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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대구

군위 삼국유사의인각사

  <삼국유사>는 우리나라 국보 제 306호와 306-2호로 지정되어 있다. <삼국유사>는 그 어디에도 비길 데 없는

     한 개인이 이룬 위대한 업적이다. <삼국유사>가 갖는 위대함은 일연스님이 오로지 백성을 사랑하는 일념으로

     우리나라 구석구석을 두 발로 걸어 채집한 우리 고대사의 역사·지리·문학·종교·언어·민속·사상·미술·고고학 등

     총체적인 문화유산의 원천적 보고이기 때문이다. 그 숭고한 역사서를 집필한 곳이 바로 인각사다.


     인각사는 신라 선덕여왕 11년(642년) 의상대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이곳을 일연스님은 생의 마지막 안거지로

     삼고 <삼국유사>를 비롯한 백여 편의 불교 서적을 집필하고 구산문도회를 열며 역사에 길이 빛날 혁혁한 공적을

     세웠다. 일연스님은 78세에 보각국사의 칭호를 얻고 95세의 노모를 모시기 위해 인각사로 내려왔다.

 

그 이듬해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인각사에서 한평생 수집한 우리 문화를 고스란히 꽃피워 후세에게 옛적의

문화를 향유하도록 했다. 그 바탕 위에 우리의 미래 또한 찬란히 열매 맺을 수 있지 않을까.  
     군위군 고로면 삼국유사로 250에 위치한 인각사는 산속 깊이 숨어 있는 여느 사찰과는 달리 큰 도로변

     평지에 있어 길을 가다 문득 들어가 볼 수 있다.

     지난번에 다녀온 달성 인흥사지에보면 삼국유사는 인흥사에서 기초를했고 인각사에서 완성을 한것 같습니다

옛 인각사지에서 출토 된 유물들

국사전에는 부처님 대신 일연스님영정을 모시고 있다

영정도 전(2017년)에 보았던 영정하고 다른 모습이다

一然讚歌(일연찬가) _ 고은(高銀)

 

오라 華山 기슭 麟角寺로 오라 하늘 아래 두 갈래 세 갈래

찢어진 겨레 아니라 오직 한 겨레임을 옛 朝鮮 檀君으로부터 내려오는

거룩한 한 나라였음을 우리 子孫 萬代에 消息 傳한 그이 普覺國尊

一然禪師를 만나 뵈러 여기 인각사로 오라 아 여든 살 그이 촛불 밝혀

한字 한字 새겨 간 그 燦爛한 魂 만나 뵈러 여기 麟角寺로 오라

 

오라 渭川 냇물 인각사로 오라 痛哭의 때 이 나라 온통 짓밟혀

어디나 죽음이었을 때 다시 삶의 길 열어 푸르른 來日로 가는 길 열어

情든 땅 坊坊曲曲에 한 송이 蓮꽃 들어 올린 그이 보각국존 일연

선사를 가슴에 품고 여기 麟角寺로 오라 아 여든 살 그이 촛불 밝혀

한자 한자 새겨 간 그 찬란한 혼 만나 뵈러 여기 인각사로 오라. 글 高 銀

 

예전에 갔을 때는 이렇게 일연선사 생애관이 있었는데 폐쇄하고 따로 유물을 보관하는 것 같다

위 사진만 국사전 안 벽에 진열을 해놓고 있다

앞면

뒤에서본 보각국사탑 각 면마다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탑에 조각 된 그림문양 탁본이다

 

옛 인각사지에서 발굴된 기와 파편들

        불상은 인각사에서 동쪽으로 약 60m 떨어진 밭에 위치한 미륵당 안에 안치되어 있는데,

        눈을 반쯤 뜨고 명상에 잠긴 듯하며 풍만한 얼굴엔 자비로움이 가득하다. 코는 파손되어 원래

        상태를 파악할 수는 없으나 균형있게 처리되어 있다.

 

입술은 작고 도톰하게 새겨 풍만한 얼굴을 더욱 부각시키는 효과를 주고 있고, 목은 파손되어

시멘트로 보수하였는데 3개의 주름삼도(三道)가 표현되어 있다.

옷은 양 어깨가 마멸되어 있긴 하지만, 세심하게 새긴 옷주름으로 보아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채 왼쪽 어깨에서 겨드랑이로 걸친 우견편단으로 입었음을 알 수 있다

 

.       두 팔과 무릎이 깨어져 없어졌는데, 무릎은 불신에 비해 높은 편이나 안정된 비례감은 잃지 않았다.

        손 모양은 왼손의 팔꿈치를 굽혀 무릎 쪽으로 내려오고 있음을 어렴풋이 확인할 수 있고, 오른손은

        전체적인 조형상 촉지인(觸地印)을 취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불상은 부피감 있는 얼굴, 평행계단식 옷주름선, 양감있는 가슴 표현 등의 조각수법으로 볼 때

        통일신라시대 불상양식의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인각사의 창건과 관련한 중요한 불상이다.

전에 왔을 때 모습 위에는 현재의 모습인데 탱화도 있고 부처가 한분 더 모셔저 있다

향나무도 위에는 현재의 모습이고 아래는 2017년도 모습이다

앞면 중앙은 문을 봉하고 탱화로 장식

극락전 앞에 포대화상 복전함도 전에는 없었는데 다시 생겼다

 

인각사를 다시 한번 뒤돌아 보고 

학이 살았다고 해서 학소대라 했다함

학소대에서 일연공원까지 각종 조각상들이 배치되어 있는데 시간 때문에

걸어보지를 못하고 공원으로 바로 갔다

가동중 일때의 폭포

일연폭포(인공폭포)

일원공원 금암 절벽에 설치한 높이 100m 분당 12톤의 물을 방류한다

일연(一然) 스님의 일대기를 기록해 놨다

 

1206년(희종 2)∼1289년(충렬왕 15). 고려 후기의 승려. 경주(慶州) 김씨. 첫 법명은 견명(見明). 

자는 회연(晦然)·일연(一然), 호는 목암(睦庵). 법명은 일연(一然). 경상도 경주의 속현이었던

장산군(章山郡: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 출신. 아버지는 언정(彦鼎)이다. 왕에게 법을 설하였으며, 

간화선(看話禪)에 주력하면서 『삼국유사(三國遺事)』 등을 찬술하였다.

 

1214년(고종 1) 해양(海陽: 지금의 전라남도 광주)에 있던 무량사(無量寺)에서 학문을 익혔고, 1219년 설악산

진전사(陳田寺)로 출가하여 대웅(大雄)의 제자가 되어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뒤, 여러 곳의 선문(禪門)을

방문하면서 수행하였다. 이 때 구산문 사선(九山門四選)의 으뜸이 되었다.

 

1227년(고종 14) 승과의 선불장(選佛場)에 응시하여 장원에 급제하였다. 그 뒤 비슬산(琵瑟山)의 보당암

(寶幢庵)에서 수년 동안 참선에 몰두하였고, 1236년 10월 몽고가 침입하자, 문수의 계시로 보당암의 북쪽

무주암으로 거처를 옮겨 깨달음을 얻었다. 이 해에 삼중대사(三重大師)의 승계(僧階)를 받았고, 1246년

선사(禪師)의 법계(法界)를 받았다.

 

1249년 남해의 정림사(定林寺)에 머물면서 남해의 분사대장도감(分司大藏都監) 작업에 약 3년 동안

참여하였다. 1256년 윤산(輪山)의 길상암(吉祥庵)에 머물면서 『중편조동오위(重編曹洞五位)』 2권을 지었고,

1259년 대선사(大禪師)의 승계를 제수 받았다.

 

1261년(원종 2) 원종의 부름을 받고 강화도의 선월사(禪月寺)에 머물면서 설법하고 지눌(知訥)의 법을

계승하였다. 1264년 경상북도 영일군운제산(雲梯山)에 있던 오어사(吾魚寺)로 옮겨갔으며, 비슬산

인홍사(仁弘寺)의 주지가 되어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1268년에는 조정에서 베푼 대장낙성회향법회

(大藏落成廻向法會)를 주관하였다.

 

1274년 그가 인홍사를 중수하자 원종은 ‘인흥(仁興)’으로 이름을 고치고 제액(題額)을 써서 하사하였으며, 

비슬산 동쪽 기슭의 용천사(湧泉寺)를 중창하고 불일사(佛日寺)로 고친 뒤, 「불일결사문(佛日結社文)」을 썼다.

 

1277년(충렬왕 3)부터 1281년까지 청도 운문사(雲門寺)에서 살면서 선풍(禪風)을 크게 일으켰다. 

이 때 『삼국유사』를 집필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1281년 경주에 행차한 충렬왕에게로 가서, 불교계의

타락상과 몽고의 병화로 불타 버린 황룡사의 모습을 목격하였다.

 

1282년 충렬왕에게 선(禪)을 설하고 개경의 광명사(廣明寺)에 머물렀다. 다음 해, 국존(國尊)으로 책봉되어

원경충조(圓經冲照)라는 호를 받았으며, 왕의 거처인 대내(大內)에서 문무백관을 거느린 왕의 구의례

(摳衣禮:옷의 뒷자락을 걷어 올리고 절하는 예)를 받았다.

 

그 뒤, 어머니의 봉양을 위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어머니가 1284년에 타계하자, 조정에서는 경상도 군위

화산(華山)의 인각사(麟角寺)를 수리하고 토지 100여 경(頃)을 주어 주재하게 하였다. 인각사에서는 당시의

선문을 전체적으로 망라하는 구산문도회(九山門都會)를 두 번 개최하였다.

 

1289년 손으로 금강인(金剛印)을 맺고 입적하였다

고승의 공간

삼국유사에 나오는 고승들의 일대기를 기록한 공간이다

원효와 의상은 알겠는데 양지 원광 혜룡과 혜통은 모르는 분이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설화의 대표적인 8개의 설화를 기술해 놨다

하늘이 내려준 옥대
청태 4년 정유년(937) 5월에 정승 김부가 금으로 새기고 옥으로 장식한 허리띠 하나를 바쳤는데 길이는

열 아름이요. 아로새긴 각띠가 62였다. 이것은 하늘이 진평왕에게 내린 허리띠라고 하여 고려태조가

받아서 내고에 보관했다.

제26대 백정왕의 시호는 진평대왕이고 성은 김씨이다. 그는 태건 11년 기해년(579) 8월에 즉위했는데,

신장이 11척이나 되었다. 하루는 내제석궁① 에 행차하여 섬돌을 밟는 순간 돌 두 개가 한꺼번에 부서졌다.

왕이 곁에 있던 신하에게 말하였다.
“이 돌을 옮기지 말고 후세 사람들에게 보여라.”이 돌이 바로 성 안에 있는 다섯 개의 부동석 중 하나이다.

왕이 즉위한 원년에 천사가 궁궐 뜰에 내려와 왕에게 말하였다.
“상황께서 나에게 이 옥대를 전해주라고 명하였소.”
왕이 친히 무릎을 꿇고 받자 사자는 하늘로 올라갔다. 모든 교묘의 큰 제사에는 모두 이 허리띠를 맸다.
훗날 고구려왕이 신라 정벌을 꾀하다가 이렇게 말하였다.


“신라에는 세 가지 보물이 있어 침범할 수가 없다고 하는데,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황룡사의 장륙존상이 하나요, 그 절의 9층탑이 둘이요, 진평왕의 천사옥대가 셋입니다.”
(고구려왕은) 이에 정벌 계획을 멈췄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여이설화〉라고도 한다. 〈삼국유사〉 권2 경문대왕조에 실려 있다.

경문왕은 왕이 되고 난 뒤 갑자기 귀가 길어져서 나귀 귀처럼 되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왕의 두건을

만드는 복두장(幞頭匠) 한 사람뿐이었다.

 

그는 이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다가 죽을 때가 되어 도림사 대나무숲에 들어가 "우리 임금의 귀는 나귀

귀와 같다"고 외쳤다. 그뒤 바람이 불 때마다 대나무가 서로 부딪치며 그런 소리가 났다.

그러자 왕은 대나무를 베고 그 자리에 수유를 심게 했는데, 그뒤로는 "우리 임금의 귀는 길다"는

소리가 났다고 한다.

견훤의 탄생설화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면, 옛날에 광주(光州) 북촌에 사는 부잣집에 딸이 있었다.

그녀가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밤마다 자줏빛 옷을 입는 남자가 침실에서 와서 관계를 맺고 간다고 말했다.

이에 부친이 딸에게 바늘에 실을 꿰어 남자의 옷깃에 꽂아 두라고 한다. 딸이 아버지의 말대로 하였다.

 

날이 밝아 그 실을 따라 갔더니 북쪽 담 밑으로 사라졌다. 그곳을 팠더니 큰 지렁이의 허리에 바늘이 꽂혀 있었다.

그 후로 태기가 있어 사내아이를 낳았다. 그가 바로 후백제의 시조인 견훤이었다.

견훤이 태어나서 포대기에 싸여 있을 때의 일이다.

 

밭을 갈고 있는 아버지를 위해 어머니가 식사를 준비하기위해 견훤을 수풀 아래에

놓아두었는데, 호랑이가 와서 젖을 먹였다. 이 말을 들은 마을 사람들이 이를 이상하게

여겼다. 견훤이 장성하자 몸집이 좋고 기품이 활발하며 외모가 기이한 것이 범상치 않았다고 한다.

견훤이 자라서 후백제를 세우고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

 

손순이 아이를 묻다

아이를 묻은 손순(孫順)은 우리나라의 효자다. 손순은 통일신라 제42대 흥덕왕(興德王) 때 사람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아내와 함께 남의 집 품팔이를 하며 늙은 어머니를 정성스레 봉양했다. 부부에겐

어린 아이가 있었는데 끼니때마다 할머니의 음식을 빼앗아먹어 골치였다.

손순이 부인에게 말했다. "아이는 다시 얻을 수 있으나 어머니는 다시 구할 수 없소. 아이가 어머니 음식을

빼앗아 먹기 때문에 굶주림이 너무 심하오. 그러니 아이를 땅 속에 묻어 어머니를 배부르게 해야겠소"

아이를 업고 동네 뒷산에 가서 땅을 파는 도중에 무엇이 걸려 파 보았더니 돌로 된 종이 나왔다.


아이의 복이라 여겨 묻지 않고, 석종을 지고 내려와 집 대들보에 매달고 쳐 보니 대궐에까지 소리가 퍼져 나갔다.
흥덕왕이 사연을 듣고 옛날 중국의 곽거(郭巨)라는 효자가 아들을 묻으려 할 때 하늘에서 금솥(金釜)을

내렸다더니 이것은 전세의 효와 후세의 효를 천지가 함께 본 것이라며 칭찬했다.

그리고선 집 한 채와 매년 벼 50섬을 내리고 효성을 기렸다.

만파식적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을 위하여 동해가에 감은사(感恩寺)를 지었다.

신문왕 2년에 해관(海官)이 동해안에 작은 산이 감은사로 향하여 온다고 하여 일관으로 하여금

점을 쳐 보니, 해룡(海龍)이 된 문무왕과 천신이 된 김유신(金庾信)이

수성(守城)의 보배를 주려고 하니 나가서 받으라 하였다.


이견대(利見臺)에 가서 보니, 부산(浮山)은 거북 머리 같았고 그 위에 대나무가 있었는데,

낮에는 둘로 나뉘고 밤에는 하나로 합쳐졌다.

풍우가 일어난 지 9일이 지나 왕이 그 산에 들어가니, 용이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면 천하가

태평해질 것이라 하여, 그것을 가지고 나와 피리를 만들어 보관하였다.


나라에 근심이 생길 때 이 피리를 불면 평온해져서, 만파식적이라 이름을 붙였다.

그 뒤 효소왕 때 이적(異蹟)이 거듭 일어나,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 하였다

 

정수스님 여자 거지를 구하기

애장왕 때의 일입니다. 정수스님이 황룡사에서 머물 때였습니다.
눈이 많이 쌓이고 날도 저문 어느 겨울날이었습니다. 정수스님이 천엄사 일주문 밖으로 지나가고 있는데

한 여자 거지가 아이를 낳고 누워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여자는 추위로 거의 얼어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정수스님은 그녀가 너무 측은하여 다가가 그녀를 힘껏 안아 주었습니다.

여자는 정수스님의 따뜻한 체온 덕에 정신을 차리고 겨우 깨어났습니다.

여자가 깨어나자 그는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을 모두 벗어 그녀를 덮어 주고, 자신은 벌거벗은 채로 사찰로

달려와서 거적 풀을 덮고 밤을 새웠습니다.

그때 갑자기 하늘에서 궁정 뜰로 외치는 소리가 났습니다.
“황룡사의 정수스님을 임금의 스승에 봉하여라.”
왕이 이 소리를 듣고 놀라 급히 사람을 보내 무슨 일인가 알아보게 하였더니, 사신이 이런 사실을 왕에게

보고하였습니다. 왕은 예의를 갖춰 정수스님을 대궐로 맞아들인 뒤 그를 국사로 봉했습니다.

일몰시간이 조금 남아서 군위호도 잠간 들렸다

 남천은 붉은 단풍과 빨간 열매가 아직도 가을인줄 아나보다

군위호

다목적댐의 모습

댐 관리사무소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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