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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골 한옥마을

남산골 한옥마을은 예전에 친구 딸 결혼식 때 들려서 예식만 보고 둘러보지 않고 떠났는데

북촌 한옥마을과 얼마나 다른가 다시 와보게 된다

정문만 봐도 범상치 않은 거대함을 느끼게 한다

1998년 조성된 남산골한옥마을은 남산 북측 옛 수도방위사령부 부지 총 79,934m²(24,180평)에 한옥 5동,

전통공예관, 천우각, 전통정원, 서울남산국악당, 새천년타임캡슐 광장으로 구성되어 시민과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번화한 도심 한가운데에서 한국 전통문화를 소재로 한 다양한 체험거리를 만나볼 수 있으며,

남산 자락을 따라 전통조경 양식으로 조성된 계곡과 정자, 각종 화초가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전통정원 가장 높은 곳에는 서울정도 600년을 기념하고 400년 후 서울정도 천년을 기대하며

1994년 당대의 기억을 매설한 서울천년타입캡슐 광장이 조성되어 있다.

천우각

 

 옛 가옥을 복원해 놓은 남산골한옥마을 남산골한옥마을 안으로 들어서면 연못 청학지와 그 곁으로 천우각이

있다. 천우각 광장을 지나 돌계단을 오르면 서울 곳곳에 있던 한옥이 이전·복원되어 옛사람들의 생활방식을

볼 수 있게 한 예스러운 공간이 나타난다. 모두 다섯 채의 한옥으로서 삼각동 도편수 이승업 가옥, 삼청동

오위장 김춘영 가옥, 관훈동 민씨 가옥, 제기동 해풍부원군 윤택영 재실, 옥인동 윤 씨 가옥이 있다.

이 중 건물 이전이 불가능할 정도로 낡은 옥인동 윤씨 가옥만 새 자재를 사용해 복원했고 나머지 건물은

종래의 집 부재를 그대로 이전했다.

남산골한옥마을에서 즐기는 다양한 체험거리 남산골한옥마을에는 다양한 체험거리가 마련되어 있다.

한옥 다섯 채를 활용하여 한옥실내 공간을 체험하면서 동시에 한국 전통문화프로그램을 접할 수 있다.

한복 입기, 한지 접기, 한글 쓰기, 전통차 마시기를 체험할 수 있고, 전통예절학교와 한방체험도 운영하고 있다.

토요일과 일요일 양일에는 전통혼례가 실제로 치러지고 전통혼례체험도 운영하고 있다. 그 밖에도 천우각

맞은편 원두막에서는 짚공예 시연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천우각 무대에서는 태권도 시범공연과 체험 행사에

참여할 수 있다. 피금정 마당에서는 제기차기, 윷놀이, 비석 치기 등과 같은 민속놀이를 즐길 수 있어 가족이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한옥마을이 들어선 필동 지역은 조선시대에는 흐르는 계곡과 천우각이 있어서 여름철 피서를 겸한

놀이터로 이름있던 곳이다. 또한 청학이 노닐었다고 하여 청학동으로도 불렸다.

청학동은 신선이 사는 곳으로 불릴 만큼 경관이 아름다워 한양에서 가장 경치 좋은 삼청동, 인왕동,

쌍계동, 백운동과 더불어 한양 5동으로 손꼽히던 곳이다. 이곳의 옛 정취를 되살려 시민들에게 제공하기

위하여 골짜기를 만들고 물을 흐르게 하였으며, 정자를 짓고, 나무를 심어 전통정원을 조성하였다.

안채

사랑채

도편수 이승업 가옥(구 조흥은행 관리가) 

흥선대원군에 의해 경복궁이 중건될 때 도편수(조선말당시 목수의 우두머리) 이승업이 지은 집으로

중구 삼각동에 있던 것을 이전했다. 현재는 안채와 사랑채만 남아있으며, 안채는 '정(丁)'자형,

사랑채는 'ㄴ'자형이다. 전후연의 지붕길이가 다르게 꾸민 것이 특색이다

옥인동 윤씨 가옥

 조선시대 서촌이라 불렸던 옥인동에 있었던 '옥인동 윤씨 가옥'은 조선의 마지막 황후였던

순정효황후의 큰아버지인 윤덕영의 집이다.

 이집은 윤덕영이 첩을 위해서 지은 것으로 전통적인 양반가옥과는 폐쇄적인 분위기를 주고 있다.

 현재의 건물은 1910년대에 지어진 원래의 건물을 옮기려 했으나, 그 부재들이 너무 낡고 손상이 심해서

원래 모습을 본떠서 새로 신축한것이라고 한다.

건물을 지은 연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집안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건물이 폐허처럼 남아 있었다.

 넓은 안채와 마루방, 기둥과 문 등에도 섬세하게 최상류층 저택의 면모를 보여주고있다.

 

순정효황후 윤씨(純貞孝皇后 尹氏, 1894년 9월 19일(음력 8월 20일) ~ 1966년 2월 3일)는 대한제국

황후이자 한국사의 마지막 황후이다. 대한제국 순종의 계후이며, 일제강점기의 이왕비, 이왕대비로 칭해졌다.

순정효황후의 생애

1894년(개국 503년) 9월 19일(음력 8월 20일)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문호리의 외가에서 윤택영

부인 기계 유 씨의 장녀로 출생하였다.

1904년(광무 8년), 당시 황태자비였던 순명효황후 민 씨가 사망하자 1907년(광무 11년) 1월 24일,

12세의 나이로 황태자비에 책봉되었다. 이때 아버지 윤택영과 소시모 순헌황귀비 엄 씨 사이에 거액의

뇌물이 오갔다는 풍설이 돌았다. 그 해 부군인 황태자 순종이 황제로 즉위함에 따라 그녀도 황후가 되었다.

순정효황후는 1910년 병풍 뒤에서 어전 회의를 엿듣고 있다가 친일 성향의 대신들이 순종에게 

한일병합조약의 날인을 강요하자, 국새(國璽)를 자신의 치마 속에 감추고 내주지 않았는데, 결국 백부

 윤덕영에게 강제로 빼앗겼고, 이후 대한제국의 국권은 일제에 의해 피탈되어 멸망을 맞게 되었다.

 

순종의 지위가 이왕(李王)으로 격하되었으므로 그녀도 이왕비(李王妃)가 되어 창덕궁 대조전(大造殿)에서

머물렀으며 1926년 4월, 순종이 사망하자 대비(大妃)로 불리며 창덕궁 낙선재(樂善齋)로 거처를 옮겼다

광복 이후

해방 이후에는 1947년 신적강하 조치되어 이왕대비에서 평민으로 전락하였다.

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창덕궁에 남아 황실을 지키고자 하였으며 궁궐에 들이닥쳐 행패를 부리는 

조선인민군을 당시 57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크게 호통을 쳐서 내보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순정효황후는

두려움을 모르는 여걸(女傑)이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51년 대한민국의 전세가 급박해지자 미군에 의해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다. 궁핍한 생활을 전전하던 끝에 1953년 한국휴전협정으로 전쟁이 중단되자

바로 환궁하려 하였으나, 제1공화국의 대통령 이승만이 순정효황후에 대한 민심을 두려워하여 환궁을

방해하였기 때문에, 정릉의 수인제(修仁齊)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1959년에는 비구니로 불교에 귀의하여 대지월(大地月)이라는 법명을 얻었고, 이듬해 1960년, 전(前)

구황실사무총국장 오재경(吳在璟)의 노력으로 환궁에 성공하였고, 이후 일본에서 귀국한 덕혜옹주 및 

의민태자 일가와 함께 창덕궁 낙선재에서 지내며 독서와 피아노 연주로 소일하였다.

죽는 그 순간까지 온화한 성정과 기품을 잃지 않았던 순정효황후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후로서,

당당함과 냉철함으로 황실을 이끌어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다.

평생 영어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그 실력은 타임지를 읽어낼 정도였다고 전한다.

사후

1966년 2월 13일, 경기도 양주군 미금면 금곡리(현재의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유릉(裕陵)에 순종과

합장되었다.

말년에 애용하던 토스터와 커피 포트를 관에 부장품으로 넣었다. [2] 시호는 헌 의자인순정효황후

(獻懿慈仁純貞孝皇后)이며 전주이 씨 대동종약원에서 올린 사시(私諡)이다.

윤택영(尹澤榮, 1876년 음력 2월 22일 ~ 1935년 10월 24일)은

 조선의 문신이자 정치인이며 대한제국의 관료, 일제강점기의 조선 귀족이었다. 대한제국 순종의 장인이다.

조선의 마지막 부원군이나 정작 사위인 순종보다는 두 살 어렸다. 순정효황후의 친정아버지이자

 윤덕영의 동생이며 본관은 해평이다.

일제강점기에 조선계 귀족이었으나 막대한 채무로 실작하기도 했다. 윤택영은 친일 귀족이었으나

그의 아들 윤홍섭은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다.

한옥마을에 관광객을 위해 한복을 대여한 것 같다

저 문들을 다 들어 올려 방과 마루가 한 공간이 되게 했다

 해풍부원군 윤택영댁 재실(구 정구엽 가): 순종의 장인 해풍부원군 윤택영이 그의 딸 윤비가 동궁의 계비로

책봉되어 창덕궁에 들어갈 때 지은 집이다. 제기동에 있던 것을 이전하였으며, 가옥전체 분위기는

살림집이라기보다는 재실용도에 걸맞게 되어 있다. 

민 씨가옥 안채

관훈동 민씨 가옥

이 집은 민영휘(閔泳徽,1852~1935)의 저택 가운데 일부로, 그는 관훈동 일대 너른 땅에다 집을 여러 채 짓고

일가붙이와 함께 살았는데, 옛 터의 위치는 종로구 관훈동 30-1번지였다.

원래 집터에는 안채와 사랑채 외에도 별당채와 대문간채, 행랑채 같은 집채가 있었다고 전하나 나중에

소유자가 바뀌면서 안채와 여기에 연결된 중문 간 채만 남기고 모두혈렸었으며, 1998년 남아있던 안채를 옮겨

지으면서 철거되었던 건넌방 쪽을 되살렸고, 사랑채와 별당채를 새로 지은 것이다. 

사랑채 뒤로 안채와 별당채를 구성하였으며 담과 문으로 적절하게 공간을 나누어 배치하였으며,

보통 서울지방 안채는 안방 앞쪽에 부엌을 둬서 ‘ᄀ자형’으로 꺾어 배치하는 편인데, 이 집은 드물게

부엌과 안방을 나란히 놓은 것이 특징이다. 이 밖에도 고주 두 개를 세워 짠 넓고 큰 목조구조와

여섯 칸에 달하는 부엌의 규모, 그리고 마루 밑에 뚫려있는 벽돌 통기구 등은 당시 일반 가옥과 다른

최상류 층 주택의 면모를 확연하게 보여주고 있다.

민 씨 가옥 사랑채

안채

오위장 김춘영 가옥(구 김홍기 가) 

조선조 말기 오위장(군대 하급장교)을 지낸 김춘영이 1890년대 지은 집으로, 종로구 삼청동에 있던 것을

옮겨다 놓았다. 홑처마로 꾸미는 등 전체적으로 서민 주택의 양식을 보이고 있으나 안방의 뒤쪽 벽,

즉 길가 부분에 화방벽을 쌓아 집의 격조를 더 높인 것이 특징이다.

사랑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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