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 꽃박람회장을 둘러보고 장발산역에서 3호선을 타고 종로3가역에서 갈아타고
종로 5가역으로 가야 되는데 약속시간이 아직 2시간이나 남았다
창덕궁으로 갈까 했지만 시간상으로 맞지 않는다
익선동 한옥마을이나 한바퀴 돌아보고 가자(4/29)
익선동(益善洞)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2·3·4가 동의 중앙에 위치한 법정동이다.
북쪽으로 운니동, 남쪽으로 돈의동, 서쪽으로 낙원동, 동쪽으로 와룡동, 묘동과 접한다.
인근에 삼일대로와 돈화문로, 지하철 종로3가역이 있어 교통이 편리하며, 관내에 종로 1·2·3·4 가동
주민센터와 '우리 소리 도서관' 등의 시설이 있다. 2020년 인구는 1천 명 안팎이다.
익선동은 1920년대부터 지어진 한옥단지가 유명하며, 서울특별시에서 가장 오래된 한옥 집단 지구 중 하나로
남아 있다. 일제 강점기에는 판소리를 공연하는 여자 명창들을 비롯하여 많은 예술인이 살았고, 해방 이후에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공존하였다. 한때 요정 관광이 성행하였다가 쇠락한 익선동은 20세기 후반부터는
성소수자들의 보금자리가 된 곳이기도 하고, 2010년대 중반부터는 관광 명소가 된 동네이기도 하다.
2010년대 후반부터 젠트리피케이션을 겪으면서 동네 모습이 급격히 바뀌고 있으며 지역만의 고유한 정체성을
잃어간다는 지적을 받고 있기도 하다. 위키백과에서
지명 유래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개편 때 익선동이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하였다.
당시 경성부 중부 정선방(貞善坊) 돈녕계(敦寧契) 궁동(宮洞), 익동(益洞), 돈녕동(敦寧洞), 니동(泥洞) 일부,
한동(漢洞) 일부를 합쳤으므로 정선방의 ‘선’과 익동의 ‘익’을 따 익선동이라 하였다.
익동은 누동궁의 익랑(翼廊, 좌우의 행랑)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누동궁은 ‘줄행랑’이라 불리는 긴 행랑이
유명하여 주변 지역을 익랑골(翼廊―)이라 불렀으며, 익랑골이 익동으로 줄어든 것이다
조선 시대
익선동에는 돈녕부(敦寧府)와 누동궁(樓洞宮)이 있었다.
돈녕부는 종친부에 속하지 않는 왕의 친족을 관리하던 부서였다.
누동궁은 전계대원군의 사손(嗣孫)들이 살던 집이었다.
누동궁 자리에 있던 집에서 철종이 태어났으며, 철종은 왕에 즉위한 뒤 자신의 옛 집터에 집을 지어
형 영평군 이경응이 살도록 하였다.
그 집이 바로 누동궁이다. 누동궁 안에는 전계대원군, 완양부대부인 최 씨, 용성부대부인 염 씨 등
셋을 모신 사당인 전계궁(全溪宮)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1914년에 일제는 경성부에서 기존의 동을 해체·병합하여 새로운 정(町)과 동으로 개편하였다
1921년경에는 익선동 중앙을 동서로 관통하는 삼일대로30길이 개설되었다.
이 무렵에는 민영찬도 익선동에 살고 있었다. 완화군의 옛 사저, 일명 완화궁(完和宮)도 익선동에
있었는데, 이곳에는 반도여자학원(半島女子學院)이라는 교육 시설이 들어섰다.
해방 후 20세기
익선동 거주자의 증언에 따르면, 삼일대로30길 북쪽에는 명망 있는 사람들이, 익선동 166번지 일대에는
서민들이 주로 살았고, 그 남쪽에는 서민들이 찾는 유흥가가 있었다는 것이 익선동의 1960~70년대 풍경이다.
요정도 익선동 곳곳에 자리하였는데, 1969년 12월 당시 서울특별시에서 가장 세금을 많이 내던 오진암
(월 123만 원), 옥류장(월 102만 원), 대하가 모두 익선동에 있었을 정도였다.
이 가운데 오진암(梧珍庵)은 1900년대 초에 건립된 700평 규모의 한옥에 1953년경 들어선 요정으로,
1972년에 이후락과 박성철이 7·4 남북 공동 성명을 논의하고, 정재계 인사들이 자주 찾는 등 삼청각,
대원각과 함께 1970-80년대 요정정치의 산실로 유명하였다.
전성기에는 종업원과 하루 손님이 각각 70-80명에이를였다.이를였다.
이러한 요정 문화의 영향으로 지금까지 익선동에는 한복집과 점집이 남아 있다.
그러나 1980년대부터 부유층은 강남으로 이주하고, 서민들은 자식들이 출가하면서 익선동에는 노년층이
주로 남았다. 집들 사이에는 종로 3가 대로변의 귀금속 거리에 납품하는 세공 공방, 예단 등을 납품하는
한복 바느질 공방 등이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익선동을 포함한 돈화문 주변 지역에 권번에 속한 기생들이 살았다.
현계옥, 김녹주(金綠珠), 김남수(金南洙), 박록주 등 남도 출신 기생들이 소속된 한남권번(漢南券番)의
기생들은 판소리와 창극을 연행하면서 여성 판소리 연행자들을 길러냈다.
장악원의 후신이자 국립국악원의 전신인 이왕직 아악부는 1926년부터 익선동 인근의 운니동에 있었고
아악부의 일소당(佾韶堂)에서 국악 공연이 열렸기 때문에, 명인들은 좁은 골목 사이로 빽빽한 집 안에서
방음이 되지 않아 한여름에도 겨울 이불을 뒤집어쓰고 판소리를 연습하였다고 전해진다.
해방 이후, 익선동에는 국악을 전승하고 공연하는 일패기생들과 밀매음을 하던 이패기생(은근짜隱君子)들이
살았다. 1953년에都園) 등의 요정과 지금도 남아 있는
한정식집 송암(淞庵) 등이 익선동에 자리 잡았다.
익선동의 요정은 1970년대 초반에 들어 관광요정 문화가 활성화되면서 전성기를 맞았다.
일본인 관광객들이 자주 찾던 오진암은 1972년 10월에 외국인을 접객할 수 있는 관광요정 12곳으로
지정되었으며, 국악인들이 공연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국악의 흔적은 지금도 남아 있는데, 명창 임방울의
손녀 임향 님은 익선동에 판소리연구소를 차렸으며 익선동으로 이전한 종로 1·2·3·4 가동 주민센터의
4~5층에는 2017년 12월 14일에 구립 우리 소리도서관이 개관하였다.
1990년대에 들어 해외 관광 수요 증가, 금융실명제 실시, 대체재인 룸살롱의 등장과 성업 등의 영향으로
요정 문화는 쇠락하였으나, 관광객들은 이제 인근의 북촌이나 서촌처럼 상업화되지 않고 ‘사람 사는 골목’의
느낌을 자아내는 익선동에 주목하였다.
이 점에 착안하여 익선동 마을 안쪽에 처음으로 외지인이 연 가게는 ‘뜰안’이라는 전통찻집으로, 뜰안의
사장은 “(2009년 1월에) 찻집 문을 열 때 이곳엔 아무도 없었다”라고 증언하였다.
뜰안은 한일 합작 영화 《카페 서울》(2010)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타케 마사하루(武正晴) 감독은 익선동의
한옥 골목, 한국의 떡과 일본의 찹쌀떡 사이의 유사성 등에 모티브를 얻어 영화를 찍게 되었다고 한다.
아이돌 그룹 UN의 김정훈이 주연이었던 영화를 따라 많은 일본인 관광객들이 뜰안을 찾았으며, 이들은
극 중 ‘모란당’이라는 떡집으로 등장하는 뜰안에 사진과 편지, 선물 등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 밖에도 뜰안은 건축이나 역사를 배우는 사람들이 종종 찾기도 하고, 익선동의 가치를 발견하고 공부하는
주민들이 모이는 사랑방 같은 곳이었다. 2014년 초까지 익선동에 외지인이 차린 가게는 뜰안 외에는 없었다.
2014년 말부터 카페 ‘식물’ 가맥집 ‘거북이슈퍼’ 등 청년 예술가와 창업가들의 가게가 생겨나고, SNS를 통하여
알려지면서 익선동은 상업화되기 시작하였다. 2016년 2월 다큐멘터리 3일에 방영되면서 본격적으로 알려진
익선동에는 이후 2016년부터 2019년까지 한옥의 모습을 유지하면서 리모델링한 오락실, 만화가게, 경양식점,
개화기 풍의 옷을 빌려주는 가게 등이 들어섰으며, 불과 몇 년 만에 고즈넉한 분위기를 잃게 되었다.
마침 2010년대 후반부터 복고풍에 현대적 감성을 더한 ‘뉴트로’ 열풍이 20-30대 사이에서 불면서, 익선동은
을지로, 홍대 등과 함께 점차 뉴트로의 중심지로 알려졌다.
익선동의 상업화와 상권 확대는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격년마다 발표하는 한국 관광 100선
(2019~2020)에 익선동이 드는 결과를 낳았지만, 이와 함께 젠트리피케이션 문제도 초래하였다.
2017년에 국토연구원은 6년 동안 익선동 일대의 임대료가 4배 상승하였고, 특히 2017년의 경우 전년 대비
50%가 상승하였다면서, 익선동은 젠트리피케이션의 4단계 중 임대료가 오르고 상업화가 심화되는 3단계에
해당한다고 진단하였다. 위키백과에
한옥
2018년 1월 현재 익선동에는 119동의 한옥이 있고, 그중 37동이 거주용이다.
구역별로 나누어 보면, 삼일대로30길 이북의 익선동 33번지 일대는 2006년에 169동 중 87동이,
2014년에 159동 중 53동이 한옥으로 조사되었고, 그 이남인 익선동 166번지 일대는 2006년에
248동 중 200동이, 2014년에 243동 중 181동이 한옥으로 조사되어 감소하는 추세이다.
익선동에서 한옥마을로 널리 알려진 곳은 166번지이다.
누동궁이었던 166번지(2,574평)는 이해승의 소유였는데, 1920년 12월 9일에 166-2번지(2,574평)로
분할되면서 박영효 외 2인으로 소유주가 바뀌었고, 1929년 9월 30일에 166-5번지(2,428.9평)로
분할되면서 창덕궁으로 소유주가 변동되었다.
1929년 9월의 필지 분할 및 소유권 이전 과정에서 지가에 약 7천 원의 차익이 발생하여 이해승은
빚을 갚는 데에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골목은 식당. 카페. 기념품점. 양품점. 소품점 등 많은 가게가 있으면 주로 젊은이들이
월요일인데도 북적북적 비켜가기도 어렵다
지역의 변화에 따라 유동인구의 변화도 있었다.
2013년에 익선동을 찾던 이들은 소수로, 우연한 방문이 대부분이었다.
2014~15년 사이에는 전에 익선동을 방문한 적이 있는 사람, 지인의 소개나 인터넷을 통하여 익선동을
알게 된 사람이 주로 이곳의 가게를 찾았다.
이때만 하여도 익선동은 아직 고즈넉한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었지만 익선동을 자주 찾던 이들은 이미
익선동의 변화를 느꼈으며 2015년 12월에 11시에서 14시 사이의 평균 유동인구는 3만여 명에
달할 만큼 늘어났다
건물 외형만 한옥을 유지하고 내부에는 상업시설 입주를 위해 개조한 곳이 많다.
이 한옥들의 리모델링이 전통 한옥의 건축 양식과 현대 건축 양식의 조화를 통해 이뤄졌다면 더 호평을
받았겠지만 대부분은 사업을 하기 편한 구조로 마구잡이 리모델링이 이뤄진 곳이 많다.
더구나 지붕만 한옥의 기와지붕이고 벽체부터는 근대의 건축 양식을 따른 곳이 많다.
2016~17년 사이에는 익선동을 기존에 알았던 사람보다 새롭게 알게 된 사람의 방문이 크게 늘었고,
2018~19년 사이에는 유동인구가 더욱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과거와 같이 익선동을 산책할 수 없게
되었을 만큼 붐비게 되었다. 주민들은 젠트리피케이션의 초기 단계에 익선동이 ‘새로운 돌파구’를
맞게 되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하였지만, 관광객이 점점 늘고 한옥을 개조하는 소음과 분진이
나면서 이러한 변화를 달갑지 않게 여기고 있다.
상인들은 처음에는 유동인구의 증가에 따라 익선동에 다양한 감성을 지닌 매장이 생긴 것을 긍정적으로
여겼지만, 원활한 서비스를 위하여 늘린 직원에 대한 인건비와 전보다 상승한 임대료를 충당하고자 물가가
오르고, 유동인구만을 노리고 진입한 후속 상인들이 매출을 나누어 가지면서, 빠르게 구경만 하고 빠져나가는
유동인구가 늘었다고 한다
어삐뽀레는 아이스크림 빵 커피 전문점이다
대낮이지만 밤 같은 분위기다
커피 테이크아웃 같은데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우리나라가 커피왕국이 되었다
북촌한옥마을이나 서촌한옥마을 등 고궁과 연결된 다른 한옥 밀집지역은 한복 차림으로 오가는 관광객이
많지만 익선동은 2010년대 후반에 익선동 개발업체가 들어서서 상권을 개발할 당시 뉴트로 붐을 타고
개화기 경성 콘셉트의 상점을 많이 만들어서 이쪽에 관심을 가지고 오는 관광객들이 많다.
이 영향인지 익선동 내 가게 이름 중에는 유독 서울의 일제강점기 시절 지명인 경성(京城)이라는 이름을
가진 곳이 많으며, 개화기풍 의류 대여점이 몇몇 들어서서 일제강점기 초기에 유행한 양장 차림으로
다니는 이들이 꽤 있다.
요즘 젊은이들도 사주. 관상을 많이 보는 것 같다 이곳 익선동에도 그런 집들이 보인다
해운대에도 전철역에서 백사장까지 가는 길에 수도 없이 많던데 과학문명이 발달해도
오히려 더 늘어나는 것 같다
한옥과 한옥 사이의 거리가 매우 좁은 골목 동네인 탓에 자가용으로 익선동을 찾는 사람은 주차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게 된다. 차를 댈 수 있는 식당이나 카페는 아예 없다고 봐야 하며 그나마 낙원상가와 인접한
외곽 지역의 상점은 주차가 가능하지만 이 역시 공간이 매우 협소하다
이렇게 잠시 익선동 한옥 골목길을 걸어보고 종로5가역 7번 출구 광장시장
약속장소로 이동 백두회원들과 만나 빈대떡 집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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