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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대구

군위 한밤마을 돌담길

아침에 숙소에서 바로 왔더니 아직 거리는 한산하다 

겨울이라서 활동을 늦게 하나보다(12/13)

여기도 분명 옛날에는 집이었을 텐데 지금은 터로남아 돌담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사위질빵도 삶을 마감하고 씨방만 남아 있다

감나무에는 감이 그대로 남아 주인을 찾고 있는 듯

이집도 공터만 남았다

의성에서 제대로 못본 산수유 열매를 여기와서 제대로 보는 것 같다

산수유 마을답게 담벽의 산수유나무에는 산수유가 주렁주렁 많이도 달려있다

군위대율리대청 (軍威大栗里大廳):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62호. 마을 중심에 대청이 있다.

원래 절의 종각이 있었던 자리에 건립한 학사(學舍) 건물이다.

 

조선 초기의 건물이었는데 임진왜란에 소실되자 인조10년(1632)에 중창되었다.

효종2년(1651)과 숙종32년(1705)에 각각 중수되었고 지금은 마을 경노당으로 활용되고 있다.

정면5칸 측면2칸 다락집으로 구조되어 있다.

 

대율리는 부림홍씨의 집성촌으로 고려초기 남양홍씨 홍란(洪鸞)이

부림현으로 이주해 살면서 본관을 부림으로 하였고 자손들이 번성하였다.

대청은 돌담에 둘러싸인 고옥들이 산재한 중심부에 위치해서

마을에서 무슨일이 생기면 모여드는 그런 장소이기도 하다.

 

 다락집은 5량집이며 익공집 계열이나 장식성은 요란스럽지 않다.

종도리 받침의 디공중에는 파련대공도 있어서 아주 질박한 맛은 면하였다.

마루는 우물마루이며, 가장자리에 계자난간은 설치하였고 간살이는 전체를 개방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남천 고택은 현재 카페로 변모를 했고 오전 이른시간이라  문이 닫혀 있기도 하고

들어가기 미안해서 밖에서만 바라봤다 

아래 사진들은 2017년 여름에 모습

안채로 들어가는 뜰

쌍백당이라는 당호를 갖고 있는 사랑채는 2칸 온돌방과 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건물의 앞면에만 원기둥을 두고 난간을 둘렀다.

군위상매댁 (軍威上梅宅) :

부림 홍씨의 집성촌인 대율리에 있는 주택으로 문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집이다.

쌍백당이라고도 불리는데 250여년 전에 홍우태 선생의 살림집으로 세웠다고 전한다.

현재 건물은 그 뒤 새로 지은 것으로 보이며, 사랑채 대청 상부에 남아 있는

기록으로 보아 그 시기는 현종 2년(1836)경으로 추정한다.

 

원래는 독특한 배치 형태를 이루고 있었으나 중문채와 아래채가 철거되어

현재는 ㄷ자형 안채와 一자형 사랑채, 사당이 남아 있다.

안채는 부엌·안방·대청·건넌방·헛간·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대청 위에는 다락을 두어 과일 등을 보관하기도 하고

여름철에 피서의 용도로 쓰기도 하였다.

 

 

또한 대청 위에 다락을 두거나 헛간 위에 다락을 둔 특이한 형태도

눈여겨 볼만한 구조로, 조선 후기에 보이는 실용주의 개념을 건축에

도입한 예로 볼 수 있는 주택이다.

시계방향으로 안채 .부엌 .사당 .안채 뒤벽 쉼터 정자 이런정자가 셋이나 있다

 

연못은 현재 물이 없다

생각보다 소박한 안채 모습

크게 손보지 않아 고풍스러움이 더 편안했다

 

 상매댁은 원래 이 집을 지은 20대손 남천 귀응 선생의 호를 따 남천고택으로 불렸으나,

1999년 3월 경상북도가 부림 홍씨 28대손인 홍세헌 선생의 부인인

이기남(2007년 9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남) 씨의 택호인 '상매댁'을

지방문화재자료 제357호로 지정하면서 지금은 상매댁으로 불리고 있답니다

 

현재 이 집은 부림 홍씨 29대손인 홍석규 씨가 지키고 있답니다

이 집의 막내아들로 영남대 병원에서 일하다가 명예퇴직을 하고

활발히 한밤마을을 보전하는 데 힘쓰고 있다고 합니다

 

대청 위의 다락에는 남북으로 각각 3개의 작은 창문을 두고 있는데,

이 봉창들은 가로×세로 30㎝가량의 쪽문 2개를 통해 외부의 바람을 안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 다락에는 음식과 과일 등을 보관하기도 하고 여름철 피서 용도로 사용되기도 했다

참 지혜롭다는 생각도 들고 바라보는데 멋스럽다

 

 아마 지금은 카페로 운영을하고 있으니 내부구조도 많이 바뀌지 않았을가?

사당은 별도의 담장으로 구성된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그 예를 찾기 힘들 정도로 매우 독특한 배치 형태이나 일부가 훼철되어

완전한 형태를 갖추지 못한 것이 매우 아쉬운 집이다.

집주위가 다 잔디밭이고 정비도 잘 돼 어느 고택보다도 운치가 있고 품위가 있다

옛 생활용구들이 그대로 비치되어 있고 장독대도 규모가대단히 크고 조그만한 정자가

두군데나 있었다

백석방이라는 정자.안채 옆모습과 농기두들.소나무와 거대한 정원석.

동리정사

한밤마을의 경의재(敬異塾)로,

1779년(정조 을해) 휘 귀응 호 남천공이 족친들과 힘을 모아 한채의 공당을 창건하고 이름을 이숙(異塾)이라

불렀으며,이숙이란 마을학교라는 뜻으로 당시는 향교가 지방 공립학교로서의 기능을 수행한데 반하여

서원이나 이숙은 사립학교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며,그 가운데서도 이숙은 순수한 마을단위 혹은

한정된 한 지역단위의 학교였는데,

 

이곳의 이숙은 씨족집성촌의 인재양성과 학문 숭상을 위하여 몇몇 재력가에 의하여 세워진 사립교육기관으로,

헌종 계묘(1843)년에 휘 병주 호 율계공이 이숙을 중건할 계획을 세워 다소의 물력을 모았으나,

그해 흉년이 들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37년 후인 고종 기묘(1879)년에 현재의 건물을 중건 하였고,

그 후 이숙은 여러가지 용도로 전용되어오다가 현재는 휘 여진공을 기리는 정자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한밤마을의 담장은 대부분 돌담으로 1930년 대홍수로 떠내려 온 돌들을 이용하여 축조하였다고 전해지며,

축조방법은 막돌허튼층쌓기로 하부가 넓고 상부가 다소 좁은 형태로 넓은 곳은 1m 이상인 경우도 있으며,

전체적으로 이 지역에서 채집된 강돌로 자연스럽게 축조된 돌담은 전통가옥들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고,

곡선형의 매우 예스러운 골목길의 정취를 자아내고 있으며 보존 또한 잘 되어 있습니다.

 

사랑채와 안채로 이어지는 뜰

 

경향당 사랑채방과 제사를 모시는 사당

부림홍씨종택의 안채 모습

 

한밤마을의 시작은 950년경 남양 홍씨에게서 양갈려 나온 부림홍씨의 시조

 [ 홍란 ]이란 선비가 입향하면서 시작되었다 한다

문이 잠겨 있어 내부모습은 예전에 갔을 때의 모습

한밤마을의 가장 멋스러운 볼거리는 투박하면서도 한국 농촌의 운치를 그대로 보여주는 자연스러운 돌담길로,

옛날에 밤나무가 많았다고 해서 한밤마을로 이름 붙여진 한밤마을은 매끈매끈한 강돌로 쌓아올린 1600m에

이르는 돌담이 장관이며,폭1m가 넘는 돌담이 마을과 집을 둘러싼 모습은 마치 작은 석성을 보는 듯 웅장

하기도 하다.

 

동천정

마을 사설 서원(서당)같다

한밤 마을에는 경의재, 동천정, 경회재, 경절당과 종택,

애연당, 정일재 등 서원이 많은데이렇게  방치된 모습이 안타깝다

2017년에 왔을 때만해도 마을이 굉장히 깨끗하고 정비가 잘되어

관리가 잘되는가 했는데 이번에 와서 보니 마을에 폐가가 삼분의 일은 되는 것 같다

그리고 멸실된 주택도 여럿 보이고 오래 보전할 방법은 없을까?

저기 보이는게 공군부대 관사이다

70년대 후반 이곳에 처음 왔을 때는 단독으로 돼 있었는데 현재는 아파트로 재건축 했다

한때는 우리 여동생 부부가 여기서 기거를 했었다 한겨울에 왔었는데 화장실에

연탄난로를 피웠던 기억이 난다 그만큼 추웠다는 이곳

대율리 석불입상(보물 제988호)

이 불상은 대좌(臺座)위에 서 있는 높이 2.65m의 완전한 석불입상인데 광배(光背)는 없다.

 넓은 육계(六繫), 둥글고 우아한 얼굴, 작고 아담한 눈과 입, 어깨까지 내려진 긴 귀 등

 세련된 면모를 과시하고 있다.

오른손은 외장(外掌)하여 여원인(與願印)을 짓고 있는 반면,

왼손은 내장(內掌)하여 가슴에 대고 있어 독특한 수인(手印)을 이루고 있다.

입석미륵불(立石彌勒佛)이 입은 옷은 어깨까지 드리워져 있고,

 양 어깨에 걸친 통견(通絹)의 불의(佛衣)는 가슴과 배를 지나 무릎까지 얕은 주름을 이루고 있는데,

 팔목의 옷주름이나 직립한 긴 하체와 함께 당당하지만 다소 경직된 인상도 보여준다.

이처럼 다소 딱딱한 면도 보여주고 있지만

세련되고 당당한 신라불상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는 귀중한 석불입상이라 할 수 있다.  

보호수

느티나무 수령 110~160년

마을앞에는 이렇게 소나무 숲과 부림홍씨들의 유허비.추모비들이 자리잡고 있다

왼쪽은 홍천뢰 장군 추모비 오른쪽은 홍경승선생 기적비

한밤 마을 초입에는 오래된 솔숲이 있는데 일명 성안 숲으로 불리는 송림이라고 한다

이 송림은 지난 2006년 문화체육관광부가 ‘전국 10대 마을 숲’ 중 하나로 지정한 곳이다

임진왜란 때 홍천뢰 장군의 훈련장으로 사용된 송림이며, 숲 속에 장군의 기념비와 진동단,

효자비각 등이 세워져 있다.

 

양산서원(陽山書院)

(경북 군위군 부계면 남산리 296)

 

 이 서원은 1786년 정조(正祖) 10년에 설립된 지방교육기관이며

성현(聖賢)을 존숭(尊崇)하던 곳이다.

 

이 고을은 부림홍씨(缶林洪氏)의 세거지(世居地)로

고려말이 충신 문하사인(門下舍人) 경재(敬齋) 홍노(洪魯)선생과

조선조 좌참찬 겸 양관 대제학(朝鮮朝 左參贊 兼 兩館 大提學)을 역임한 시호(諡號) 문광공(文匡公)

허백(虛白) 홍귀달(洪貴達)선생,

이좌좌랑(吏曹佐郞)을 역임한 대학자 우암 홍언충(大學者 寓庵 洪彦忠)선생의

충절과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세분 선생의 영위(靈位)를 봉안한 묘우(廟宇)를 비롯하여

유생 강학을 위한 흥교당(興敎堂)을 중심으로

 입나재(立懦齋), 구인재(求仁齋), 읍청루(挹淸樓), 반무당(半畝塘) 등의 부속 건축물로

그 규모가 방대하였으나, 1868년 고종(高宗) 5년 조정의 서원 철폐령으로

묘우를 비롯한 전 건물이 훼철(毁撤)되는 비운을 겪었다.

 

그 후 1897년 광무원년(光武元年)에 현 규모의 강당을 중건한 후 1989년에 중수를 하고

강당 후정에는 장판각(藏板閣)을 지어

경재 선생 실기(實記)목판과 조선조 후기 사학자이며 성리학의 대가인 목재(木齋) 홍여하(洪汝河)선생이

수찬한 휘찬려사(고려사)[彙纂麗史(高麗史)]

목판(경북유형문화재 251호)을 보존하고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비로전과 부처상

경주 석굴암의 석굴보다 1세기 앞질러..1927년 전설처럼  대율리에 살던 최두한이 돌산에 올랐다

밧줄을 타다 수직으로 뻗은 절벽 50m아래 나무틈에서 발견했다고..

1962년 세상에 알려져 천연절벽의 자연동굴속 삼존석굴은 493년(소지왕 15년)에 극달이 창건했다는

설과, 5세기 신라에 불교을 전한 고구려 승려 아도화상의 수도굴이라는 얘기가.. 학계에서는 7세기

후반으로.. 지상에서 약20m높이에 위치, 천연동굴안은 네모반듯하고 천장은 하나운데가 제일 높고

사방주위는 차차 낮아지는 하늘 형상 아미타삼존불 (본존불인 중앙 여래상의 높이가 2.8m, 왼 쪽 1.92m,

오른 1.8m, 천년세월 말없이 인간세상을..동화사와 갓바위, 파계사등으로 유명한 팔공산 북쪽 기슭

군위삼존석굴 (軍威三尊石窟) (제2석굴암)

(군위군 부계면 남산리 소재 / 국보제109호)

 

경상북도 군위군 팔공산 절벽의 자연동굴에 만들어진 통일신라 초기의 석굴사원으로,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경주 석굴암 석굴(국보 제24호)보다 연대가 앞선다.

이 석굴에는 700년경에 만들어진 삼존석불이 모셔져 있는데,

 본존불은 2.18m, 왼쪽 보살상은 1.8m, 오른쪽 보살상은 1.92m이다.

 

가운데 본존불은 사각형의 대좌(臺座) 위에 양 발을 무릎 위에 올리고 발바닥이 위로 향한 자세로

앉아 있는 모습이다.

민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큼직한 머리(육계)가 있으며,얼굴은 몸에 비하여 큰 편으로 삼국시대

불상에서 보이던 친근한 미소가 사라지고 위엄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옷은 얇게 걸치고 있어서 당당한 신체의 굴곡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으며,

옷자락은 넓은 무릎을 거쳐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 아래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손모양은 오른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손가락이 땅을 향한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인데,

우리나라 불상에서 나타나는 최초의 예로써 의의가 크다.

 

같은 양식을 보여주는 좌우의 보살상은 각각의 머리에 작은 불상과 정병이 새겨진 관(冠)을 쓰고 있다.

가슴 앞에는 목걸이를 걸치고 팔에는 팔찌를 끼고 있으며, 옷은 길게 U자형의 주름을 그리면서

내려오고 있다.

 

이들 보살상은 날씬한 몸매에 어울리는 신체 비례와 목·허리·다리 3부분을 비틀고 있는 모습에서

새롭게 수용된 중국 당나라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삼국시대 조각이 통일신라시대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높은 문화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자연 암벽을 뚫고 그 속에 불상을 배치한 본격적인 석굴사원이라는 점에서

불교 미술사에 중요한위치를 차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