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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청평사

고등학교 시절 한방에서 자취를 하던 친구들이 서울에 살고 있는데 몇 년 전에 여행을 하고

코로나로 2년 동안 여행을 하지 못했다

이번에 의견 통일이 되어 같이 강원도 여행을 하기 위해 서울에 왔다

친구네 빌라에 피어 있는 하얀 라일락

현재 비어 있어 사무실처럼 사용하고 있는데 서울에 올 때마다 내 숙소로 사용하고 있다

아침에 6시반 출발 여기 청평사 입구에 왔다

예전에 소양강 댐에서 배를 타고 한번 와봤는데 요즘은 유람선이 운행을 하기는 하는데

지금은 배후령 터널이 뚫려서 화천군 간동면에서 시설지구까지 도로가 있어 접근성이

좋아져 육로로 쉽게 청평사에 갈 수가 있다

2013년에 왔을 때의 안내문 지금은 잘 보이 지를 않아서 다시 소환을 했다

예전에는 매표소가 없었는데 생긴 것 같다

청평사 원림은 선동(仙洞)으로 진입하는 대문과도 같은 거북바위를 지나면서 시작된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아름다운 폭포다.

선계로 향하는 오르막에는 상폭과 하폭 두 개의 폭포로 이루어진 구송 폭포가 하얀 물줄기를 푸른 담으로

떨어뜨리고 있다. 구송폭포 구역에는 구송대, 구송 정터, 성 향원터, 석굴, 삼층석탑이 남아 있다.

구송 폭포 상폭

구송 폭포 하폭

세향 다원

 

명문 바위

이 바위의 윗면에 한문으로 지은 시가 새겨져 있는데 그 뜻은 아래와 같으며

또한 이 시는 스님이 깨우침을 얻고 나서 지은 시라는 뜻의 오도송(悟道頌)이라고 알려져 있답니다

심생종 종생(心生種種生) : 마음이 일어나면 모든 것들이 생겨나고

심 멸종종멸(心滅種種滅) : 마음이 사라지면 모든 것들이 사라지네

여시구멸이(如是俱滅已) : 이와 같이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나면

처처 안락 국(處處安樂國)  : 곳곳이 모두가 극락세계로구나​

 영지

영지는 연지와 달리 연꽃을 심지 않는다.

못의 수면을 고요하게 해 수면이 가지는 투영 효과에 의해 그림자를 드리우게 하는 여러 사찰에 조성된

지당의 한 종류다.

매월당 김시습(金時習)은 청평사 영지를 보고 “네모난 못에 천 층의 봉우리가 거꾸로 들어 있다

(方塘倒揷千層峀)”고 표현했다.

이 영지는 북단에 자연석을 지하에 중첩되게 깔고 석축을 쌓았는데, 계곡물이 이 석축 아래로 스며들어

영지 수면 아래에서 물이 솟아오르게 하는 특이한 입수 구조를 지니고 있다. 이곳에는 세 향원터, 부도,

청평루 등도 함께 위치하고 있다.

회전문과 뒤에 오봉산

영지를 지나 조금 더 오르면 선동교가 계곡을 가로질러 놓여 있고, 이곳을 건너면 오봉산 줄기의 견성암

봉우리 아래에 다소곳이 자리 잡은 청평사의 절집들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청평사의 가람은 여러 개의 단을 조성하여 그 위에 절집이나 마당을 두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경사지를 이용해 입지 할 수밖에 없는 산지 사찰의 형태를 잘 보여준다.

 

청평사는 일주문이 없고 중문인 회전문(보물 제164호)을 통해 대웅전으로 진입한다.

경내는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회전문만 남은 채 빈 절터로 되어 있었다.

이후 1977년 극락전의 복원을 시작으로 현재는 경내 대부분의 절집들이 복원되었다.

엘라티오르 베고니아

엘라티오르 베고니아' (Elatior begonia), 꽃말은 '진정한 아름다움'. 베고니아는 크게 꽃, 잎,

목본의 3가지로 나눈다. 이 중 엘라티오르는 꽃베고니아에 속하며 꽃이 장미처럼 아름답다.

 

베고니아는 볼리비아와 페루의 안데스 산맥 해발 3,000∼3,800m의 고산지대에 자생한다.

이들 자생종이 서로 복잡하게 교배되어 원예종이 개발되었고 현재 2,500여 품종이 알려져 있다.

이 비석은 고려 인종 8년(1130)에 건립되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 풍화와 전란으로 파손되어 없어진 것을

일부 비 편과 탁본, 문헌, 사진 등 단편적인 자료를 토대로 다시 만들어 세운 것이었다. 

그 요약된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고려 중기 귀족 가문이자 세도가의 일원이었던 이자현(李資玄, 1061~1125)이 벼슬을 버리고 이곳으로 들어왔다.

 그는 절 이름을 "백암 선원"에서 "문수원(청평사 옛 이름)"으로 바꾼 뒤, 37년 동안 수행하다 일생을 마쳤다.

 비석의 앞면은 청평사 창건과 중창, 진락공 행적 등에 관한 내용으로 고려 중기 문장가 김부철(金富撤)이 지었다.

 뒷면은 그를 추모하는 제문으로 대각국사 의천의 제자 혜소가 지었다.

 글씨를 쓴 대감 주사 탄연(坦然, 1070~1159)은 왕휘지 서체에 능통했다. 

이 비로 탄연의 글씨를 직접 감상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곱게 핀 진달래와 오봉산 정상

강선루

 

오봉산 청평사

오봉산 청평사는 973년(광종 24) 승현이 창건하고 백암 선원이라 하였으나 폐사되었고

그 뒤 1068년(문종 2)​ 이의가 중건하여 보현원이라 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의의 아들인 자현이 이곳으로 내려와 은거하자

오봉산에는 많던 도적들이 없어졌으며 또한 호랑이와 이리도 없어졌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산을 청평이라고 하고 사찰 이름을 문수원이라 하였답니다

대웅보전

꽃다지

800년 된 주목으로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상가들도 8년 전의 모습과는 완전 다른 모습으로 변신을 했다

산채비빔밥과 수수전병

날이 가물어 수위가 낮아져 배가 올라올 수가 없다

청평리 마을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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