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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왕가의계곡(파라오들의 묘지)

에드푸 신전에서 룩소르로 가는데 버스로 약 2시간 반 정도 걸린다

이동하는 중 만난 오아시스 같은 마을 사막만 보다 이러한 푸른 모습을 보면 반거운 생각이

먼저 든다

투탕카멘의 무덤과 네파타리의 무덤 들어가는데 현지에서는 우리 돈으로 13만 원 정도인 것 같은데

여행사 옵션은 무려 185유로 약 30만 원 정도가 된다

우리는 투타카멘 무덤과 네파타리 무덤은  들어가지 않고 일반티켓으로 입장하는 3곳만 들어갔다

람세스 3세 묘

람세스 3세의 무덤 구조는 일직선으로 된 암굴이다. 지하로 내려가면서 통로 형식으로 이어지고

중간에 기둥 홀, 곁방, 부속실 등을 지나 매장실에 이른다. 매장실을 지나도 여러 개의 방들이 있다.

긴 통로와 기둥 홀 등 공간의 벽과 천장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주로 태양신 '라'와 파라오, 문의

서(The book of gate), 대지의 서(The book of the Earth), 사자의 서(The book of Dead),

천체도와 부장품에 대한 것들이다.

람세스 3세는 약 31년의 재위 기간을 가진 파라오다 고대 이집트의 국력과 번영이 최고치에 달았던

람세스 2세 시대 다음의 파라오로써 초반에는 람세스 2세가 다진 국력으로

나라 운영에 별로 큰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바다 민족들의 침략으로 국력이

점차 약해지며 나라가 서서히 쇠퇴하는 모습이었지만 람세스 3세는 이를 부정하며 모른척했다고 한다.

왕가의 계곡을 건설하는 노동자들의 파업과 나일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침략에도 크게 힘을 쓰지

못했다고 한다. 점점 몰락의 길을 걷는 분위기였고 게다가 람세스 3세는 암살까지 당했다고 한다.

​람세스 4세를 후계자로 선택했지만, 그것에 앙심을 품은 3명의 아내 중 한 명이

주변인들과 함께 암살 계획을 세우고람세스 3세를 암살하게 된다.

​결국 주변인들은 모두 처형당하게 되고, 주변인 중 귀족들은 자살을 허락받게 되었다고 한다.

 

목 뒤쪽에 날카로운 것에 찔려 식도가 드러나고 발가락이 잘린 상태로 발견된 람세스 3세는

그렇게 31년의 파라오를 마무리하게 된다. 그가 계획한 대로 람세스 4세가

다음 파라오가 되었다고 한다.

아누비스

재칼의 머리를 지닌 인간의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고왕국의 초기 왕조시대에 아누비스는 죽음의 신으로 독점적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으나, 뒤에는 오시리스에게 밀려났다.

그의 주된 관심은 장례식과 시체의 보호였다.

그는 시체에 향을 넣어 부패를 막는 기술의 발명자로 알려졌으며, 오시리스의 시체에 처음으로

이 기술을 썼다고 한다. 그 뒤에는 '영혼의 안내자' 역할을 맡았고, 그리스·로마 세계에서는 가끔

그리스 신화의 헤르메스와 합성되어 헤르마누비스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오시리스신 아누비스신

아누비스는 무덤을 보호하는 망자신이며 동시에 미라도 보호를 한다

오시리스 - 네프티스 전승에 따르면 네프티스는 오시리스를 남몰래 사랑해서 오시리스를 만취시킨

다음 자신을 오시리스의 아내인 이시스로 속여서 관계를 가졌고, 그래서 아누비스가 태어났다.

이후 네프티스가 자신의 남편이자 오시리스의 동생 세트에게 목숨을 위협받는 걸 두려워한 네프티스는

이시스에게 사실을 털어놓았고, 이시스는 네프티스를 용서하며 이 모이자 계모인 이시스가 키워줬다고 한다.

 

오시리스가 죽었다가 다시 부활했을 때, 그의 유해를 수습해 최초로 미라를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그 뒤 아누비스가 맡은 일은 오시리스가 있는 저승에서 죽은 자의 영혼을 심판하는 것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진실의 날개와 죽은 자의 심장의 무게(이집트인들은 인간의 혼이 심장에 머무른다고

여겼다)를 천칭으로 비교하여 죽은 자의 혼이 깨끗한지 더러운지의 여부를 판가름한다.

이때 더러운 혼으로 가득한 심장은 아래로 떨어져 거대한 괴수인 암무트에게 먹힌다.

이와 같은 역할 때문에 사자의 서에 실린 삽화를 보면 거의 항상 심장의 무게를 재고 있는 모습으로

나온다.

신에게 공물을 바치는 벽화

세트나 크트(Sethnakth) 왕의 아들로 이집트 신왕국 20 왕조의 두 번째 왕이다.

해상민족의 침입을 물리치고 리비아 인들의 침공을 막아냈다.

마디나트 하부 신전을 완공했으며 카르낙 신전을 재건축했다.

궁중의 음모로 인해 암살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나 확실한 증거는 남아 있지 않다.

사후세계로 가는 배를 타고 이동하는 모습

신왕국 말기에는 국가의 재정이 고갈되는 바람에 무덤 노동자들에게 임금 체불이 일상화되었고 그동안의

후한 대우에 익숙해 있던 노동자들은 화나서 무덤을 털어버렸다. 나중에는 아예 몰래 무덤 입구와 도구로를

동시에 만드는 상황까지 벌어졌고 장례식이 끝나면 도구로를 열어서 전부 털었다고 한다.

게다가 이런 일은 파라오뿐만이 아니라 왕비, 왕족, 귀족, 평민들까지 가리지를 않았다.

심지어 어느 귀족의 경우 장례식을 하는 동안에 몰래 침입해서 보석으로 치장한 데스마스크를 털어가는

사례도 있었고 람세스 3세의 왕비 이시스의 경우에는 무덤 노동자들이 몰래 뒤에 굴을 파고 털어버리는

사례도 있었다. 당연하지만 값비싼 부장품들이 시중에 공공연히 유통되면서 그로 인한 인플레이션

일어났고 이집트 경제는 더욱 나락으로 추락하는 악순환이 여전했다

사실 이런 심각한 사실은 그 당시에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고 제20 왕조 말기의 파라오 람세스 9세 때

대대적으로 조사를 했다.

제11 왕조부터 제20왕조의 무덤 16개를 조사했으나, 그중에 제18왕조 2번째 파라오 아멘호테프 1세의

무덤과 11왕조 인테프 2세의 무덤을 제외하면 모두 털렸다는 결과가 나왔다.

 

사실 당시에는 사제들과 귀족, 도굴꾼이 한패가 되기도 하고 심지어는 재정이 부족해진 21 왕조 파라오들은

선왕조의 무덤을 털어 재정을 보충하는 등 막장이었다.

예를 들면 21왕조 파라오 프수센네스 1세의 무덤에서는 람세스 9세의 반지와 19 왕조 파라오 메르넵타

관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이전 왕조의 무덤을 털어 재정은 물론 부장품으로 재활용했다는 좋은 증거이자 일례다.

관과 미라가 있던 자리

람세스 9세 묘

람세스 9세는 이집트 왕국 20 왕조 제8대 파라오(기원전 1129~1111년 재위)로 18년간 왕국을

통치하였으나, 이 시기는 이미 20 왕조의 국운이 기울어가고 있는 형국이었다.

그렇다 보니 이때 무덤의 도굴이 가장 성행하였다고 한다.

결국 새로운 왕조인 제21왕조(기원전 1070년 경)에 들어서서야 파라오의 명을 받은 '아문 대신관'이

부장품이 모두 도굴당한 왕가의 무덤에서 미라를 수습하여 자기가 사용하려고 만든 가족묘에 미라들을

모아 다시 안치했다. 왕가의 무덤에서 수습한 미라들을 한 곳에 모아 안전하게 관리하려고 했던 모양이다.

그로부터 3000여 년이 지난 후, 람세스 9세의 미라는 1898년 '데이르 엘 바하리'에 위치한 암굴 무덤

(TT320)에서 발견되었다. 이 장소는 다음에 가보려고 하는 '하트셉수트 장제전' 근처라고 한다.

람세스 9세의 미라는 현재 카이로 '문명 박물관' 지하 전시실에 20여 구의 다른 미라들과 함께 전시되어 있다

 

이집트 신왕국 제20 왕조의 8대 파라오. 제20 왕조에서 람세스 3세람세스 11세 다음으로 오랫동안

재위한 군주다. 대략 18년 4개월 정도 고대 이집트를 통치했고, 그의 통치기 내내 이집트는 끝없는

추락의 길을 걸었다.

람세스 9세의 시대에 터진 가장 유명한 사건이라면 아마 왕릉 도굴 사건일 것이다.

그가 재위한 지 16년쯤 되는 해에 테베의 왕가의 계곡에 있는 왕릉들의 도굴 여부를 조사했는데, 거의

대부분이 깡그리 털려나간 상태로 발견되면서 당시 이집트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불러일으켰던 것.

선대 파라오였던 람세스 6세의 무덤은 지어지고 나서 20년도 안 돼서 도굴당한 것으로 판명 났고, 그

를 제외한 나머지 왕릉들도 대부분이 부장품이 도굴당해 처참한 상태였다고 한다.

어느 정도 도굴꾼들의 심각성은 인지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인지는 몰랐던 람세스 9세와 신하들은 경악했다.

당연히 제 무덤도 털릴 것을 우려한 람세스 9세는 인근 지방의 총독들을 시켜 무덤들을 잘 간수하라고

명했지만 별다른 효과는 없던 것으로 보인다.

무덤들에는 음각한 부조가 모두 채색이 되어 있는 것이 신전의 부조와 다른 점이다

저곳에 미라가 안치되어 있던 곳 도굴꾼들이 도굴해 가고 어떤 세월을 맞았는지

람세스 9세의 미라는 갈비뼈, 목뼈가 완전히 부러졌고, 코 부분은 아예 사라진 채

발견되었다고 한다.

무덤이라 그런지 사후 세계로 가는 듯한 부조들이 무척 많다

람세스 4세 묘

이집트 신왕국 제20 왕조의 3대 파라오.

고대 이집트의 본격적인 몰락이 시작된 시대를 다스렸던 비운의 군주였다.

바다 민족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최후의 위대한 파라오'라 불렸던 아버지 람세스 3세가 죽은 이후

이집트는 바다 민족과의 전쟁에서 지출된 전비가 자연재해로 인하여 붕괴된 경제로 인해 빠른 속도로

쇠퇴했고, 람세스 4세는 이를 막을 힘이 없었다. 그나마 람세스 4세까지는 대규모 건축물들을 건설할

만한 국력이 남아있었지만, 람세스 4세가 죽고 난 후부터는 그마저도 하지 못하는 상황으로 전락하게 된다.

짧은 6년의 재위 기간을 가진 파라오 람세스 4세의 무덤이다.

짧은 재위 기간 동안 이미 쇠퇴해진 나라를 다시 되살릴 수는 없었다고 한다.

람세스 4세의 미라는 현재 이집트 문명박물관에 안치되어 있다.

그가 람세스 3세의 뒤를 이어 파라오로 즉위했을 무렵 람세스 4세는 고작 21세에 불과했다.

아직 젊었기에 혈기가 넘쳤던 람세스 4세는 즉위하자마자 옛 람세스 2세 대왕 시절에 버금갈만한 규모의

건축 프로젝트들을 연달아 발주했다. 왕가의 계곡에 일하는 인부들의 규모를 2배로 늘렸고, 수 백 명에

달하는 원정대를 파견해 시나이 반도의 터키석 광산을 찾게 하는 등 여러 정책들을 펼쳤다.

재위 3년 되는 해에는 총 8,368명의 초대형 탐험대를 꾸려 채석장 부지를 선정하거나 건축물을 지을

만한 장소를 물색하도록 시키기까지 했다.

람세스 4세가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것들 중에 카르나크 신전의 콘서 사원과 장제전 확장 공사 등이 있었다.

그 외에도 시나이 반도의 와디 하마마트와 세라비트 엘-카딤에 하토르 신전을 짓고 오벨리스크들을 연달아

세우기도 했다.

천정의 천궁도

하늘의 신인 누트와 대지의 신인 겐트가 세상을 떠 바치고 있는 그림이라고 한다

석관

사 후세게로 건너가는 배라고 한다

왕가의 계곡은

이집트 남부 룩소르, 즉 과거 테베의 나일 강 서쪽 편에 위치한 거대한 무덤군. 작은 구덩이부터 거대한

대무덤까지 총 65개의 무덤들이 이 계곡 안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당시 고대 이집트인들이 부르던 공식적인 명칭은 '서부 테베 파라오의 위대하고 장엄한 묘지, 수백만 년의

삶, 힘 및 건강'이다.

과거 고대 이집트 고왕국중왕국 파라오의 묘역인 피라미드가 도굴을 안 당한 경우가 없을 정도로 도굴과

훼손이 심해 미라의 안전을 절대 보장할 수 없는 데다가, 수많은 인력과 재원이 낭비되고 오랫동안 혼란기로

피라미드를 짓지 않아 건설기술까지 실전되자 신왕국 때 파라오들을 장사 지내기 위해 새로 조성한

비밀 묘역이다.

왕가의 계곡을 선정한 가장 큰 이유는 도굴꾼들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룩소르 반대편인 나일 강 서안지대에 왕가의 계곡이 있지만 얼핏 보기에는 아무것도 없는 계곡처럼

보인다. 이는 앞서 말했듯이 지상에 노출되는 구조물을 건설하면 도굴꾼에게 털리므로 계곡에 굴을 파서

묘실을 만든 다음에 파라오의 장례가 끝나면 입구를 봉인해서 위치를 누구도 알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 외에 이곳의 엘쿠른(El-Qurn) 산꼭대기가 피라미드형이라 당시 기준의 명당이라는 점, 나일강에서 멀리

떨어져 범람으로 훼손될 위험이 없고 사암지대라 터널식 석굴이 유지가 가능하다는 점도 여기에 비밀묘역을

조성하는 데 영향을 줬다고 한다.

건설시기는 대략 기원전 1500년에서 기원전 1000년으로 대략 500여 년간 이용되었다.

신왕조 제18왕조의 제3대 파라오 투트모세 1세가 왕가의 계곡에 파라오로서 최초로, 제20 왕조의 

람세스 10세가 마지막으로 묻혔다. 제20 왕조의 마지막 파라오인 람세스 11세가 마지막으로 무덤을

조성하긴 했으나 미완성으로 남았고 미라도 안치되지 않았다.

다만 주인을 알 수 없는 KV39가 있어서 아직까지 확정된 것은 아니다. [6] 그리고 KV39는 말 그대로

왕가의 계곡(Kings Valley) 39호 무덤이라는 의미로 일괄적으로 매긴 번호를 말한다.

왕가의 계곡은 서쪽과 동쪽으로 구분하는데 동쪽에 대부분의 무덤이 있다.

다만 서쪽의 무덤은 따로 WV로 매기기도 한다.

그리고, 파라오의 묘역이라고 하지만 왕비왕자공주를 비롯한 왕족들과 왕이 총애하던 신하들은

물론 심지어 왕들의 애완동물들도 묻혔다.

동물까지 묻힌 이유는 이집트 신화에서 악어원숭이고양이 등 동물은 신들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제19왕조 이후로는 파라오를 제외하면 왕비, 왕자, 공주들은 인근 왕비들의

계곡에 묻히기도 했다.

파라오의 업적을 상형문자로 기록을 하였다는데 우리로서는 알 수가 없다

코뿌리신이 날개로 왕부부를 보호하고 있는 장면 같다

파라오가 아문신에게 사 후세게에 든다고 신고를 하고 봉헌하는 모습이라 한다

My Way / Frank Sinat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