 약 36㎞에 걸쳐 있다.

설천면과 무풍면 사이에 있는 나제통문은 과거 신라와 백제의 경계를 이루었던 곳으로, 지금도 백제 쪽이었던 설천면과

 신라쪽이었던 무풍면은 같은 군에 속하면서도 생활풍속과 방언이 다르다. 무주읍에서 구천동계곡에 이르는 구간에는

 특산물인 다슬기가 많이 서식하고 있다. 근래 들어 겨울철에는 무주읍 남대천 일대에서 남대천 얼음 축제가 펼쳐진다.


매년 반딧불 축제를 하는 남대천 다리

가을에 반딧불이 축제 때에 꼭 한 번 들린다고 벼르고 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언젠가는 그날이 오겠지?

4.1 무주만세운동은 1919년 3월 7일 서울에서 일어났던 3.1 만세운동에 대한 소식과 독립선언문이 무주지역에 전해지면서 비롯됐다.

이 독립운동은 4월 1일 무주장날에 일어났다. 전일봉 선생을 비롯한 무주군 관내 교회들과 보통학교 학생들이 주축이 됐다.

4.1 무주만세운동 후 무주지역에서는 총 7회에 걸쳐 3,500여 명이 만세운동에 참여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당시 전일봉 선생이‘삼숭학교’간판을 걸고 무주, 진안, 장수지역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주던 여올교회(적상면 소재)는

 아직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전일봉 선생은 1896년 10월 무주군 적상면 삼가리 늘갓마을에서 태어났다. 경술국치 이후 민족이 일본제국주의의 수탈과

압박에 시달리자 1914년 애국 청년들과 비밀리에 접촉했다. 그리고 민족자결정신으로 일본을 몰아내고 나라를 되찾고자

계몽운동에 몰두하게 된다.


거사 일인 4월 1일 오후 2시경, 40~50여 명이 먼저 시장 중앙에 태극기를 세우고 집합했다. 전일봉이 연설을 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에 주위의 장꾼들과 보통학교 학생들이 태극기를 손에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내 행진을 벌였다.
그러나 일본 헌병은 시위 군중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헌병 분견소의 무장 헌병대가 출동하여 이들 시위 군중을 해산시켜 버렸다.

 이때 전일봉과 보통학교 학생 3명이 체포된다.

그날 밤 읍내 주위 산상에서 청년 및 보통학교 학생들이 횃불을 들고 만세시위를 계속하였다. 전일봉은 이 일로 인해 4월 11일

 광주지방법원 금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으로 재판을 받는다.

결국 징역 8개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서울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그는 출감한 뒤에 고향으로 돌아와 생활하며 무주지역 교회

재건에 힘쓴다. 또한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가며 애국운동을 심어주는 지하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그리고 국가보훈처에서는 2002년 11월 1일 전일봉 선생상을

 현충시설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수변이 아닌 언덕에 이렇게 수양버들이 늘어서 있으니 참 시원하고 유연해 보인다


지남공원 내에 있는 한풍루(寒風樓)는 호남 최고의 누각으로 불린다.

전주의 한벽당(寒碧堂), 남원의 광한루(廣寒樓)와 함께 삼한(三寒)의 하나이다.


 제멋대로 뻗어나간 버드나무

국민방위군6.25 무주수복 공적비








신현돈의 묘지

경상북도 안동 출생. 경성의학전문학교를 나온 뒤 전라북도 무주에서 일찍부터 병원을 개업하였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지청천(池靑天)의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에 참여, 우익계청년운동의 선봉에 나섰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선거 때 무주에서 출마, 당선됨으로써 의회진출의 길을 뚫었으나 곧 정부수립 뒤 최초의 전라북도지사 발령에

따라 의원직을 사임하였다. 넉 달 동안의 제헌의원이었다. 그가 원내에 다시 복귀한 것은 4·19의거 뒤인 1960년의 제5대 국회 때였다.


오랫동안 의사로서 기반을 닦아온 무주에서 민주당공천을 받고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경상북도 안동이 고향이고, 경상도 사투리를

 사용하면서도 이력서의 본적란에는 항상 전라북도 무주를 기입하였는데, 그것은 그가 경성의학전문학교를 나온 뒤 당시 아무도

엄두를 내지 않던 벽촌인 무주에서 병원을 개업하고 백백교(白白敎)와 같은 무서운 미신이 발상한 그곳의 개화와 봉사에 보람을

 찾고 살았기 때문이었다.


제5대 국회의원이 된 직후, 장면(張勉)내각의 조각(組閣) 때 보건사회부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입각한 지 얼마 안 되어 신구파간의

 흥정에 밀려 보사부장관자리를 내놓아야 하였는데, 그대신 무임소장관 자리가 제공되었고, 그 뒤 다시 내무부장관으로 임명되었다.

무주 와인터널

원래 이곳은 무주양수발전소 건설 당시 굴착 작업용 터널로 사용하던 곳이다.

빛을 차단하고, 일정하게 온도가 유지되는 터널은 최고의 와인 숙성 저장고가 되었다.

무주군의 산머루로 와인을 만들고 이곳에서 숙성, 저장, 판매하니 방문자들에게도 특별한 경험이 된다.

몸과 마음을 풀어주는 와인 족욕이 여행자들에게 인기다.

지금현재는 입장료 무료 입장전에 열체크등 검사를 거처 입장을한다

무주군은 경상남북도, 전라북도, 충청남북도 등 5개도 6개 시, 군이 함께 만나는 중심에 위치해 있다.

특히, 국토의 남북축을 형성하는 대전-진주간 고속도로가 개통되어 무주를 관통함으로 서울, 부산 등 전국 어디서나

2시간대에 도달할 수 있는 접근성을 갖추게 되어 명실상부한 내륙교통의 중심지로서 무한한 성장잠재력을 지니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내륙지방 중에 가장 중심부를 점유한 산악지이며 고랭지 청정지역으로 친환경 농업생산

 여건이 좋다. 주요 농산물은 사과, 배, 고추, 느타리버섯, 마늘, 포도, 복숭아, 대학찰옥수수, 산머루, 오미자 등이 있다.


터널을가지전 계곡에 흐르는 시원한 물줄기 이날 무척이나 더웠다









와인을 누가, 언제부터 만들어 마셨는지 아직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이제까지 발견된 여러 증거에 의하면 선사시대 이전부터 만들어 마셨다
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마스쿠스의 남서쪽에서 BC 6,000년경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포도
압착기가 발견되었고,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BC 4,000년경에 와인을
담았던 그릇으로 추정되는 항아리의 마개가 발견되었다.


이 외에도 고대 이집트의 벽화, 바빌로니아의 상형문자, 성서, 아시리아
의 유적 등에서도 와인에 관한 여러 자료들을 찾아볼 수 있다.

 
이 모든 자료들을 볼 때, 와인은 BC 4,000년경에 소아시아 지방에서 시작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포도 품종의 하나인 비티스 비니프라(Vitis Vinifera)도

 페르시아가 원산지이다.


그럼, 와인은 어떻게 전파되었을까?
고대 문명의 중심지였던 그리스는 BC 3000년경부터 포도를 재배하면서
인근 국가와로마에 재배 기법을 전파하였고, 이렇게 전파된 포도 재배 기
술은 세계 정복에 나선 로마군에 의해 프랑스, 스페인, 이태리, 독일,
포루투갈 등지로 널리 알려졌다.
BC 1500년 경에는 페니키아와 레바논, 시리아, 이집트 등의 중동 지역에
서 활발한 교류가 있었다. 이 때 와인의 인기는 폭발적이어서 와인을 찬양하는

 노래와 전설, 심지어는 와인의 신까지 만들어졌다.
중국에서도 BC 2000년경에 와인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와인시음장 여기서 음미해 보고 와인 2병을 구입했다. 5개 회사에서 제조한 와인 병당 2만원 이다

유럽에서는 보통 5 불 이내인데 조금 고가이다 머루와인은 포도와인에 비해서 떨은맛이 없는 것 같다


시음장을 지나 저 안쪽에는 와인 족욕장도 있다는데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인지

지금은 운영을 안하는 것 같다

 터널안은 항상 영상 15도를 유지하기 때문에 와인 숙성에 최적한 온도라고 한다




 양수발전소 공사 터널이라서 인지 발전소 홍보도 겸한 것 같다


 거대한 와인병 모형

 음주가

술은 입으로 들어오고 사랑은 눈으로 들어오네

우리가 늙어서 죽기전에 알게된 진실은 이 것 뿐

잔들어 입에 가져가며 그대보고 한숨짓네

예이츠




내가 하이델 베르크에서 직접 본 와인통입니다

세계에서 제일큰 와인통인데 기네스북에 등재된 엄청난 술통입니다

길이 8.5m 높이7m저장량 221.726리터 입니다참나무 130그루가 사용됐다고

하고 1756년 카를 데오도르에 의해 만들어 젔다고 합니다

전쟁때 식수를 구하기 어려워 술을 비축해 놨다는 설도 있고 왕이 술을

너무 좋아해 술통을 크게 만들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와인통을 지키는 난쟁이 페르케오목상

전쟁중에 와인통을 지키기위해 빨간머리 난쟁이를 고용했는데

몰래 하루에 18 리터의 술을 15년동안 마셨고 취해서 잠만자곤 했는데

병사들이 난쟁이를 깨우는 일까지 있었다네요

그렇게 술을 마셨는데도 난쟁이는 80세까지 살았다고 함

의사가 건강이 않좋으니 술을 끈으라 했는데 그다음날 죽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