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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대구

태백산 부석사

 

 

단양에서 비가 내려 영월에 못 넘어가고 집으로 향하는데 비도 조금 개는 듯하고

이정표에 부석사가 나온다 퍼득 스치는 생각 그래 부석사 들렸다 가자 

소백산과 태백산을 그렇게 많이 다녔어도 유일하게 못가본 곳이 부석사다

부석사 주차장에 도착하니 하늘은 어둡지만 비는 그치고 바람도 없고 관광객들이

꽤나 많이 보인다(10/3)

소수서원만 유네스코에 등재가 된줄 알았는데 여기 부석사도 등재가 되었네

큰길을 따라가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사이길로 가기에 따라가니 이렇게 연못에서 

안개분수가 뿜어대고 있다

일주문까지 이어지는 은행나무 가로수 지금 약간씩 단풍이 들기 시작하고 있다

흔히 부석사하면 소백산줄기에 자리잡고 있는줄 알고 있는데 부석사는 소백산에 자리잡고 있는게 아니라
태백산 끝자락인 봉황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일주문에도 [태백산 부석사]라 쓰인 현판이 뚜렷하다.

일주문을 지나서도 은행나무길이다

일주문을 지나 좌측에 사과 농장이 있는데 여기서 사과를 팔기도 하는데

가지고 내려갈 일 생각하니 사고 싶은 마음이 없다

어느 사찰과 다를 것이 없는 사천왕상 험상궂은 표정은 가히 수준급이다

사천왕상을 지나 계단을 오르는 곳에도 사천왕문 같은데 사천왕상은 없고 빈 공간이다

여기에는 봉황산 부석사라 쓰여있다 봉황산 중턱에 있는 사찰이다

저위층이 범종루다

천왕문에서 계단으로 이어지는 석축을 하나하나 지나다 보면 범종루를 거쳐 안양루에 이른다.
안양은 불가에서 극락을 뜻한다고 한다. 이 건물의 현판은 아래에서 보면 안양문인데,
위에 올라가면 안양루로 바뀌어 있다. 이 건물을 통해 극락세계로 들어가니
아래에서는 [문]이고, 극락세계에서 사바세계를 바라보니 위에서는 [루]가 된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장경각

부석사의 본전인 무량수전은 봉정사 극락전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 오래된 목조건물로 기록돼 있다.
하지만 장중함이나 2중 처마를 이용해 지붕 끝을 살짝 구부려 올린 팔작지붕의 아름다움은
오히려 극락전을 능가한다. 그 안에는 서방정토를 다스리는 아미타여래가 모셔져 있다.
무량수전이 극락정토임을 알리는 또 하나의 상징이다.

 무량수전은 배흘림기둥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배흘림기둥은 건물 기둥의 중간을 굵게 하고, 위아래로

가면서 점차 가늘게 한 기법이다. 기둥의 위아래 굵기가 같을 때 그 중앙부가 가늘게 보이는 착시현상을

피하기 위해 기둥의 중간부를 굵게 한 것이다. 기둥 높이의 3분의 1이 되는 지점이 가장 굵고, 기둥머리가

기둥뿌리보다 가늘다. 배흘림기둥은 고대 그리스 석조신전, 중국이나 한국·일본의 고대 건축에도 흔히

사용되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목조건축물에 배흘림기둥이 뚜렷이 보이며, 조선시대에 건축한

무위사극락전(無爲寺極殿), 화엄사대웅전(華嚴寺大雄殿), 강릉객사문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무량수전은 고려 중기의 건축이지만 우리 민족이 보존해 온 목조 건축 중에서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오래된 건물임이 틀림없다. 기둥 높이와 굵기, 사뿐히 고개를 치켜 든
지붕 추녀의 곡선과 그 기둥이 주는 조화, 간결하면서도 역학적이며 기능에 충실한 주심포의

아름다움, 이것은 꼭 갖출 건만을 갖춘 필요미이며 문창살 하나 문지방 하나에도 나타나 있는
비례의 상쾌함이 이를 데가 없다.


멀찍이서 바라봐도 가까이서 쓰다듬어 봐도 무량수전은 의젓하고도 너그러운 자태이며
근시안적인 신경질이나 거드름이 없다. 무량수전이 지니고 있는 이러한 지체야 말로
석굴암 건축이나 불국사 돌계단의 구조와 함께 우리 건축이 지니는 참 멋,
즉 조상들의 안목과 그 미덕이 어떠하다는 실증을 보여주는 본보기라 할 수 밖에 없다.

최순우님글에서

공포

공포는 건물 지붕의 무게를 분산 혹은 집중시켜 구조적으로 안전한 완충적 기능을 하기도 하고,

내부공간을 확장시키고 건물을 높여 웅장한 멋을 낼 뿐 아니라, 그 구성과 공작이 섬세하고 화려하여

장식적으로 중요한 기능을 가진다.

부석(浮石) 우리말로 [뜬돌]이다. 돌이 떠 있다하는 말처럼 무량수전의 왼쪽 뒤로 부석이 있다.
돌이 실제로 떠 있을 수는 없고 아래 돌과 틈이 벌어져 있다. 이 부석에 대해 말하려면 우선 선묘라는

여인의 이야기를 해야한다.
선묘는 중국 여인으로 의상대가사 중국에 있을 때 의상 대사를 몹시 사모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의상이 신라로 갈때 입을 옷을 정성껏 만들어놓고 기다렸는데
선묘가 집을 비운 사이에 의상이 배를 타러 갔다는 말을 듣고 급히 포구로 달려갔으나 배는 저만치

떠나고 선묘는 만들어 놓은 옷을 의상에게 던지니 곧 의상대사에게 전해졌고 바다에 몸을 던져

죽고 말았다.


그러나 선묘는 해룡이되어 의상이 타고가는 배를 안전하게 건너게 하였고,
그 뒤 의상대가사 부석사 자리에 절을 지을 때, 이 자리를 도적들이 차지하고 있어 애를 태웠는데
죽은 선묘 아가씨가 돌을 3번 띄우는 영험을 보여 도둑들이 도망갔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아직도 무량수전 오른쪽 뒤편에 선묘각이 있고, 선묘각 안에 선묘의 초상화가 있으며,
조사당 내에도 선묘의 초상화가 있다.

 

조사당

국보 제19호인 영주 부석사 조사당(祖師堂)으로부석사를 창건(創建)한 의상대사를 모신 곳이며
소박하고 간결한 느낌을 주고 있다.지붕은 맞배 형식으로 간단해 보이지만 넉넉하게 뻗어 나와
결코 작은 건물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1916년의 해체 공사 때 발견된 장여 위의 묵서(墨書)에 의하면
고려 우왕3년(1377)에 원응국사(圓應國師)가 재건한 것이라고 한다.


조선 성종21년(1490)에중수하였고선조 6년(1573)에는 서까래를 수리했다고 한다.
건물 안쪽의 좌우에는 사천왕상 보살상 등고려 후기에 그려진 벽화(국보 제46호)가 있었다.
이들은 고려시대 회화 가운데 매우 희귀한 것으로고분벽화를 제외하면 가장 오래된 채색 그림 중 하나여서
지금은 보장각이라는 보호각을 지어 보관하고 있으며원래 벽화가 있던 자리에는 본떠 그린 그림을 놓아
당시 벽화의 모습을 전해주고 있다.조사당 앞 동쪽 처마 아래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는
의상대사가 꽂은 지팡이였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

안양루와 무량수전

지장전

사찰을 한바퀴 돌아보고 가면서 소수서원에 들렸다 가야겠다

소수서원은 몇년전에 다녀갔지만 옆지기가 보고 싶어 하니

다시 들렸다 가기로 한다

10월 3일인데 여기는 벌써 단풍이 물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