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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광주.제주

미백 이청준 생가

강진 청자박물관을 가면서 부근에 있는 이청준선생의 생가를 먼저 들려본다

운전하며 바라보니 마치 삼척의 솔섬 같이 아름다운 섬이라서 줌인해서 담아보지만 

비가 내리고 날씨가 흐리니 이 정도밖에 담을 수가 없다 

장흥에 가서 글 자랑하지 말라’는 얘기가 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의 한승원, ‘녹두장군’의 송기숙, ‘생의 이면’의 이승우 등 한국 현대문학 역사에

길이 남을 많은 문인들을 배출한 곳이 장흥이기 때문이다.

연작소설집 ‘남도사람’의 단편이자 임권택 감독의 영화로도 유명한 ‘서편제’의 작가 이청준도 장흥 출신.

그의 작품 ‘선학동 나그네’는 임 감독의 100번째 영화 ‘천년학’으로 날아올랐고, 영화 ‘밀양’도 이청준의

‘벌레이야기’가 원작이다.

이청준 소설문학길을 따라 작가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남도사람의 ‘서편제’ ‘소리의 빛’ ‘선학동 나그네’ ‘새와 나무’ ‘다시 태어나는 말’의 배경을 따라 걷는 길은

장흥군 회진면 진목리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회령진성∼천년학세트장∼선학동마을∼공지산능선길∼

이청준생가∼이청준묘소(이청준 문학자리)의 8km 코스로 걸어서 3시간 50분 거리라고 한다.

회진 회령진

임진왜란 당시 억울한 누명을 쓰고 투옥됐다가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장군은 칠전량 해전을 지휘한 

원균이 전사하자 삼군수군통제사로 다시 제수되어 바로 이곳 회령진에서 공식취임 칠전량 해전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배설은 크게 파손된 군선 12척을 이끌고 이곳 회령진으로 피신했다

이순신은 이곳에서 배설이 이끌고 온 군선 12척을 재정비해서 명량대첩을 이끌었다

문학길은 겨울이기도 하지만 비가 내리고 있어 그리 호감이 가지 않는다

봄이면 선학동마을에는 유채꽃이 흐트러지게 핀다고 한다

천년학 촬영지 

천년학 세트장은 전남장흥군 회진면 천년학길 60 선학동마을 진입로바닷가에 위치해 있으며 

이청준작가의 소설 선학동나그네를 원작으로 한 영화 천년학은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영화이며

1993년 크게 흥행했던 서편제의 후편이라고 한다

장흥선학동 해안가를 배경으로 소리꾼 아버지와 눈먼 딸 이복동생의 이야기를 통해 소리로 승화된

정과 한으로 그려낸 천년학은 소리를 타고 한없이 날아오르는 남녀의 애절한 사랑과 그리움을 

서정적으로 평 쳐진 작품이다

 

천년학은 가슴 아픈 사람도 눈이 먼 슬픔도 소리에 담아낸 여자 주인공 송화 그리고 그녀를

사랑해 북을 배우고 그녀의 발자취를 따라간 남자 동호의 아름답고 깊은 사랑이야기다

이청준(李淸俊, 1939 ~ 2008)
 1939년 장흥의 회진면(구 대덕면)에서 부친 이남석 씨와 모친 김금례 씨의 아들로 태어나 초등학교

시절부터 이 동네에서 모범생이자 수재로 유명한 아이였다.
 중학교를 광주로 가면서 이곳을 떠나 서울대 독문과를 나와서 작가가 되었다 한다.
 1965년 "사상계"에 단편 '퇴원'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고, 1968년 '병신과 머저리'로 제12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하였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리기보다는 관념적으로 형상화하는 데 적절한 기법과 역량을 보여 주었다.
 1979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쓴  <서편제> <눈길> <축제> 등은 이 마을이 배경을 이루고 있다.

이청준은 머리가 좋아 광주서중 광주일고 서울대학등 명문학교만 다녔는데 지독한 가난으로 

가정교사를 하며 어렵게 공부를 했다 

이청준작가 생가 (기와집이었는데 옛 모습으로 초가로 변모를 했다)

선학동 마을에서 차로 4분 거리에 이청준 생가가 남아있다.

아주 작은 방에는 작가의 사진과 유물이 놓여 그의 삶을 고스란히 전한다. 애잔한 사연도 전해진다.

어미는 아들을 광주의 고등학교로 보낸 뒤 형편이 어려워지자 아들 몰래 집을 팔았다.

어느 날 아들이 집에 온다고 하자 새 주인에게 사정해 어미가 그대로 살고 있는 것처럼 꾸며 아들을

하룻밤 재웠단다.

2008년 타계한 작가는 진목리 갯나들에 안장됐고 바로 옆엔 이청준문학자리가 조성됐다.

호를 미백이라 한 사연

일찍 머리가 센 이청준이 노모에게 절 할때마다 '절하지 말고 그냥 앉거라.

에미보다 머리가 센 자식 절을 받으려니 민망스러 못 당할 꼴이다.

고 했는데 미백은 머리가 아무리 셌더라도 노모 앞에선 아직 센 머리가 아니다,

절대로 세어서는 안 되는 머리라는 뜻이다.

 

1948년 대덕동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학령보다 3년이 늦었다.

해방 직후여서 행정구역도 엉망이었고, 이리저리 학교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인가가 나지 않은 학교를 포함하여 8군데를 다녔다고 한다.

공부를 아주 잘해서 '천재'로 불렸으며. 선생님의 지시로 동급생은 물론이고 상급생도 가르치곤 했다.

저학년때부터 형이 남긴 소설을 읽고, 형이 책에 남긴 메모를 보며 정신적 교류를 했다.

매일 보리밭에서 연을 날리며 허기를 잊었다. 

상급학교에 진학할 경제적 형편이 되지 않았으나, 6학년 담임이던 이종남 선생과 교장 선생님의

도움으로 광주에서 시험을 보고 광주서중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리고 1950년 가을, 6.25 발발 후 전깃깃불 체험을 한다.

친구들과 대학 1년 겨울방학 때 면소재지 사진관에서 마을친구들과 찍은 사진 

고향집 골목의 배꽃을 생각하며

새가 운들 

분재이야기 

여름의 추상

잃어버린 절

조선일보의 아침논단에 

축제와 서편제 이야기 

게 자루 이야기 

젊어서도 참으로 잘 생겼다 

선학동나그네 줄거리

역시 소리꾼 부녀의 의붓아들이자 의붓오라비인 사내가 의붓여동생을 찾아 장흥 근처인 선학동으로 온다.

그리고는 주막에 하룻밤을 묵으면서 주막집주인으로부터 한 여인에 관한 옛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

어린 시절 서로 안면이 있었음직한 주막집주인과 사내는 서로 모르는 체하는 속에서, 30여 년 전 소리꾼과

그의 딸 (그리고 끝내는 그 사내가 그 소리꾼의 아들로 함께 했다는 것도 밝혀지게 된다.) 이곳에 머무르며

소리를 들려준 이야기를 나눈다.


그 소리꾼은 포구에 물이 차 오르고 선학동 뒷산 관음봉이 물을 타고 한 마리 비상학으로 모습을 떠올리기

시작할 때면 그 비상 학을 벗 삼아 소리를 시작하곤 하였는데, 그것은 눈이 멀어 앞을 못 보는 어린 딸아이의

소리에 선학이 떠오르는 이곳의 풍정을 심어주려는 것이었다. 딸의 소리가 훨씬 도도하고 장중해졌을 때

소리꾼은 딸과 주막을 떠났고, 오랜 세월이 흘러 사람들이 그들을 까마득하게 잊고 있을 즈음 눈먼

그 여자가 다시 찾아들었다. 이제 포구는 막혀버려 더 이상 학의 모습을 드리울 물이 없는데도 그 여자는

소리를 통해서 비상하는 학의 모습을 보면서 한을 푼다. 그리고는 학이 날아가는 형국의 명당 터에 아버지의

유골을 묻어 소원을 풀어드리고는 마을을 떠난다.


마음으로 학의 존재를 믿는 주막집주인은 사내가 그 여자의 의붓오라비임을 알고 아비 무덤을 찾아보라는

권유를 하지만, 다 부질없는 짓이라는 말만 남기고 선학동을 떠난다. 염화미소를 지으며 살아있는

부처처럼 말이다.

 

남경자여사가 가난한 글쟁이와 살면서 마음고생 엄청 했을 것 같다 친구들이 참극성스러웠나 보다

이렇게 작은 방에는 여러 이야기들이 있는데 글씨가 너무 작아서 옮기기가 어렵다

장독대를 봐도 무척 가난하게 살았던 흔적이 보인다

 

봄을 기다리는 비밀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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