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1급 박물관인 무후사(武侯祠) 대문에 한소열묘(漢昭烈廟) 편액이 걸려있다.
유비 사당인 한소열묘가 앞에 있고 일직선으로 제갈량 사당인 무후사와 삼의묘(三義廟)가 배치돼 있다.
왼쪽 유비 무덤인 혜릉(惠陵)까지 하나의 관광지로 묶여 있다.
그야말로 군주와 신하가 합체된 모습이다. 지금의 골격은 명나라 홍무제 시대인 1391년 형성됐다.
화재와 중건을 여러 차례 거쳤고 1984년에 무후사박물관으로 통합했다.
주변의 문화 거리와 호수, 숲까지 15만㎡ 규모다.
주차장에서 무후사 가는 길
무후사
중국에서 유일하게 주군과 신하가 함께 모셔진 사당으로, 소설 <삼국지> 마니아에게는 성지로 통한다.
원래 이곳은 223년에 사망한 유비의 묘로, 정문에는 유비의 시호인 한 소 열제(漢昭烈帝)를 따서 ‘
한소열묘(漢昭烈庙)’라고 적힌 편액이 걸려 있다. 하지만 보통은 ‘한소열묘’ 대신에 ‘무후사’라고 부르는데,
이는 무향후(武鄕候) 제갈량을 모신 사당이란 뜻이다. 주군인 유비를 제치고 제갈공명의 사당으로 더 알려져
있는 것으로 볼 때 쓰촨에서는 제갈공명의 인기가 유비보다 더 높은 듯하다
삼절비(三绝碑)
제갈량의 공덕을 칭송하는 비석으로 정식 명칭은 ‘촉한승상제갈무후사당비(蜀漢承相諸葛武候祠堂碑)’이다.
809년 당나라 때 헌종(憲宗)이 세운 이 비석은 문장, 서예, 석각 모두 당대 최고의 명인이 참여하여 완성한
것으로 예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
지금의 무후사는 전형적인 사합원 양식으로 청나라 강희제 때(1672년) 중건된 것이다.
2008년에 국가 1급 박물관으로 지정되면서 규모가 더욱 커져, 총 15만㎡에 이른다.
경내는 삼국 역사 유적구(三国历史遗迹区), 진리민속구(锦里民俗区), 삼국 문화 체험구(三国文化体验区)로
나뉘어져 있다. 핵심 구역은 삼국 역사 유적구로, 정문에서부터 삼절비(三绝碑) - 이문(二门) - 유비전(刘备殿)
- 과청(过厅) - 제갈량전(诸葛亮殿) - 혜릉(惠陵) 순서로 관람한다.
그 시절 참가했전 장수들
이문을 넘어서면 양쪽에 긴 복도가 있다. 오른쪽에 문신, 왼쪽에 무장이 도열해 있다.
삼국지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이다. 수장인 방통과 함께 앉은 간 옹을 비롯해 문신이 14명, 조운을 필두로
요화와 황충을 비롯해 무장이 14명이다. 모두 28명이 전투라도 벌일 기세로 앉아 있다.
청나라 시대 무대극 복장으로 치장하고 있는데 치적을 기록한 비석이 하나씩 놓였다.
삼국지에 나오는 그 장비다
촉한의 대장. 자는 익덕[翼德: 익덕(益德)임]이며, 탁 군[涿郡: 지금의 허베이 성 탁주(涿州)] 사람. 동한 말
유비를 따라 군사를 일으켰는데 날래고 용맹하였으며, 유비와 환란을 같이하여 깊이 의지했다.
유비전(刘备殿)
‘소열사(昭烈司)’라고도 한다. 이문(二门)을 통과하면 사당 정중앙에 황금으로 치장된 유비의 상이 한눈에
들어온다. 동쪽 편전에는 관우 부자와 주창(周仓)의 상이 있고, 서쪽 편전에는 장비와 그 아들, 손자의 상이 있다.
또한 양쪽으로 이어진 복도 중에서 동쪽 복도에는 촉한의 문신들, 서쪽에는 무장들의 상이 늘어서 있어 흥미롭다.
유비의 손자 심
인명. 촉한 후주 유선(劉禪)의 다섯째 아들. 북지왕(北地王)에 봉해졌다.
촉 염흥(炎興) 원년(263), 위나라의 대장 등에가 군사를 이끌고 성도(成都)로 들어오자 유선은 투항을 결정한다.
유심이 간하여 막았으나 소용이 없자 처와 아들을 죽이고는 소열묘(昭烈廟: 유비의 사당)로 가서 곡하며 조상께
고한 다음, 스스로 목을 찔러 죽는다
과청(过厅)
‘무후사(武候祠)’라고 적힌 현판에 주목하자. 중국의 저명한 극작가이자 사학자였던 궈모뤄(郭沫若)의 필체다.
과청에는 <삼국지>와 연관된 자료들이 전시되고 있는데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제갈량의 출사표(出師表)이다.
위나라 정벌을 결심한 제갈량이 촉한의 2대 황제 유선에게 바친 글로, 이곳에 전시된 출사표의 초서 필체는
명나라 때 청두의 문인 백린(白麟)이 쓴 것이다. 한때 악비(岳飛)의 친필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는데,
이는 백린이 술에 취해 글을 쓰다가 자신의 이름이 아닌 악비의 이름을 적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쓰촨 성(四川省) 성도(成都)는 춘추전국시대 유비가 세운 촉한(蜀漢)의 수도로 삼국지의 무대였으며
익주(益州)라 불렸던 곳이다.
성도(成都)에 있는 무후사(武候祠)는 유비의 군사(軍師)이며 대 전략가였던 제갈량(諸葛亮)의 혼백을
모시는 사당(祠堂)으로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도원결의(桃園結義)로 초야(草野)에서 일어나 천신만고 촉한제국(蜀漢帝國)의 기틀을 세우고
제위(帝位)에 오른 유비(劉備)를 비롯하여, 관우(關羽), 장비(張飛) 등 촉한의 모든 장군과 제후들을
함께 모시고 있기도 하다.
무후사(武候祠)라는 이름은 제갈량의 시호(諡號)인 충무 후(忠武候)에서 비롯되는데 경내에는
유비(劉備/漢昭烈皇帝)의 시신(屍身)을 모셔와 안치한 혜릉(惠陵)도 있다.
5칸 크기인 본전은 정원당(靜遠堂)이다. 제갈량이 아들에게 남긴 계자서(誡子書)가 출처다.
마음이 깨끗해야 뜻을 세울 수 있고 마음이 편안해야 포부를 이룰 수 있다는 ‘담박명지(澹泊明志)
영정치원(寧靜致遠)’에서 따왔다.
불감 안에 앉은 제갈량은 청나라 강희제 시대인 1672년에 제작됐다.
깃털 우산을 들고 두건을 두르고 도포 입은 유학자 모습이다.
시동 둘이 병서와 보검을 들고 있고 벽에는 아들인 제갈첨과 손자 제갈상이 보좌하고 있다.
제갈량전(诸葛亮殿)
정전 중앙에 제갈량과 그 아들, 손자의 상이 모셔져 있다.
제갈량의 상 앞에는 그가 남방을 정벌할 때 사용했던 3개의 구리 북이 놓여 있다.
‘제갈고(诸葛鼓)’라고 불리는 이 북은 원래 남방 소수 민족의 악기인데, 당시 쓰촨 지방에서
민족 간의 문화 교류가 있었음을 알려 주는 사료로서 각별한 의미가 있다.
제갈첨
인명. 촉한의 대신. 자는 사원(思遠)이며 낭야(瑯琊) 양도[陽都: 지금의 산동성 기남(沂南) 남쪽]
사람. 제갈량의 아들. 나이 17세에 후주의 딸과 결혼하여 부마도위(駙馬都尉) 1)가 되었고
관직이 행군호위장군(行軍護衛將軍) 2)에 이르렀다. 촉 염흥(炎興) 원년(263) 위나라 대장
등에가 음평(陰平) 샛길을 통하여 촉을 공격하자, 그는 군사를 이끌고 면죽(綿竹)에서 저항한다.
등애가 편지를 보내어 항복하면 조정에 표를 올려 낭야왕(瑯琊王)으로 봉하겠다고 하자,
그는 크게 노하며 거절한다. 곧바로 등에와 싸움이 붙었으나 면죽(綿竹)에서 포위를 당하고,
포위를 돌파하다 전사한다.
제갈상
인명. 제갈량의 손자이자 제갈첨의 장남. 촉 염흥(炎興) 원년(263) 위의 대장 등에가 음평(陰平) 샛길을 통하여
촉을 공격하자, 그는 제갈첨을 따라 면죽(綿竹)에서 등에를 저지했다. 이때 선봉을 맡아 싸우다 패하여 전사한다
삼국지에 보면 조조(曹操)가 한(漢) 왕조의 헌제(獻帝)를 폐하고 스스로 위(魏) 나라의 황제를 칭하자
제갈량의 권유로 유비도 촉한(蜀漢)의 황제로 즉위하는데 유비가 한(漢) 왕실의 정통성을 이은
후손이므로 황제로 존칭 하지 않고 선주(先主)로 불렀다.
유비는 자(字)가 현덕(玄德), 사후 시호(諡號)가 소열제(昭烈帝)이며, 아들 유선(劉禪)이 제위(帝位)를
이어받아 후주(後主)라 불렀는데 후주 유선(劉禪)은 군사(軍師) 제갈량(諸葛亮)이 죽자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즉위 40년 만에 한(漢)의 조조(曹操)에게 나라를 바친다.
삼의묘(도원결의를 했던 유비 관우 장비의 사당)
삼의묘가 뒤쪽에 있다. 청나라 강희제 시대 쓰촨 제독 정교린이 처음 세웠다.
무장은 도원결의와 같은 의협심과 영웅을 좋아하는 듯하다.
진흙으로 빚은 유비, 관우, 장비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약 3㎞ 떨어진 곳에 위치했는데 1998년 무후사박물관 안으로 옮겨왔다.
관우와 장비가 함께 나란하다. 동고동락했는데 유비는 2.8m이고 둘은 2.6m로 만들었다.
아무래도 황제 프리미엄이 붙은 듯하다. 하기야 함께 죽자는 맹세도 지키지 못했는데 말이다.
삼의묘 내부
영웅이 대거 등장하여 흐름에 역행하는 시대 원대한 야망과 바다 건너 영웅적 자긍심 삶의 지혜와
아름다움을 지닌 개인들은 별들의 찬란한 빛 아래서 자극적인 삶의 이상을 펼치고 중원에서 경쟁하며
분단과 통일의 질서를 낳고 격동의 시대를 재건하다 역사의 강물 속에서 유비와 제갈량이 현세에서
만나 가족과 나라의 염원을 맞게 되었다 왕은 지혜로우며 신하는 선하고 서로의 충성심과 성실함이
위태로울 때도 믿음과 충성심으로 서로의지하고 도와주었다고 한다
쓰촨 성을 그 시절에는 익주(益州)라 했다
그 시대의 유물
삼고초려
유비가 제갈량을 세 번 찾아가 진심으로 감동시켜 한 왕조 회복이라는 큰 사명을 맡겼다
제길량의 어린 시절
삼국지 동호 군함 모델
소주는 해군을 바탕으로 설립됐고 조선산업도 발달했다
당시 우창에서 건조된 가장 큰 배인 페이윤. 가이하이는
높이가 5층으로 3천 명의 병력을 태울 수 있었다
이 작품은 삼국시대 군함모형을 모방한 작품이다
장무 3년(223년) 유비가 죽으면서 제갈량에게 당부의 말을 하고 있는 모습
건흥 6년(228) 제갈량이 제1차 북방원정에서 강유는 조위 천수현의 참모장교로 복무했다
현현은 장웨이가 적에게 항복하려 한다고 의심하고 그를 성문에서 쫓아내어 제갈량에게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건흥 6년 마제는 제갈량의 지시를 어기고 위 장군 장합에 의해 거리정자를 파괴하였다
제갈량은 군벌에 따라마수를 참수한 뒤 가정자비를 써서 3급으로 강등됐다는 내용이다
청학원
수석과 분재로 꾸며진 정원이다
유비묘(刘备墓)
제갈량전 서쪽에는 붉은 담벼락 위로 대나무가 무성한 곳이 있다.
유비와 그의 두 부인이 합장된 12m 높이의 잡목만 무성한 혜릉이다.
무덤 위에 무성하게 가지를 뻗은 나무들이 인상적이다.
유비묘를 돌아본 후에는 왔던 길을 되돌아 나오지 말고, 동쪽에 연결된
진리 민속구(锦里民俗区)로 향한다.
유비는 한날한시에 죽기로 도원에서 결의한 두 아우(關羽/張飛)들이 먼저 죽자 제갈량의 만류에도
무릅쓰고전쟁을 강행하다 쓰촨 성 양쯔강안(揚子江岸) 펑제현(奉節縣)의 백제성
(白帝城/永安)에서 제갈량에게아들(劉禪/後主)을 부탁하며 63세로 숨을 거둔다.
무후사 한쪽, 제법 큼직하게 세워진 유비의 무덤 ‘한 소열황제지릉(漢昭烈皇帝之陵/惠陵)’은
무성한 잡목들만 멋대로 자라고 있어 인생의 무상함을 말하고 있다.
제갈량(諸葛亮)의 자(字)는 공명(孔明), 별호는 와룡(臥龍) 혹은 복룡(伏龍)이라고 하는데 삼국지
(三國志)에서는귀신도 부리고 천지조화(天地造化)도 마음대로 바꾸며 앞일을
예측하는 등, 신(神)의 경지를 넘나드는 뛰어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한고금리
무후사 박물관의 한 부분으로, 명나라 말기 또는 청나라 초기의 풍경을 재현해 놓은 민속 거리가 펼쳐진다.
550m 길이의 골목을 따라 전통 양식의 건축물이 즐비하다. 여행자에게는 청두 최고의 쇼핑가이자
먹자 거리로 인기가 많다. 물들인 찹쌀가루로 즉석에서 만드는 인형인 몐런(面人), 점토 인형인 니런(泥人),
중국 전통의 종이 공예인 젠즈(剪纸)와 설탕 공예를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곳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것은 쓰촨의 명물 분식들이다.
무후사에서 진리로 통하는 문으로 나오면 곧바로 분식 거리에 들어선다.
청두의 분식은 저렴하고 다양할 뿐 아니라 한 끼 식사로 손색이 없다.
또 다른 골목에는 분위기 좋은 찻집과 바가 모여 있다.
뉘엿뉘엿 해가 지면 골목을 따라 홍등을 환하게 밝혀 더욱 운치 있다.
이렇게 여행을 마치고 다음날 아침 8시 30분 비행기로 인천공항으로 향한다
To Fall In Love Again / Jessica Simps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