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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울산

언양 작천정

작천정이라는 개인 소유 재산을 울산시에 기증한 두 분

김홍조와 이구수의 이야기가 궁금해서 작괘천의 작천정을 찾았다

능묘에 석인상石人像을 세우는 전통은 중국 고대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전하나 유물로 확인되는 것은

한대漢代 이후부터다. 그리고 당대唐代에 이르러 석인상은 능묘 제도의 일부로 체계화되면서 문인석과 

무인석으로 구분되었고, 송대宋代를 거쳐 명청대明淸代까지 계승・발전되었다.

 

우리나라는 당의 영향을 받은 통일신라시대 왕릉에서 석인상이 처음 등장하지만, 무인석만 설치되었을

뿐이다. 반면, 고려시대 왕릉에서는 문인석과 무인석을 뚜렷이 구별하여 세웠다. 고려 말의 묘에서도 문인석은

드물게 확인된다.

 

조선시대 석물을 대표하는 것은 문인석이다.

각종 문헌자료에 석인이라고 표현한 것은 대부분 문인석을 의미한다.

문인석은 시기마다 양식과 규모가 다양하게 변화 발전하면서 대량으로 제작되었다.

지금도 우리 주변의 왕릉이나 묘에서 가장 흔히 접할 수 있는 석물 중 하나가 문인석이다.

오늘 아래와 같은 김홍조와 이구소의 각석을 찾는데 얼마나 오래 숨은 그림찾기를 해야할까

생각을 했는데 의외로 빨리 찾게 됐다

김홍조

김홍조(金弘祚). 자는 경옥(景玉). 호는 추전(秋田). 본관은 금령(金寧).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고

금령 군(金寧君)으로 봉한 김시흥(金時興)의 25 세손이자 사육 신중 하나인 백촌 김문기의 16 세손. 할아버지는

호조참의 김형복, 아버지는 선공감 가감 역을 지낸 김규한(金奎瀚). 1868년(고종 5년) 1월 18일 울산 반구동

서원마을에서 태어났다. 조선 말기에 관직생활을 시작, 이후 개화운동에 투신했다. 부산에서 사업을 일으켜

거부가 됐다. 인재 양성을 위해 국내외 유학생들의 학비를 지원하고, 금융에 참여해 독립자금을 조달했다.

'경남일보' 창간, '동아일보' 발기에 참여했다. 이시영이 운영하던 독립군 양성기관(만주의 신흥 무관학교)과

박상진 의사의 대한광복단을 지원했다. 3.1 운동이 일어나자 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의정원

의원이 됐다. 1922년 7월 20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55세.

김홍조는 인재양성을 위한 장학사업 외에 선각자로서 개화 사업에도 뛰어들었다.

학교와 교량, 도로, 잠농, 수리, 사찰에 이르기까지 출연한 금액이 14만 1천6백여 원에 이르렀다.

곤궁하거나 딱한 처지에 놓인 친족이나 향민 구제에도 나섰다.

1928년 학성공원에 김홍조 공덕비가, 1939년 묘비가 세워졌다. 비문은 박영효가 지었다.

김홍조는 선각자, 실업인, 언론인, 금융인, 독립가로 활동하면서 인재양성과 대한독립을 위해 살다 갔다.

이구소

봉선(鳳仙)은 구소의 초명(初名)이고, 호경(護卿)은 개명(改名), 그리고 구조는 시명(詩名)이라고 한다

구소는 약 15년간 김 옹과 살다가 김 옹이 돌아 간 일 년 뒤 집을 떠났다.

그녀가 김 옹과 인연을 갖게 된 것은 조선 말기 김 옹이 금릉위(錦綾尉) 박영효(朴泳孝)와 함께 작천정을

자주 찾았는데 이때 구소가 시를 잘 짓고 또 작천정에서 가까운 언양에 살았기 때문에 김 옹이 자주 불렀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김 옹이 죽은 해가 1922년인 것을 생각하면 그녀가 김 옹을 만나 생활을 함께 한 것이 16살 때이고 김 옹이

죽었을 때 그녀의 나이는 31세였다. 그녀는 글과 문장이 뛰어났지만 정실로 들어간 것이 아니기 때문인지

김 옹과 사는 동안은 물론이고 이후의 행적도 잘 나타나지 않고 있다.

구소가 김 옹이 죽은 뒤 남긴 술회(述懷)라는 시를 보면 구소가 이별의 아픔을 참으로 잘 그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看朱忽碧霹無聲 何恨難綠只恨情 若知此日分明在 一夜相親赤不成

번개 불 우레 소리 하늘 무너져/소리조차 안 들리는 이 한정을/ 만약 이날이 올 줄 알았다면/

하룻밤 인연도 맺지 말 것을/ 님은 가시다/ 거룩한 그 님은 다시 못 올 길을 홀홀히 가시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졌네/이 몸 담을 곳이 어디메뇨

이구소는 김홍조 옹이 죽은 후에 거창 정 온가로 개가를 했다

정 씨 집안에서도 구소가 언제 시집을 왔는지에 대해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다.

구소의 손자며느리 최소희(崔小姬) 여사는 집안에서 들은 얘기라면서 김홍조 씨가 돌아 간 후

구소 할머니가혼자 산다는 얘기가 퍼져 나가자 영남 사대부의 집안에서 그녀를 넘보지 않는

집안이 없을 정도로 구소의 인기가 높았다고 말한다.

 

구소와 최 여사는 묘한 인연을 갖고 있다. 최 여사의 선을 보러 경주까지 왔던 사람이 바로 구소였다.

제가 14살이 되었을 때 선을 보게 되었는데 그때 거창에서 경주까지 선을 보러 온 사람이 바로 구소

할머니였습니다.

당시 구소 할머니는 경주 안동 여관에서 머물면서 우리 집에 있는 나를 선 보러 왔는데 제가

그때 집안사람들과 함께 나물을 다듬고 있는 것을 본 할머니는 제 키가 작아 보였 던 지

우리 집안사람들에게

처녀를 한번 일으켜 보라고 해서 그때 제가 울었습니다.

면서 최 여사는 내가 키가 작아 요즘 같으면 시집을

못 왔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구소는 거창 정 씨 집안에서도 예우를 받았다.

최 여사는 할머니가 비록 소실로 왔지만 시집 온 그날부터 집안사람들이 소실로 생각한 적이

한시도 없습니다.제가 시집을 올 때도 구조는 비록 소실이었지만 모든 집안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었다면서 할머니가 이렇게 우리 집안에서 예우를 받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이 당신 스스로 아주 예절 바르게 살았기 때문이라 강조한다.

 

우리 집안에서 구소 할머니를 얼마나 예우했나 하면 설과 추석 등 명절이 되면 자식들이 모두

할머니가 계시는집으로 가 문전 큰 인사를 올렸습니다.

아마 양반 집안에서 소실에게 자식들이 이렇게 절을 한 집안은 우리집안뿐이었을 것입니다.

라고 말한다.

실제로 구조는 시집을 가는 날부터 본가에서 200m 정도 떨어진 큰 별장에서 가정부는 물론이고

침모와 몸종을 여럿 두고 살았다.

거창 정 씨 집안이 구소 할머니에 대해 얼마나 예우를 했나 하는 것은 그녀가 죽기 전 정씨

집안에서 구소를 먼저 죽은 남편 곁에 같이 묻어 주겠다고 했으나 구소 스스로 소실이

그럴 수 없다면서 거절하는 바람에 본인이 원한대로 부산 금정산에 묻게 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정씨 집안사람들은 구소를 언양 할머니라고 불렀다.

구소는 본 부인과는 물론이고 고부간에도 사이가 좋았다.

구소는 1991년 100세로 죽었다. 그런데 그의 죽음을 앞당긴 것은 며느리가 일찍 죽었기 때문이다.

특히 구소의 둘째 며느리는 안동 장 씨로 나이차가 많지 않았지만 구소를 어머니로 지극 정성을

다해 모셨는데 평소 이렇게 자신에게 잘한 며느리가 죽은 후 늘 상심하다가 병을 얻어

구조도 죽게 되었다.

 

이 며느리의 남편이 구소의 둘째 아들로 부산 시장과 경남도지사를 지냈던 정종철 씨다.

그런데 이 며느리를 구소가 얼마나 사랑했나 하는 것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며느리의 제문에서

알 수 있다.

며느리는 1981년 86세로 죽었는데 이때 고수는 90의 나이로 며느리 제문을 지었다.

이 제문은 지금도 최희 여사가 잘 보관해 놓고 손님들이 오면 보여주면서 구소의 글 솜씨를 자랑한다.

 

한지에 붓으로 한글로 쓴 제문은 유세차로 시작하고 있는데 글 속에는 며느리의 죽음에 대한 애달픈

사연이들어 있다. 그런데 끝 구절은 나도 나이가 많아서인지 이 글을 너무 장황하게 쓰다 보니

정신이 혼미하는구나로 되어 있어 자신의 늙음을 애달파하고 있다.

이처럼 정 씨 집안에서 예우를 받았던 구소가 남편이 죽은 후 이런 예우를 물리치고 울산으로

온 것은 그가 정씨 집안에 있으면서 키운 양아들이 울산에서 근무했기 때문이다.

 

울산의 대표 여류시인 이구소

  1892년 언양읍에서 태어난 이구소는 어릴 적부터 시·서·화에 능했다.  작괘천을 노래한 그의 한시가

작천정 내벽에 걸려 있고, 작괘천 암반에 새겨진 많은 글들과 이름 중 그의 이름이 가장 눈에 띈다. 

김홍조의 소실로 들어가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전달하는 역할을 할 만큼 사랑을 받았으며, 후일

그의 소유가 된 작천정을 언양에 기증했다.

  <봉선화>는 이구소의 대표적인 한시집으로 ‘성남’, ‘통도사’등 낯익은 지명이 담긴 작품도 있고, 작천정을

비롯한 울산의 풍류를 노래하는 시구가 많이 기록되어 있어 한말 울산의 풍물을 알아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통도사 극락암의 경봉스님도 이구소의 시를 좋아 했다고 한다

작천정은 1919년 조선 총독부가 토지 조사를 할 때 오위영 씨가 개인 명의로 등재해 1924년

추전(秋田) 김홍조 (金弘祚)씨에게 매각했다.

조선말 도승지를 지낸 것으로 알려진 김 옹은 당시 대단한 재력가인 동시에 세력가였다.

김 옹은 작천정을 구입한 후 정각을 다시 수리한 후 개인 별장으로 변조해 일반인들의 출입을 금했다.

이렇게 되자 작천정 출입 문제를 놓고 지역 여론이 비등하자 김 옹의 후실이었던 구소가 김 옹을

설득해 작천정 일대를 흔쾌히 주민들에게 돌려주어 지금껏 작천정이 울산의 명소로 모든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게 되었다.

요즘은 세상이 변해 평생 동안 모은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자신이 어렵게 번 돈을 사회사업에 바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세력을 가진 사람들 중 이처럼 선구자적인 행동을 한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이 때문에 울산시민들 중에는 이런 미담을 남긴 구소의 행적을 궁금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이처럼 훌륭한 일을 한 구소에 대해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 다행히 그녀는 살아 있을 때

봉선화(鳳仙花)라는 시집을 한 권 남겼는데 이 시집을 통해 그녀의 활동을 엿볼 수 있다.

봉선화는 1980년 그의 나이 87살 때 발간된 시집으로 이 속에는 작천정과 통도사, 문수암 등에

대한 한시가 많아 당시 울산의 풍물을 알아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이구소의 秋田의 절교장에 대한 答詩
看朱忽碧雷無聲 절교장 붉은 도장에 소리 없이 하늘 무너져
只恨因緣不恨情 정 없다 한탄 않고 인연 없다 한탄하네
早只此別丁寧在 정녕코 헤어질 줄 일찍 알았더라면
一夜相親誓不成 하룻밤 사랑도 맹세코 이루지 않았으리

천 년 전의 난정(蘭亭) 이후에 으뜸가는 다락으로 작천정이 있네

저처럼 흰 바위가 없는데 이 사이에 맑은 시내가 흐르네

달빛 비친 땅은 흰 눈이 번득이는 듯하고

여름 하늘인데도  충분히 가을 기운을 느낄 수 있네

몇몇 경관을 수습하기 어려워 붓을 잡으니

여인의 시름이 일어나네

구소 이호경

오병선의 작천 정기

취산 김구하. 우강 김봉오의 작천 정운

장두환. 오병선. 이인성 글

최상민. 최한욱. 최상봉. 장두환. 글

오인선의 작천 정기

김유일의 작천 정기

김호동. 이원복. 이정혁. 황학구. 글

장두환의 작천 정기

모은대

이곳은 귀향을 왔던 고려말 충신 정몽주를 기리는 명문이다

송찬규 금명이라 쓰여 있는데 송찬규 삼가 새기다로 해석하면 되겠다

바위가 술잔처럼 파여 있어서 작괘천이라 이름하였으며 줄여서 작천이라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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