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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형무소 역사전시관

1908년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세워졌던 경성감옥(京城監獄)을 시초로 하고 있다.

1908년 개소된 이후 경성감옥은 서대문감옥(1912년), 서대문형무소(1923년)로 명칭이 몇 차례 바뀌었고

일반적으로 서대문형무소로 통칭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주로 독립운동가들이 투옥되어 고초를 당했던

현장으로 식민지 권력의 대중통제 시설로 이용되었으며, 독립운동이 치열해지면서 1920년대 초반

그 규모와 시설이 대규모로 확장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서울형무소(1945년), 서울교도소(1961년), 서울구치소(1967년)로 명칭이 바뀌었고,

독재정권과 군부정권에 저항하였던 수 많은 민주화 운동 인사들이 투옥되어 고초를 당한 현장이었다.

현저동 101번지

서대문 형무소가 위치한 서울시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는 조선후기 북쪽 의주로 가는 큰길인

의주로가 위치한 곳으로 사대문 안과 밖을 동서넘북으로 잇는 주요 교통로였다

이에 중국의 사신을 맞아들였던 영은문과 모화관이 있었고 1897이후에는 영은문이 없어진 자리에

독립문이 세워졌다. 일제는 이곳 현저동에 대규모 근대감옥을 설치하여  이곳을 오가던 한국민에게

식민지 절대권력에 대한 복종을 강요하였고 감시와 통제를 위한 식민지 지배도구로 이용하였다

1894년 청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 1905년 을사능약. 1910년 강제합병 

서대문형무소역사관 개관

1987년 11월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하자 서대문형무소는 도시개발의 일환으로

철거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여 서대문구와 독립운동가 후손 및 역사학자 시민운동가들이 

역사교훈의 현장으로 보존하고자 노력하였다 그 결과 서대문구의 주도로 대대적인 성역화 사업을

시행하여 1998년 11월 5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으로 재탄생하였다

일제는 취조를 하고 물고문을 하고 손톱 찌르기 등 온갖 고문을 자행했었다

가늘고 날카로운 꼬챙이로 손톱밑을 찔러 고통을 주었던 고문방법 심할 경우 손톱뿐 아니라

입속까지 마구 찔러 고통을 주기도 했으며 심지어 그 고통으로 기절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고통 속에 독립운동을 했는데 벌써 잊고 일본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무리들이 

아직도 일본을 미화하고 있는 현실 지금도 그네들은 우리 민족을 무시하고 고추냉이 터러 등

온갖 만행을 자행하고 독도는 저희 땅이라고 우겨대는데 배리도 없이 우방 어쩌고 저쩌고 

참 한심한 나라 민족성 나만의 생각으로 끝나면 좋겠다

지하독방

취조 후 옥사로 이동하기 전 감금했던 곳 곳곳에서 들려오는 고통의 비명소리와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고문의 공포로 휩싸인 공간이었다 그러나 이런 지하독방에서도 독립운동가는 만세소리를 멈추지 않았고

독립의 다짐을 되새겼다

감시와 통제

기록으로 보는 옥중생활

생활공간

10.11.12 옥사

1919년 3.1 운동으로 잡혀 온 수감자들이 갑자기 늘어나 1920년대 초에 새로 지은 2층 옥사이다 

수감자 감시와 통제를 쉽게 하려고 원형 감옥구조로 만들었다 가운데 중앙 간수소를 중심으로

각 옥사를 부채꼴 모양으로 배치한 형태다 복도천장에는 채광창을 내어 수감자의 움직임이

잘 보이도록 하였다

독방

이곳은 1평도 안 되는 좁은 공간으로 일제가 애국지사들에게 육체적인 고문과 심리적 장신적

고통을 주기 위해 설치한 독방이다 일제는 항일독립운동을 탄압하고자 애국지사들을 악랄한 고문과

혹독한 수형생활로 억압하였다 특히 애국지사들을 특수범죄자로 분류하여 전기와 변기도 없고

햇볕조차 들어오지 않는 이러한 독방에 투옥시킨 후 고문과 폭행등 갖은 악행을 일삼았다

민주지사들도 이곳을 거쳐갔다

옥사전시관에는 형무소 조직기구와 감시도구, 그리고 재소자들의 하루 일과 등 전반적인 형무소 생활에

대해 알아볼 수 있는 중앙사가 있고, 독립운동가들이 수감되었던 11~12 옥사, 재소자들이 군수품 제작에

동원되었던 공작사 등이 있다. 야외전시물로는 한센병사, 사형장, 유관순 지하감옥, 망루와 담장 등이 있다. 

독립운동의 역사적 사건

광복회

군자금 모금활동

의열투쟁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사건

민주화운동기간

조작된 민청학련사건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일제강점기 제국주의 정권과 해방 이후 독재정권이 그들의 권력유지를 위해

‘서대문형무소’라는 감옥을 어떻게 이용하였는지, 또 그 권력에 저항한 사람들의 치열한 투쟁의 역사를

보여주는 유적이자 박물관이다. 따라서 관람객으로 하여금 올바른 역사의식과 역사적 정체성을 함양하는데

기여하고 있으며 전 인류사회에 자유와 평화의 소중함을 알리고 일깨우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초기 사형장터

1908년 10월 서대문 형무소가 경성감옥으로 문을 열었을 때 최초로 설치한 사형장이 있던 자리다

사형은 감옥에서 비공개로 집행되었기 때문에 감옥 내에서도 가장 깊숙한 안쪽에 배치되었다

최초의 사형장은 교수대가 2개 설치되어 있고 지하에 시신수습소를 만들었다

지금의 연못은 그때의 지하의 흔적으로 추정된다 이곳에서 이강년 허위 이은찬 이인영의병장과

이재명 강우규 의사 등 290여 명이 사형당했다 1921년 옥사를 확장하면서 현존하는 사형장

위치로 이전하였다

추모비

자유와 평화 정의를 위해 일제와 맞서 싸우다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독립운동가를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해 제작되었다

대한민국이라는 큰 그릇 안에 순국선열의 이름을 하나씩 새겨 그들의 민족정신과 신념이 발전된 미래로

나아가는 원동력이 되어야 하는 바람을 표현했다 지금까지 찾아낸 순국지가 165 분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통곡의 미루나무

1921년 전후 사형장을 이전할 당시 심은 것으로 알려진 미루나무이다

사형장으로 들어가기 전 사형수들이 원통한 마음에 이 나무를 붙잡고 통곡했다고 하여

통곡의 미루나무로 불리었다 2020년 8월 100여 년의 수령으로 쓰러졌다

사형장의 역사와 함께한 미루나무를 기억하기 위해 그대로 노출 전시하고 있다

쓰러지기 전 2016년 4월 뿌리에서 한그루의 미루나무가 자생하여 그 뒤를 잇고 있다

아직도 연고자를 찾지 못하고 있는 독립영웅들

담장과 망루

1908년 서대문 형무소를 열었던 당시에는 담장 일부만 벽돌이었는데 1923년에 형무소 주변 전체를 

4m 높이의 벽돌담으로 쌓았다 원래 길이는 모두 1161m였으나 지금은 일부 복원하여 앞면 80.m

뒷면 200m를 보존하고 있다. 망루는 수감자를 항상 감시하고 탈옥을 막기 위해 만든 것으로 높이 10m이다

일제강점기에 6개가 설치되었으나 지금은 서대문형무소 정문에 1개소 뒷쪽에 1개 모두 2개가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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