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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대전

간월도와 해미읍성

천수만을 바라보는 간월도 끝자락 바위섬에 조성된 간월암은 고려말 무학대사가 수행 중에 바다에

비친 환한 달빛을 보고 득도 한곳이라고 하여 간월도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간월암은 간조시에는

바닷물이 빠지면서 길이 생겨 간월도와 연결되고 만조시에는 바닷물이 길을 보이지 않게 되는

신비한 현상을 보여준다(10/3)

간월도

서산A지구 방조제 중앙에 위치하여 남쪽으로는 약 30km 길게 펼쳐진 천수만이 있고, 북동쪽으로는

간월호가 있어 바다와 육지와 호수가 잘 어우러진 간월도. 간월도 해변 광장에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건립된 음식물 기념탑인 '어리굴젓 기념탑'이 있다. 무학대사가 창건하고, 그 이후 송만공 대사가

간월 임이라는 암자를 중건하였는데, 간월도는 그 암자의 이름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간월암은 작은 돌섬에 있어 하루에 2번 간조 때면 걸어서 갈 수 있다.

충남 서산시 부석면에 위치한 간월도.

                           간월도가 예전에는 피안도(彼岸島), 간월암은 피안사(彼岸寺)라고 불린 적이 있다.

원효대사가 세웠다고 하는데 그 출처가 분명하지는 않다. 밀물이 들어오면 물 위에 떠 있는 연꽃과 같다

하여 연화대(蓮花臺)라고도 불렀다. 고려 말에 무학 대사가 이곳에서 수행 중에 달을 보고 홀연히 도를

깨우쳤다 하여 암자 이름을 간월암(看月庵) 이라 하고 섬 이름도 간월도라고 하게 되었다,

무학 대사의 득도처였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것은 대사가 태어난 곳이 간월암에서 멀지 않은 충남 서산시

인지면 모월리 이기 때문이다.

간월암은 밀물과 썰물의 교차에 의해서 6시간마다 길이 생겼다가 없어지는 신기한 모습을 보기위해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는데 만조시에는 섬에 갇혀 나올수가 없기에 간월암을 들어갈 때는 간월암을

들어가는 입구에 세워진 밀물 안내판에 길이 막히는 시간을 잘보고 들어가야 한다.

무학대사

1392년 왕사로서 조선 개국에 참여 했고, 한양 천도를 주도한 인물이었다.

그 공으로 인해 간월도와 인근의 황도를 하사 받아 절을 지었으니 그가 지은 절을 무학사(

無學寺)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 후 조선의 억불정책으로 폐사되었던 것을 1941년

만 공 선사가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무학 대사는 간월암을 떠나면서 짚고 다니던 주장자를 뜰에 꽂으며, 지팡이에 잎이 피어나

나무가 되어 자랄 것인데 그 나무가 말라죽으면 나라가 쇠망할 것이요, 죽었던 나무에서

다시 잎이 피면 국운이 돌아올 것이라 예언했다고 한다.

 

만공스님은 죽었던 나무가 다시 살아났다는 소문을 듣고 간월암을 찾으니 암자는 간 곳이

없고, 그 자리에 묘가 들어서 있었는데, 실제 귀목나무에서 새파란 잎이 돋아나 있는 것을

보고 이곳에 머물며 중창을 위한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기도 회향 전에 김 씨 가문에서

묘를 이장해 가는 가피가 답지하였고, 절터를 되찾은 다음 제법 모습을 갖춘 암자를 짓고

손수 간월암이라는 현판을 써서 내건 후 종종 찾아와서 한소식을 했었던 추억의 장소가

간월암인 것이다.

서산 간월암 목조보살좌상

간월암 목조보살좌상은 제작 시기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양식적인 특징상 1600년 전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이후에 형식화된 보살상과는 다르게 갸름한 타원형의 얼굴, 비교적 긴 상체, 높고 안정감

있는 무릎, 부드러운 옷 주름의 표현 등이 특징인 조선시대의 보살상이다.

고승이 참선을 하고 득도를 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간월도 간월암은 일주문 역할을 하는

외삼문을 들어서면 종무소 팽나무 사철나무 관음전 산신각 종각 소원초켜는곳 선묘 낭자의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용왕각 공양실 기념품점 해우소 등이 자리잡고 있어서 작은 섬에도 많은 전각이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간월도 간월암에는 만공선사가 지은 시가 전해온다

불 조불 우객(佛祖不友客) 부처와 조사를 더불어 벗하지 않는 객이

하사 벽파 친(何事壁波親) 무슨 일로 푸른 물결과는 친했는고

아본 반도인(我本半島人) 내 본래 반도 사람이라

자연 여시지(自然如是止) 자연에 이와 같이 멈추노라

간월암 본전 맞은편에는 지붕 아래 유리창으로 바다를 향해 통장이 터진 건물이 자리 잡고 있는

특별한 불당이 모셔져 있는데 이곳에는 용이 되어 의상대사와 부석사를 지켰다는 수호신인

영주 부석사와 서산 부석사에 모셔진 선묘 낭자와 흡사한 형태의 불상이 모셔져 있어 흥미롭다.

만공스님이 중창 불사를 한 후 간월암은 벽초, 서해, 진암 스님의 발길이 닿았었고 경봉,

춘성, 효봉, 금오, 성철스님등 기라성 같은 도인들이 간월암에 수행의 족적(足跡)을 남겼다

 

무엇보다 간월암이 유명해진 것은 1942년 8월부터 1945년 8월까지 만공스님이 조선의 독립을

위해천일기도를 했고 천일기도 회향 사흘 후 조국이 독립을 맞이했다는 사실이다.

지척에 살던 만해 한용운 스님이 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세속에서 독립운동에 앞장섰다면

만공스님은 마곡사와 수덕사를 중심으로 선원에서 정진하며 웬만해서는 산문을 나서지 않았다.

또한 선학원을 만들어 일제의 한국불교말살 정책과 총독부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신 수행가풍을

지키기 위해 헌신 하였으니, 한국불교에 있어서 만공스님의 위치는 확고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조국의 독립 소식을 전해들은 만공스님은 무궁화 꽃에 먹물을 듬뿍 찍어 ‘세계일화(世界一花)

’라고 쓰시고 대중 앞에서 말씀하시길

 

너와 내가 둘이 아니요, 이 나라 저 나라가 둘이 아니요, 이 세상 모든 것이 한 송이 꽃이다.

머지않아 이 조선(朝鮮)이 세계일화(世界一花)의 중심이 될 것이다. 지렁이 한 마리도

부처로 보고, 저 미웠던 왜놈들까지도 부처로 보아야 이 세상 모두가 편안할 것이다."라고

하셨으니 그 법기(法器)의 크기를 가늠이나 할 수 있으랴. 간월암 홈페이지

서산시 보호수로 지정받은 팽나무 앞에는 촘촘한 가지 뻗음과 사철 잎을 달고 있어서 가리개의 기능을

잘해주어 울타리로 많이 활용되고 바위섬인 독도에도 잘자라는 사철나무가 2016년3월 서산시 제98호

보호수로 250년 수령에 3.5m 높이로 자라고 있어서 이채롭다

1980년대 진행된 천수만 간척사업으로 인해 육지와 연결된 간월도. 방조제가 생기기 전에는 배를 타지

않으면 닿을 수 없는 작은 섬이었다.

 

간월도는 이제 뭍이 되었지만 간월암은 지금도 하루에 두 번 만조 때 섬이 되고 간조 때는 뭍이 되는

신비로움을 간직하고 있다.

 

특히 간월암에서 바라보는 낙조는 바다 위 통통배와 갈매기가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이 된다.

보는 이로 하여금 수채화의 주인공이 되는 동시에 숙연함과 설레임을 함께 느끼게 하니

이런 곳이 또 있겠는가.

간월암에서 해미읍성으로 왔다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읍성이다. 읍성이란 읍을 둘러싸고 세운 평지성으로 해미읍성 외에 고창읍성,

낙안읍성 등이 유명하다. 해미읍성은 조선 성종 22년, 1491년에 완성한 석성이다.

둘레는 약 1.8km, 높이 5m, 총면적 196,381m²(6만여 평)의 거대한 성으로 동, 남, 서의 세 문루가 있다.

최근 복원 및 정화사업을 벌여 옛 모습을 되찾아 사적공원으로 조성되었으며, 조선말 천주교도들의

순교 성지로도 유명하다. 천주교 박해 당시 관아가 있던 해미읍성으로 충청도 각 지역에서 수많은

신자가 잡혀와 고문받고 죽음을 당했으며, 특히 1866년 박해때에는 1천여 명이 이곳에서 처형됐다고 한다.

성내 광장에는 대원군 집정 당시 체포된 천주교도들이 갇혀 있던 감옥터와 나뭇가지에 매달려 모진

고문을 당했던 노거수 회화나무가 서 있다. 바로 성문밖 도로변에는 회화나무에 매달려 고문을

받으면서도 굴하지 않은 신도들을 돌 위에 태질해 살해했던 자리개돌이 있어 천주교도들의 순례지가

되고 있다. 성벽 주위에는 탱자나무를 심어 적병을 막는데 이용하였다고 하나,

지금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대한민국구석구석

해미읍성(海美邑城)

 

왜구의 침략을 막아내기 위해 1416년(태종 16)에 덕산(德山)에 있던 충청도 병마 절도 사영

(忠淸道兵馬節度使營)을 지금의 해미읍성 지리로 옮겨오면서 성을 쌓기 시작하여 1421년(세종 3)에

완공된 영성(營城)으로 충청의 군사적 거점이었다.

 

1651년(효종 2)에 충청도 병마 절도 사영이 청주로 옮겨가고 해미현 관아가 옮겨와 해미읍성이 되었다.

읍성에는 문무를 겸한 겸영장(兼營將)이 배치되어 충청도 5 군영의 하나인 호서 조아요(湖西左營)으로

내포지방 12개 군현의 군권까지 장악하는 호서지방의 행정중심 역할을 하였다.

영장(營將)은 도적이나 반란세력을 토벌하는 토포사(討捕使)의 임무까지 맡고 있었으므로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시기에 내포지역의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으로 끌려와 죽임을 당하는 순교의 역사적

현장이 된 곳이기도 하다.

 

성곽의 둘레는 1.8km, 성벽의 높이는 5m의  평지성이다.

정문은 鎭南門(진남문)이고 동문과 서문이 있으며 북쪽엔 암문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읍성 철거령에 따라 성안의 관아 시설물이 모두 철거되고 성안에 민가가 들어오면서

읍성의 옛 모습은 모두 사라져 버렸었다.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16호로 지정하고 1970년부터 성 안팎의 민가 철거 및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1974년 동문과 서문을 복원하고 그 후 동헌, 객사, 내아 등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지난날 사용되던 용어인 ‘방(榜)’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첫 번째는 벼슬아치를 뽑던 시험인

과거(科擧)에 합격한 사람들의 성과 이름을 적은 책이라는 방목(榜目)이고, 두 번째는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는 글로서 길거리에 붙인 방문(榜文)이다. 두 번째 의미일 때는 ‘방이 나다’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방이 붙다’, ‘방을 붙이다’라고 말한다. 요즘 말로 하면 ‘광고하다’, ‘선언문을 발표하다

게시판에 내걸다’ 따위다. 매체가 그만큼 많아졌다는 소리다.

해미읍성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방문으로 유명세로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그러나 기존에도 해미읍성 역사 체험축제에 매년 20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다녀가고, 주말 전통문화공연

                      등으로 연간 100만여 명의 많은 관광객이 다녀가는 곳이다. 잘 가꾸어진 잔디를 마음껏 밟을 수 있고

                      연날리기, 떡 만들기 등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점차 관광객이 늘고 있다. 또한 해미순교성지가

                      인근에 있어 많은 수의 천주교 순교성지 순례객들이 연계하여 방문하고 있다. 다양한 맛집이 있고 숙박이

                      가능한 펜션, 농촌관광지 등 주변 관광 인프라가 잘 형성되어 있다.


회화나무는 찍지 않고 지나 처서 2016년도에 담은 사진으로 대체

회화나무

충청남도 기념물 제172호로 지정된 수령 약 300년으로 추정되는 나무다.

나무 뒤에 보이는 건물은 옥사인데 특별히 천주교 신자들을 많이 가두었던 감옥이다.

1790~1880년 사이 이곳 옥사에 수감된 천주교 신자들을 이 나무의 동쪽으로 뻗어 있던 가지에

철사줄로 머리채를 매달아 고문하였다고 한다.  이곳에서 처형된 신자들의 수가 무려 1,000여 명이

넘는다고 한다.  1866년(고종 3) 병인박해 때는 얼마나 더 심했을까?

동쪽 가지는 1940년대에, 가운데 줄기는 1969년 6월 26일에 폭풍으로 부러져버렸다고 한다.

죄수들을 다루던 공간

2016년 갔을 때 사진

동헌으로 가는 길

시계방향으로 대장군포. 별대 완구. 하포. 불랑기

시계방향으로 검차. 신기전 기화 차. 천자총통. 투석기

운제

조선시대 병장기들

회화나무

동헌 앞 느티나무와 동헌 정문

해미읍성객사

호서좌영

동헌

동헌은 병마절도사를 비롯한 현감 겸 연장의 집무실로써 관할지역의 일반 행정업무와

재판 등이 행해지느던 건물이다 해미 현감 겸 연장은 인근 12개군 현의 병무행정과 토포사를 겸한 지위다

동헌의 부속건물들

멀리서 바라본 청허정

청허정

 

읍성 내의 일부는 공원으로 개방되어 있다

민속가옥

조선시대 민가로 말단 관리인 서리의 집이다

전통혼례 포토존

조선시대 민가로 상인들의 집이었다

아주머니 두 분이서 다듬이질을 재연하고 계시는데 사진 찍으라고 신바람 나게

                                       율동에 맞추어 어렸을 때 우리 부모님들의 모습이 보이는듯하다

조선시대 민가로 부농의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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