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걷기 겸 금정산에 얼레지를 보려고 나선 길이었는데 경 동아차트를 내려오면서 보니
벚꽃이 알아볼만큼 피어 있어 전철 타고 집에 오면서 교대역에서 내려 온천천으로 가본다(3/28)
의외로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아직 꽃은 만개를 하지 않았는데 성금 한 축제다
원동에 매화축제도 꽃이 없는 축제라했는데 여기도 비슷한 현상이다
축제장은 역시나 먹거리 장터가 가장 인기가 있는 것 같다 부스마다 많은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잇는 모습이 보인다
집에가서 점심을 먹으려고 했는데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새마을 부녀회에서
운영하는 부스에 들어가 막걸리에 부추전 시켜서 점심을 해결을 하고 꽃구경에 나선다
이렇게 만개한 나무들도 있지만 거의 반정도 꽃이 피어 있다
동래성을 재현해 놓은 모습이다
연제구 쪽에는 축제장이 형성돼 있어 동래 쪽 길을 걷다 보니 축제장의 여러 행사는
볼 수가 없다 별로 관심도 없고 오늘 내목표의 곱빼기로 걸었더니 피곤하여 집으로 가고 싶다
꽃복숭아가 백색과 분홍이 피어 있다
꽃복숭아
노랑수선화 흰 수선화도 만나고
미니수선화인지 제주 수선화인지 작은 수선화도 보이고
온천천에는 여러 종류의 동백이 보인다
화려한 벚꽃나무들 만개에 가까운 나무들도 많이 보인다
동아시아 지역에 분포하는 높이 약 20m로 자라는 나무로 4~5월에 벚꽃을 피우고 6~7월에
열매(버찌)가 열린다. 넓은 의미로는 벚나무아속 벚나무절에 속한 나무들을 통틀어서 이르지만,
좁은 의미로는 벚나무절에 속한 종 중 '벚나무(Prunus jamasakura)'를 가리킨다.
조팝나무
자생력이 아주 뛰어나다. 팔만대장경판의 반 이상이 벚나무 재질임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껍질도 매우 질겨서 조선 시대에는 주력 무기인 각궁을 만들 때 벚나무 껍질로 겉면을 감아 마무리를
했고, 또한 김구의 백범일지에도 "함경도에선 초가 대신 벚나무 껍질로 지붕을 만드는데, 한 번 뿌리를
내리면 여간해선 벗겨지지 않는 탁월한 응집력에 김구가 감탄했다"는 일화가 있다.
공해에도 강하여 자동차의 매연 등 공해가 심한 도심의 가로수로 심기도 한다.
위에 썼듯이 목재로써 아주 우수하다. 결이 아름답고 매우 단단하여 가구나 식기로 만들어 썼다.
잘 마른 상태에서는 웬만한 가정용 톱으로는 잘 잘리지 않고, 옹이에 걸리면 대패 이가 빠질 만큼 단단하다.
목재의 향이 좋아서 바비큐 훈연 목재로 최상이다. 다른 장미나무속이나 벚나무속 과실나무들도
수명이 짧은 것으로 오해하곤 하지만, 화엄사 올벚나무는 400년을 살았고, 일본에는 천 년이 넘는
나무 자체는 튼튼하고 상처를 입히기도 어렵지만 한번 상처가 나면 취약하다. 가지를 꺾으면 노출된
봄철에 피는 벚꽃이 풍성하고 아름다워 봄 계절의 상징으로 꼽힌다.
가을에도 단풍이 풍성하게 들어서 가을 길거리 정취를 만드는 주요 역할을 한다.
유채
광대나물
벚나무를 한자로 櫻(앵)이라고 쓰는데 이 한자는 앵두나무를 지칭하기도 한다.
앵두나무와 벚나무가 같은 것은 아니지만 서로 비슷하다.
생물학적으로 같은 벚나무 속에 속해서 서로 사촌 관계다.
즉, 한자 櫻자는 '벚나무 속'의 나무인 벚나무와 앵두나무를 통틀어서 뜻하는 한자이다.
벚꽃과 벚나무, 벚꽃나무라는 용어가 혼용해서 쓰이지만 벚꽃나무는 비표준어이며 벚꽃과 벚나무도
구별하여 사용해야 한다. 요약하자면, 벚나무에 피는 꽃이 벚꽃이고, 벚꽃이 피는 나무는 벚나무이다.
현재 나무위키 문서부터가 벚'나무'를 쓸 자리에 벚'꽃'을 사용하는 등 문제가 많다.
올바르게 사용하도록 하자.
벚나무도 여러 아종이 있는데, 이중 가장 독특한 종은 수양벚나무이다.
보통 벚나무는 가지가 위로 뻗는 경향을 가진 보통의 나무 모양인 것에 비해 수양벚나무는 버드나무처럼
긴 가지가 축축 처져서 자란다. 잘 자란 수양벚나무는 사람 키보다 더 가지 끝이 내려가기 때문에
개화기에 얼굴 가까이서 벚꽃을 즐길 수 있다는 게 매력이다. 그래서인지 일본에서는 한국보다
수양벚나무를 더 흔하게 볼 수 있다. 서울에서는 국립서울현충원이 수양벚나무로 유명하고,
선유도공원과 덕수궁에 가면 군데군데 볼 수 있다. 대구광역시에 있는 욱수천 상류에서는 흐르는 하천과
어우러지는 수양벚나무를 감상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이 조선시대까지 벚나무를 심은 이유는 대부분 벚나무의 목재를 활용하는 실용적인 용도
때문이었으며 특히 벚나무의 껍질인 화피(樺皮)는 활을 만드는데 중요한 재료라서 국가적으로도
함부로 유통을 하지 못하게 막았다. 일제강점기 시절 벚꽃축제가 최초로 개최된 서울 우이동의
벚나무 숲 역시 활을 만들기 위한 재료 수급용으로 조선시대 중후반에 만들어졌다는 설이 유력하다.
경성의 벚꽃 내역(京城の櫻の來歷)’
경성에 사쿠라가 이식된 최초는 1907년 도쿄에서 3년생 묘목 1,500본을 가져와 남산 왜성대 공원에
500본을, 나머지는 각지에 나누어 심게 된 때부터이다.
다음 해인 1908년과 1909년에 걸쳐 오사카 부근의 소메이요시노 2년생을 창경원에 300수 심었다.
왜성대의 벚꽃은 1914년에 가장 번성하여 하루에 10만에 달 하는 인파가 몰려든 적이 있을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으나 그 후 점차 나무들이 고사하여 그 명성이 창경원으로 옮겨갔다
일단 한반도에서 벚꽃축제가 개최된 것은 1910년대 초반, 서울 우이동 지역이 최초였다.
우이동의 벚나무 숲은 본래 조선시대에 활을 만들기 위한 재료로 심어진 것이며 조선시대에 우이동
벚나무 숲에서 집단적으로 꽃놀이가 수행된 적은 없다.
그러던 것이 『매일신보』 1915년 5월 7일 자에는 우이동 벚꽃 명소에 대해 “우이동의 벚꽃은 3년 전
일본인이 처음 발견한 이후부터 앵화의 명승지로 경성 내외에 이름이 널리 났다.
고 소개한 것으로 보아 일본인들에 의하여 대략 일제강점기인 1912년 정도부터 최초로 벚꽃놀이가
개시된 것이다.
당시 매일신보에 따르면 도심에서 떨어진 자연적으로 벚꽃이 군집한 곳에 다수의 사람들이 여러 교통수단을
통해 운집해 특별한 인공설비 없이 주로 벚꽃을 중심으로 주간에 음악과 술과 놀이를 곁들여 봄을 즐겼다고
한다.
한일병탄 이후 일제는 지배의 안정을 위해 조선 주민의 정치적 요구를 압살 한 대신에 관제문화를
조성해 순응시키려 했으며 벚꽃축제는 그 수단 중 하나였다. 조선총독부는 기관지인 매일신보를
통하여 벚꽃축제에 참여할 것을 장려하였고 이를 위하여 임시 관앵(觀櫻) 열차를 운행하는 등
정책적으로 적극 협조하였다. 당시 경성의 벚꽃 명소로는 우이동 외에도 가오리(오늘날의 수유동,
가오리역 참조)도 있었다.
하지만 우이동은 도심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외곽이었고 그 규모도 당시 폭증하던 벚꽃놀이 수요를
충족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또한 당시 조선으로 이주하던 일본인(재조일본인)은 벚꽃을
일본의 상징으로 간주하여 조선에서도 하나미를 즐기면서 향수병을 달래려 했으나 막상 조선에는
벚꽃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하나미를 위한 일본산 벚나무의 식재를 꾸준히 관계당국에 요구하였다.
창경원에 벚나무가 처음 심어진 것은 1908년부터 1909년에 걸쳐 일본으로부터 이식된 소메이요시노
(染井吉野) 벚나무 300그루 정도였는데 이는 순종대부터였다.
이 무렵 순종은 덕수궁에서 나와 창경궁으로 거처를 옮겼는데(1908년 11월) 부친(고종)과 떨어져 살게
되어 매우 우울해했다고 한다. 당시 대한제국에는 ‘정미 7 조약’에 따라 각 부처에 일본인 차관을 두고
있었고 궁내부 차관으로는 고미야 미호마쓰(小宮三保松·1859~1935)가 임명되어 있었는데 이완용,
이윤용 형제로부터 순종의 근황을 들은 고미야 미호마 쓰는 창경궁에 동물원과 식물원, 박물관을
조성하여 소일거리를 하면서 우울감을 달래라고 권하였던 것이 시초였다. 그리고 이 시기에 벚나무가
창경궁에 식재되었고 이후 창경궁은 창경원으로 바뀌었다.
다른 자료에 따르면 궁궐에 벚나무가 식재된 것은 창경궁이 동ㆍ식물원으로 조성되어 창경원으로 격하된
1909년 개원 이후라고 한다. 벚나무 식재과정은 개원부터 폐원까지 창경원의 원장을 지냈던 시모코리야마
세이이치(下群山誠一)가 1938년 조선일보와의 인터뷰(1938년 3월 26일) 내용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창경원 개원 당시 일본 내지(內地)에서 온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내 지식 정원을 만들자고 제안하여
벚나무 2백 주를 심었다고 하였다. 그 후 해마다 종류와 수량을 늘려서 1938년 현재 창경원 벚나무 2천 주는
30년 수령이 대부분이라고 하였다.
일제는 1918년부터 창경원에서 벚꽃놀이를 개시하였고 일부 특권층과 일본인들이 한적한 야간에
창경원에서 음주를 즐기며 밤벚꽃놀이를 즐기다가 문제가 되자 이를 일반에도 개방하자는 여론이 일어
1924년에는 야간 개원을 하여 밤벚꽃놀이까지 시작되었다.
일본인 거주 지역을 비롯하여 사직단과 효창묘(孝昌墓)처럼 조선왕조와 관련된 공간, 신규 조성된
근대공원, 신사 주변에도 대량으로 식재되어 경성의 벚나무는 빠른 속도로 증가하였다.
1910년에는 남산공원의 성격을 부각하는 목적으로 식재하였고, 1919년에는 장충단, 1926년에는
사직단에 100여 주를 심었다.
이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는데, 1911년 3월에는 목포 송도의 신사 경내에 벚나무 100주를 식재하였으며
1915년 이천신사의 사전 개축 시 아까시 숲을 벌목하고 벚나무를 대량 식재했다.
이처럼 1907년 일본에서 묘목으로 도입된 벚나무는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경성의 각 공간과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튜립
루피너스(루핀스)
스완리버데이지
마가렛`
에덴플랜트 데이지
Endless Love (영원한 사랑 OST) / Lionel Richie & Diana R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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