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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울산

대곡박물관과 천전리 각석

대곡박물관

울산광역시 소재 대곡댐 사업에서 1999년 9월부터 2004년까지 이루어진 5차례 발굴조사를 통해

원삼 국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는 1,100여 기의 고분군과 삼국시대에서 조선시대까지 다양한

시기의 생산유적이 확인되었다.

울산 대곡박물관은 대곡리 일대에서 발굴된 유적의 보존과 지속적인 연구를 위해 2002년 대곡댐

유물전시관으로 건립이 추진되었고, 2009년 6월 24일 울산 대곡박물관이라는 명칭으로 개관했다.

주요 전시시설로는 상설전시실인 제1전시실, 제2전시실, 로비전시실과 기획전시실, 야외전시장,

시청각실 등이 있다. 제1전시실에서는 대곡의 역사를 현대부터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며 살펴볼 수 있도록

대곡댐 건설부터 발굴유적 현황, 조선시대 대곡의 생활과 문화가 전시되고 있다.

제2전시실에서는 하삼정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과 12호 나무덧널무덤 복원 전시, 청동기시대 집터에서

출토된 유물 전시 등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밖에 대곡의 불교유적과 신라 귀족의 흔적을 살펴볼 수 있는 천전리 각석의 명문이 전시되고 있는

로비 전시실과 '섬유미술 알리기', '자연에서 찾은 이상향 구곡문화' 등의 특별전이 열리는 기획전시실이 있다.

야외전시장에는 하삼정 유적의 다양한 무덤 중 시기를 대표하며 보존 상태가 좋은 무덤 8기와 통일신라시대

부터 조선시대까지 사용된 도로 1기가 이전, 복원되어 있다.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 서하천전로 257에 있다.

언양읍성

언양도 천주교를 떼어놓고 말할 수 없는 곳이다

작천정은 김홍조에 의해 이구소에 넘어갔으나 이구소가 울산시에 기증을 했다고 한다

김홍조와 이구소의 이름이 바위에 새겨져있다고 한다 
 
부산의 여성문학을 논할 때 1950년대 이영도가 활동하고 김말봉이 <찔레꽃>을
썼던 문학사에 이구소의 한시 시인을 빠뜨릴 수  없다.
이구소는 일제강점기 언양의 명기, 여류시인으로 재색을 겸비한 뛰어난 인물이었다. 김홍조의 소실이 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시인은 세 명의 남자와 살았지만 자식이 없다. 특히 두 번째 남편 김홍조와 8년을 살았지만 자식이 없고,

세 번째 정태균과 40년을 살았지만 자식이 없다. 
 
거창 정온 고택으로 경주 최부잣집 딸인 최태희(98세)님이  시집을 와 보니, 언양 할머니로 불린

구소 할머니는 아름답고 음식 솜씨와 바느질 솜씨가 뛰어나고 남편의 만장 글씨를 쓸 정도로 시문에

능하섰는데 왜 처음부터 소실의 길을 택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고 여러 번 말했다. 안타까워했다. 
 
구소가 30세 때 김홍조의 일 년 상을 치르고 31세 나이에 10살 많은 정태균의 소실로
들어와 40년을 살았다. 거창 동계 정온 집안의 소실로 들어왔다.

포은 정몽주와 반구대

신라시대 사람들이 새긴 그림

그릇에 글자를 새겼던 이유

태화루

울산 지역은 일찍부터 신라와 관련된 다양한 유적이 확인되었다.

신라가 낙동강 하구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인접 지역인 울산을 지나야 했다.

삼정리 하삼정은 신라가 울산 두동 언양 삼남읍을 거쳐 양산과 김해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다.

하삼정 일대에서 발굴된 규모와 수를 통하여 볼 때 하삼정은 신라에 속하면서도 주요 거점

지역으로서 상당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유추해볼 수 있다.

하삼정 일대는 신라가 가야 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한 교통로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신라의 지배하에 있었지만 가야 지역의 특징적인 묘제가 하삼정 고분군에 나타나는 것이 이를 알려준다.

김해 대성동 나무덧널무덤의 경우 시신을 묻는 으뜸 덧널의 바닥이 껴묻거리 부장품을 넣는 딸린 덧널

부곽의 바닥보다 낮다. 카라님 글에서

하삼정은 신라에 속하면서도 신라와 가야를 연결하는 길목에 자리하고 가야 묘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나 지구 나무덧널무덤 3호와 돌덧널무덤 115호 그리고 231호 등에는 가야 묘제에서 나타나는 특징인

딸린 덧널의 바닥이 으뜸 덧널의 바닥보다 높은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돌덧널무덤의 축조 시기는 경주 및 그 주변부에 비해 이른 시기에 등장하였다.

50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조성된 하삼정 고분군에서는 많은 양의 신라 토기가 출토되었다.

오랜 시간 무덤 속에 묻혀 있었던 굽다리 접시, 굽다리 긴목 항아리 등의 형태 변화를 통해 시간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다.

 

박물관을 나와 천전리 각석이 있는 계곡으로 가본다

오랜 풍화작용으로 많이 훼손된 모습이다

각석은 내용상 선사시대 점 각기 하학적 문양(點刻幾何學的文樣)과 각종 동물상이 새겨진 상부와,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 선각화(線刻畫)와 명문이 있는 하부로 나눌 수 있다.

암질은 적색 셰일이고 크기는 너비 9.5m, 높이 2.7m이다.

상부의 문양은 주로 쪼기 [彫琢] 기법을 썼으며 하부는 긋기 [線刻]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것은 제작 시대 및

제작 집단이 달랐음을 뜻한다.

 상부

가. 기하학적 문양

상부의 기하학적 문양은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어 있다. 마름모꼴 무늬·굽은 무늬·둥근 무늬·우렁 무늬·십자무늬·

삼각 무늬 등이 홑이나 겹으로, 혹은 상·하·좌·우 연속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들 기하학적 문양은 대개

직선보다 곡선이 많고 상징성을 띠는 것이 많아 명확한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다

.

가장 많이 새겨진 것은 마름모꼴 무늬로 홑 무늬·겹무늬 외에 연속 문이 있다. 연속 문에는 가로·세로로 겹친

것과 한 무늬 내부에 같은 무늬가 두 겹·세 겹 반복되거나 점이나 빗금이 있는 것도 있다.

굽은 무늬에는 가로굽은무늬와 세로 굽은 무늬가 있다. 원시 문양에서 이들은 각기 물결과 뱀을 상징한다.

상부 오른쪽 끝의 열매를 꿴 화살모양의 무늬는 암수의 결합을 의미하는 문양으로 해석되기도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상부의 이와 같은 문양들은 본질적으로 신석기시대 무늬토기의 기하학 문양과 연결된다. 표현이 단순,

소박하면서도 명쾌한 무늬토기 문양 양식을 이어받아 청동기시대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문양은 곡식이나 음식물 등이 항상 풍요롭기를 바라는 청동기시대인의 기원을 담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동물상

동물상은 대부분 상부 왼편에 있다. 사슴 종류가 압도적으로 많고 이름을 알 수 없는 각종 동물과 물고기·

새 등이 있다. 사슴은 대개 암수 2마리가 서서 마주 보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한 쌍으로 표현된 사슴 중 수사슴은 뿔이 매우 크고 가지가 무성해 순록의 일종을 나타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크기가 작은 사슴들은 신체의 특징이 각기 다르게 표현되어 염소나 말 등 다른 동물로 볼 수 있는

것도 여러 마리 있다

.

상부 중심부에는 도안화된 얼굴의 한 인물과 태양을 나타낸 듯한 둥근 문양의 좌우로 4마리의 사슴이

뛰어가는 모습을 새겨놓았다. 이는 당시의 어떤 종교의식이나 신앙 관념과 관련 있는 표현으로 보인다.

이들 동물상과 기하학 문양 사이에는 곡식 이삭이나 풀뿌리·꽃봉오리를 나타낸 한 문양도 있으나

상징성을 띤 기하학 문양의 변형으로 볼 수도 있다.

석각 상부 문양 제작 집단의 종교 신앙과 관련해 주목되는 것은 상부 왼편 끝에 보이는 인두 수신상(

人頭獸身像)이다. 이 동물상은 부드러운 얼굴을 한 사람의 머리와 사슴을 닮은 몸체가 결합된 모습을

하고 있다.

 

이것은 선사인이 믿고 숭배하던 신수(神獸)의 하나로 생각되며 반인반수(半人半獸) 관념의 기원과

관련해 중요하게 평가되는 자료이다.

그밖에도 몸체가 긴 2마리의 동물이 교미를 하는 듯 돌아서서 꼬리를 맞댄 채 서 있는 모습이 2군데

보인다. 어떤 동물을 나타낸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상부 왼편에는 상어를 나타낸 듯 꼿꼿한 지느러미가 여러 개 있는 물고기 2마리와 주둥이와 비늘까지

표현된 물고기 1마리, 붕어 모양의 물고기 1마리가 각기 새겨져 있다.

인물상

인물상은 뚜렷이 파악되는 것이 모두 7군데이다. 얼굴만 묘사된 것과 전신을 나타낸 것 등 두 종류가 있다.

모두 원시 암각화 특유의 극도로 단순화된 표현법을 쓰고 있어 사실성이 약하며, 일면 괴상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얼굴상은 대부분 원시종교의식과 관련된 탈을 연상시킨다. 눈·코·입이 뚜렷이 새겨진 얼굴상 하나는

시베리아 아무르강 유역 암벽 조각에 새겨진 원시 탈과 유사해 흥미를 끈다. 이 지역과의 문화적 연계성,

주민의 이동 가능성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하부

석각 하부는 선각화와 명문이 뒤섞여 있다. 대개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대에 걸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선각화는 인물·기마행렬도를 비롯해 환상적인 동물들과 자연계의 동물, 크고 작은

배가 항해하는 모습 등 다양한 내용으로 구성되었다.

명문에는 영랑(永郎)·금랑(金郎)·정 광랑(貞光郎) 등 신라 화랑의 명칭을 비롯해 관명·직명·인명 등이

여럿 새겨져 있어 신라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이용되고 있다.

천전리 각석에 대한 해설

선각화

인물·기마행렬도는 3군데 보인다. 이 중 하부 중앙 제2행렬도의 한 기마인물은 눈·코·입을 점으로 찍어

표현하고 얼굴 윤곽을 마름모꼴로 처리한 것이 신라의 토용(土俑)이나 토기 선각화 중 인물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얼굴과 흡사해 주목된다.

상부 왼편 제3행렬도의 말은 질주하는 순간의 모습이 간략한 몇 개의 선만으로 잘 표현되어 제작자의

빼어난 표현 감각을 잘 드러내고 있다.

 

환상적인 동물로는 용으로 보이는 것이 여러 마리 새겨져 있다. 특히, 하부 오른편 끝에 새겨진 용은

머리를 쳐들고 왼편을 향해 허공을 날아가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몸체의 지느러미와 비늘, S자형으로 휘며 뒤로 뻗은 꼬리 부분 등이 세심하게 처리되어 있어 언뜻

고구려 중기 고분벽화의 사신도(四神圖)에 보이는 청룡을 연상시키는 측면도 지니고 있다.

 

자연계의 동물로는 말이 홀로, 혹은 군마(群馬)의 형태로 묘사되었고, 새도 여러 마리 새겨져 있다.

그밖에 큰 돛을 단 범선과 사람이 노를 젓고 있는 용머리의 배는 당시 신라인의 해상활동과 관련된

중요한 자료이다.

명문

명문 중 확인된 글자는 800자가 넘는다. 상부 오른편의 원명(原銘)과 그 왼편의 추명(追銘)이 내용의 중심을

이루고 있고 그 밖에 제명(題銘)이 다량 보인다. 원명이 새겨진 기사년은 법흥왕 12년(525), 추명에 새겨진

기미년은 법흥왕 26년(539)으로 추정된다.

뒤의 추명은 왕과 왕비가 이곳을 찾은 것을 기념해 기록했음을 밝히고 있어 6세기경의 신라사회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명문 중에는 사탁부(沙啄部)라는 부명이 여러 번 언급되어 있다. 이것은 이곳이 신라 6부의 하나인

사탁부인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장소임을 뜻한다. 이곳은 사탁부의 고유 종교의식이 행해지던

성지(聖地)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밖에도 제명에는 여러 화랑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 당시 많은 화랑이

이곳을 찾아 도량(道場)으로 삼았음을 전해준다.

 

이들 각석 하부의 명문과 각종 선각화는 신라 6부 체제의 발전·변화과정과 내용을 규명해나가는데 주요한

실마리를 제시해주고 있으며, 앞으로 이에 대한 보다 종합적이고 면밀한 검토가 요구된다.

민족문화 대백과사전에서

이곳 사연댐 상류는 우리 아이들 어렸을 적에(3~40년 전) 여름휴가 때 야영을 하며 지내던 곳이었는데

어느 해인가부터는 수자원 보호구역이라 해서 출입통제를 하고 있어 다니지 않던 곳이다

각석이 그때보다 더 많이 훼손된 것 같아서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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