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산서원이 있는 칠조 마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철거됐던 치산서원을 다시 복원하며 세운 복원비
박제상은 누구인가.
그는 신라의 전신인 사로국의 개국시조 혁거세의 후손이자 5대 임금인 파사이사금의 5 세손이다.
할아버지는 아도 갈문왕이었고 아버지는 물품 파진찬(4번째 관등)이었다. 박제상도 벼슬길에 나아가
삽량주(경남 양산) 태수를 지냈다. 박제상은 한민족의 기원, 분화, 이동경로, 한국 고대문화와 철학,
사상의 원형을 담은 '부도지(符都誌)'의 저자로도 알려져 있다. 현재 이 책의 원문은 전하지 않는다.
서원의 기원은 신라시대 충신 박제상(朴堤上)의 처를 제사지내기 위해 신라시대 경주 묵장산(墨匠山)의
치술령(鵄述嶺)이라는 고개에 세워졌던 ‘신모사(神母祠)’에서 출발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1745년(영조 21)에 영해 박 씨 주도로 신모사가 있던 두동면에 다시 건립하여 박제상과
그의 부인 및 두 딸을 제향하고 있다.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91년에
복원되었다. 치산서원지(鵄山書院址)를 포함하는 박제상 유적(朴堤上遺蹟)이 1997년 10월 9일에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매년 3월 초 정일(丁日)에 향사를 봉행하고 있다.
치산서원 삼강문
박제상은 신라시대 충신이다. 신라 눌지왕이 왜에 인질로 잡혀간 동생 미사흔(未斯欣)을 구출하기 위해
박제상을 왜에 파견하였다.
박제상은 미사흔을 무사히 탈출시키는 데 성공하였으나, 본인은 왜왕에게 잡혀 고문을 당하다 끝내 참형을
당하였다.
이에 박제상의 처와 두 딸은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경주의 묵장산 치술령이라는 고개에 올라 통곡하다
자진하니, 후인들이 그 절의를 사모하여 박제상의 처를 ‘치술령 신모(神母)’라 칭하고 신모사(神母祠)를 세워
제사 지냈다고 한다. 후에 눌지왕은 박제상에게 대아찬(大阿飡)을 증직(贈職)하고, 그의 처는 국대 부인
(國大夫人)에 봉하였으며, 미사흔을 박제상의 둘째 딸에게 장가들게 하였다.
박제상은 치산서원 외에 경상북도 영덕의 운계서원에도 봉안되었다.
서원은 외삼문인 삼강문(三綱門), 박제상의 호를 따서 지은 강당인 관설당(觀雪堂), 동서 재인 영휘재(永徽齋)
와 경의재(景義齋), 그리고 박제상의 처 국대 부인 금교김씨(金校金氏)의 사당인 신모사(神母祠), 박제상의
두 딸아기(阿奇)와 아경(阿慶)의 영정을 모신 쌍정려(雙旌閭), 박제상의 사당인 충렬 묘(忠烈廟)로
구성되어 있다. 신모사로 들어가는 문에는 ‘망 해문(望海門)’, 쌍정려로 들어가는 문에는 ‘사효문(思孝門)’,
충렬 묘로 들어가는 삼문에는 ‘성인문(成仁門)’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민족문화 대백과사전에서
관설당
유생들이 강론을 하던 곳
관설당
장사 벌지지' 탁본
동재 경의재
유생들이 공부하며 기숙하는 곳
서재 영휘재
박재상과 그 부인 그리고 두 딸을 모신 충렬 묘. 신모사. 쌍정려
충렬 묘 내삼문인 성인문
충렬묘
박제상(朴堤上)은 방아타령으로 유명한 백결선생(百結先生) 박문량(朴文良)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박제상(朴堤上)은 시조왕 박혁거세(朴赫居世)의 증손인 파사왕의 현손(5 세손) 물품의 맏아들이다.
본관은 영해(寧 海)이며 호는 관설당이다. 박제상(朴堤上)은 내물왕 때 삽량주의 태수로 있었다.
미추왕(味鄒王 261-284)의 동생인 대서지(大西知)의 아들이 내물왕(奈勿王 356-402)이며, 내물왕의 동생이
실성왕(實聖王 402-417)으로, 내물왕의 아들들이 어리므로 강압적으로 왕이 되었는데, 내물왕(奈勿王)의
장자 눌지(訥祗)는 미친 사람처럼 거리를 돌아다녀 실성왕이 도외로 치고, 둘째 복호(卜好)는 고구려에
인질로 보내고, 셋째 미사흔(未斯欣)은 왜(倭)로 인질로 보내었다.
이에 박제상(朴堤上)이 주축이 되어 신자천(申自天), 배 중량(裵仲良) 등과 실성왕의 부당한 처사를 거론하니
실성왕(實聖王)이 눌지왕(訥祗王 417-458)에게 양위하였다. 눌지왕(訥祗王)이 즉위하여 일본에 억류된 아우를
그리워하며 신하를 보내어 귀환을 여러 차례 요구했으나 번번이 거절당했다. 이에 박제상(朴堤上)이 고구려로
가서 "한 뿌리의 후예로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라는 한마디로 복호를 데려왔다.
그리고 박제상은 다시 미사흔(未斯欣)을 구하기 위해서 왜국으로 떠나 그해 7월에 그곳에 도착, "신라왕이
나의 부모를 죽이고, 나를 해치려 하므로 도망쳐 왔소" 하고 망명한 것으로 가장했다.
왜왕은 그 말을 곧이듣고 장차 신라를 칠 때 미사흔과 그를 앞잡이로 삼으려는 속셈을 품게 되었다.
후투티님 글에서
고구려 장수왕으로 부터 보해 왕자(복호, 卜好)를 구해낸 양산 태수 박제상은 미 해왕 자(미사흔, 未斯欣)를
구하러 울산 율포(栗浦)에서 출발해 왜국으로 향한다.
박제상은 일본 왜왕에게 눌지왕이 아버지와 형을 죽이고 자신마저 죽이려 해 바다 건너왔다고 속이려 하나
왜국의 의심은 풀리지 않았다.
이때 신라에 숨어든 일본 첩자들에게 신라왕이 미사흔과 박제상의 식솔들을 모두 가두었다는 정보가 들어온다.
박제상의 숨은 계략이었다.
왜국의 감시망이 느슨해진 틈을 타 미 해왕 자를 은밀히 신라로 향하는 배에 태우고 자신은 왜국에 잡혔다.
왜왕은 "왜 나라의 신하라고 말한다면, 높은 벼슬을 상으로 내리리라"라고 하니 박제상은 "차라리 계림(신라)
땅 개 돼지가 될지언정 왜 나라의 신하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 답한다.
화가 난 왜왕은 발바닥을 거죽을 벗겨낸 뒤 갈대를 잘라 놓고 그 위를 걷게 했다.
그리고 왕은 "너는 어느 나라의 신하이냐?" 재차 묻자 박제상은 “계림의 신하이다.” 답변한다.
체념한 왕은 그를 장작불로 태워 문드러지게 한 뒤 목을 베었다고 한다.
전사청
제사음식을 준비하고 제기를 보관하는 전사청
한없이 바다를 바라보며 남편을 기다린 마음을 새겨 사당 들어가는 문은 ‘망 해문(望海門)’이다.
박재상 부인을 모신 신모사
치술 신모(審述神母)
일본에 인질로 잡혀 있는 내물왕의 왕자 미사흔(未斯欣)을 구하기 위해 남편이 부인에게는 알리지 않고
떠난 뒤 그 사실을 알고 쫓아갔으나 만나지 못하였다. 이에 망덕사(望德寺) 남쪽 모래 위에 이르러
몸부림치며 통곡하였는데, 후세 사람들은 그 모래를 장사(長沙)라 하였다.
친척 두 사람이 부인을 부축하여 돌아오려 하자 부인은 다리를 뻗은 채 앉아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곳을 벌지지(伐知旨:뻗치다의 고유음)라 하였다.
박재상 부인 국대 부인 김 씨
처음 경주 묵장산(墨匠山)의 치술령(鵄述嶺)이라는 고개에 세워졌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1745년(영조 21)에 영해 박 씨 주도로 신모사가 있던 두동면에 다시 건립하여
박제상과 그의 부인 및 두 딸을 제향하고 있다.
백결선생(百結先生)
박제상의 아들이다
신라 자비왕(慈悲王) 때 명신(名臣)인 문량(文良)은 제상의 아들로 천성(天性)이 청렴결백하여 항상 가난 속에서
청빈(淸貧)하게 살았으며 거문고를 즐겼고, 의복(衣服)이 남루하여 백 군데나 기운 누더기 옷을 입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백결선생(百結先生)이라 불렀다. 이로 인하여 호(號)를 백결(百潔)이라고 하고, 이름을 고쳐
누랑(婁琅)이라 하였다. 478년(자비왕 21) 그가 65세 때 이벌찬의 벼슬에 올라 아첨하는 무리들이 많음을
개탄하여 천재(天災)·치폐(治弊)·처경(處境)·흥인(興人)·지인(知人)·화인(化人) 등 여섯 장(章)의 상소문
(上疎文)을 올리니 이 상소문은 너무도 유명했다.
어느 해 섣달 그믐날 사방에서 떡방아 소리가 요란하자 그의 부인이 "남들은 곡식이 풍부하여 떡방아를 찧는데
우리는 당장 먹을 양식조차 없으니 어찌할꼬"하며 탄식하자 그는 태연하게 "사람에게는 수명이 있고 부귀는
하늘에 매인 것이니 오게 되면 받는 것이요 가게 되면 막을 수 없는 것인데, 부인은 왜 쓸데없는 걱정을 하시오
"하며 거문고를 당겨 방아 소리를 구성지게 내어 부인을 위로하였다. 이 방아타령은 우식 곡(憂息曲)을 대신하여
서라벌에 온통 퍼져 즐겨 불렀다고 하며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갈 때 거문고로 회포를 푸니 이것을
낙천악(樂天樂)이라 하였다. 후투티님 글에서
두 딸의 효심을 기려 사당으로 가는 문을 ‘사효문(思孝門)’으로 했다.
박제상의 두 딸, 아기(阿奇)와 아경(阿慶)의 영정을 모신 쌍정려(雙旌閭)이다.
박재산 큰딸 아기와 작은딸 아경
기념관 뒤편에 있는 추모비
삼모녀상(박재상 부인과 두 딸): 왜로 떠난 박재상을 기다리다 순국 소식을 듣고 부인과 딸이
망부석이 되었다는 설화를 바탕으로 삼모녀를 조각한 상
치술령곡 민요 (鵄述嶺曲 民謠)
밤개 포구 백사장에 흩어진 통곡
피 토하는
애끊는 슬픔
두동면 만화리
옻밭마을 가운데 길 지나
계곡 타고 산을 오르니
슬픔에 가위눌린 힘겨운 걸음
걸음걸음이 눈물 자국
숨은 끊어질 듯
가슴은 미어지니
혹은 설워 흐느끼고
쉬다가도 갑자기 울먹이는
야윈 어깨
굴참나무 골짜기 구비 돌아 오른
치술령 고개
칼바람 불어 얼어붙은 시린 冬天아래
하염없이 지키며 바라보는
잿빛 바다
망부석
박재상의 부인 김 씨는 남편이 고구려(高句麗)에서 돌아오자마자 다시 왜국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첫째 딸
아기(阿奇)와 셋째 딸 아경(阿慶)을 데리고 치술령(鵄述嶺)에 올라가 왜국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마침내
미사흔(未斯欣)만 돌아오고 남편은 순절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두 딸과 함께 단식, 자진하니 몸은 화해서
망부석(望夫石)이 되고, 넋은 치술 조(鵄述鳥)로 화하여 목도(木島)까지 날아가 남편의 넋을 맞아 新羅로
돌아왔다고 한다.
어느 날 왕이 있는 전정 마루에 새 한 마리가 날아와 앉아 구슬픈 소리로 지저귀며 <목도의 넋을 맞아
고국에 돌아오니 뉘라서 그것을 알리요>라는 뜻의 글자를 쪼아 놓고 날아 가자 왕이 이상히 여겨 뒤쫓아가
보게 하였던 바 치술 암(鵄述庵) 기슭의 바위 속으로 들어갔다.
왕은 비로소 그 새가 김 씨 부인의 넋임을 알고 그 바위를 은을암(隱乙巖)이라 하고, 그 바위 위에 영신사
(靈神祠)를 세워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차녀 아영(阿榮)은 가정을 위하여 굳게 살면서 다섯 살 된 남동생을 기르니 이 남동생이 바로 백결선생
(百結先生)이다. 訥祗王(눌지왕)이 듣고 미사흔(未斯欣)으로 하여금 아영을 아내로 삼게 하고 위로하였다.
이러한 박제상(朴堤上)의 충절(忠節)에 대해 조선의 세종대왕(世宗大王)은세종대왕(世宗大王) ‘신라 천년에 으뜸가는 충신이다’
하였고, 정조는 ‘그 도덕은 천추에 높고 정충(貞忠)은 만세에 걸친다.
하고 극찬했으며 150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박재상 기념관은 월요일은 휴무라서 안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박제상기념관은 총 64억 원의 사업비를 투입, 울산시 울주군 두동면 만화리 치산서원 인근 9,461㎡ 부지에
2개 동의 한옥 양식으로 착공 1년 7개월 만에 2008년 9월 준공됐다. 기념관은 크게 충신 박제상을 기리는
박제상기념관과 울주 문화관, 교육영상실, 옥외 전시공간 등으로 꾸며졌다. 이 가운데 기념관은 박제상
일대기 및 가족 이야기를 밀랍인형과 도표, 영상 등으로 꾸며져 있고 문화관에는 박제상이 살던
신라 시대상과 울주의 민속 등이 모형으로 전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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