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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 죽림재

월초에 블친님께서 이곳 죽림재 배롱나무꽃을 아주 잘 담아 올리셨기에 조금 늦기는 했지만 

들려봤다 역시나 생각대로 거의 지고 볼품은 없지만 서원을 한 바퀴 돌아본다

부근에는 식영정과 명옥헌 소쇄원 가사문학관 등 볼거리가 많은데 죽림재는 처음 와 보는 곳이다

이 죽림재는 창녕 조 씨 문중의 글방으로 사용하기 위해 지은 수련장(修鍊場)으로 죽림(竹林) 조수문(曺秀文)이

창건했다고 한다. 초창 건물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귀중한 책들과 함께 불에 타버렸고 인조 원년(1623)에

6대손인 삼청당 조부(三淸堂 曺溥)에 의해서 다시 세워졌으며, 현재의 건물은 1948년에 중수한 것이다.

이 건물은 정면 2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옆에서 볼 때 '八' 자 모양)이다. 조 씨 문중의 서원으로 사용되었다

죽림사는 죽림 선생과 선생의 아들인 운곡 조호(雲谷 曺浩), 삼청당 조부와 소은 정민하(簫隱 鄭敏河)의

행적을 추모하기 위해 1708년에 문인과 후손들에 의해 건립되었다.

고종 5년(1868)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명령으로 철폐되었다가 2002년 복원되었다.

죽림 조수문(曺秀文)은 어려서부터 놀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되 학문이 빼어났고 비범한 기상을 나타냈다고

 한다. 8살에 부모가 무엇인가를 알아 효로서 보은 할 것을 알아 효심이 깊었으며 부모를 공양하기 위해

 벼슬살이에 나가지 않았다. 
20살에 학업이 크게 성장했으나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향리에서 성리학을 탐구하였다.

자신을 낮추고 근엄한 생활을 해왔으며 친지들의 권고에 의해 세조 14년(1468년) 생원시 3등으로 합격해

 성균관 생원을 지냈으며 여러 번 벼슬에 천거를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고 향리로 돌아와 죽림(竹林) 속에

 정사를 짓고 강론하면서 일생을 마쳤다. 향리 사람들의 모범이 되는 등 미풍양속의 진작에 공적이 많아 

사방의 학자들이 운집했으며 호남 유학의 근본이 되었다. 

그의 학문은 강호, 김숙자의 학맥을 승계했으며 점필재 김종직과 교유했던 바, 훗날 점필재는 조수문을 

‘호남의 진짜 유학자’ 라 칭송했으며, 박 신극(1703-1770)의 행장에는 “호남의 유생이 죽림으로부터 

시작되었다”라고 전해진다. 
저서로는 ‘성학 지남(聖學指南)’ ‘작불론(作佛論)’이 있으며 문하로는 판서 윤달화, 현감 강백령, 

교리 조호 등이 대표적이다. 

주위에 배롱나무들이 많아 만개를 하면 어느 곳보다도 꽃이 화려할 것 같은데 늦게 찾아와

이 정도의 모습만 볼 수 있어 아쉬움이 남는다.

다음에는 절정기에 와볼 수 있도록 날자를 잘 기억해 두어야겠다

하얀 옥잠화는 밤에 개화하는 꽃이라 낮에는 활짝 핀 모습은 볼 수가 없다

죽림재

공부하며 기거하는 방이다

이곳은 죽림 조수문과 아들 운곡 조호 삼청당 조부 소은 정민하를 모신 사당이다

창녕조씨

28세 조대운(1328~1398, 호는 산광)은 포은 정몽주와 함께 학문하고 왕도정치·경자유전 등 개혁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에서 물러났으며, 역성혁명 이후엔 두문동에 은거했다.

그는 두문동 충신들과 함께 순절한 72현 중 한사람으로 두문동서원과 장성 경현사, 담양 죽림사

(전라남도기념물 제99호)에 배향됐다.

창녕조씨

30세 조호(1450~1517, 호는 운곡)는 점필재 김종직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고 문과급제해 승문원정자,

사간원사서, 호조정랑, 사헌부집의, 홍문관교리를 거쳐 홍주·공주목사를 역임하고 연산군 때 낙향해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32세 조여충(1491~1573, 호는 계월당)은 중종 때 진사시에 합격해 동몽교관에 제수됐으나

윤원형의 득세에 낙향해 창평에 관수정을 짓고 송순·임억령 등 선비들과 교유했다.

충효 정려각에는 비가 없다 어찌 된 것인지?

가장 꽃이 화려한 정려각 옆의 배롱나무 

정려각 쪽에서 바라본 연못 위의 배롱나무

연못에는 부들과 잡풀로 덮여있는데 딱 한송이 어리연이 보인다

담양에는 식영정 서하당 부용당 송강정 독수정 풍암정 명옥헌 취가정 환벽당 등 29개의 정자가 있다고 한다

 원이란 일종의 정원이라고 해야겠는데 원림과 정원의 뜻은 사뭇 다르다. 정원(庭園)이라는

말은 명치시대에 만들어낸 것으로 우리에게 식민지 시대에 이식된 단어이다. 

정원이 일반적으로 도심 속의 주택에서 인위적인 조경작업을 통하여 동산〔園〕의 분위기를

연출한 것이라면, 원림은 교외 옛날에는 성 밖〔城外〕에서 동산〔園〕과 숲〔林〕의

자연 상태를 그대로 조경으로 삼으면서 적절한 위치에 집칸과 정자를 배치한 것이다. 

봄에는 매화 여름에는 배롱나무 꽃으로 단장을 해 찾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는데 어느 곳이나 때를

잘 맞추어 찾아가는 것이 최고의 관광이 아닐까


가을사랑 - 신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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