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찍은 사진은 아니지만 제2관문도 지나기 전에 많은 사진으로 다 차버려서 이렇게 나누어 올리게 되었네요
휘리릭 가는 것보다 조금 꼼꼼하게 살펴보고 하나라도 더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입니다(4/27)
소원탑
옆지기왈 소원탑에 돌이라도 하나 올리려고 돌을 찾으니 하나도 없다고
조령 산불됴심 표석
표석의 설치연대는 정확하지는 않으나 대체적으로 주선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원추형 화강암 자연석에 음각된 순수 한글 비석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길목에 산불 예방과 주흘산의 자연에 대해 중요성을 널리 알리고자
세운 것으로 보인다 현재국내에 고어로 된 한글비석은 모두 4점이나 조령 산불됴심 표석을
제외하곤 모두 국한문 혼용으로 되어 있어 국내 유일의 순수 한글 비석이라 할 수 있다
흰 배지빠귀
응암( 매바위 ) 폭포
이렇게 계단식으로 만든 인공폭포다
이렇게 높은 암벽을 지나면
또 다른 4단 인공폭포가 나온다
1708년에 조령산성을 쌓을 때 옛 성을 고쳐 쌓고, 중성(中城)을 삼아 이 관문을 조곡관이라 했다.
현재의 시설은 그 후 폐허가 된 것을 복원한 것이다.
조곡관 뒷면에는 영남제이관(嶺南第二關)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영남 제2관문 조곡관
이관문은 영남에서 서울로 통하는 가장 중요한 통로였던 문경조령의 중간에 위치한 제2관문으로
삼국시대에 축성되었다고 전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조선 선조 25년(1592) 왜란이 일어난 후에
충주사람 신충원이 이곳에 성을 쌓은 것이 시초가 되었다 숙종 34년(1708) 조령산성을 쌓을 때
배바위 북쪽에 있던 신충원이 쌓은 옛 성을 거쳐 쌓고 중성을 삼아 관문을 조동문이라 이름하였다
현재의 시설은 그 후 페허가 된 것을 복원한 것이다
문경새재 일원의 조류분포도
문경새재 옛길(과거길)
영남에서 한양을 다닐 수 있는 길은 조령(문경새재)과 죽령 및 추풍령을 경유하는 세 갈래길이 있었다
영남대로인 문경새재는 수많은 선비와 길손들이 왕래하였으며 문경의 옛 지명인 문희에서 드러나듯
기쁜 소식을 듣게 된다 하여 영남은 물론 호남의 선비들까지도 굳이 먼 길을 돌아 이 길을 택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 길이 유일하게 남아 있는 옛길이다
새재로 가는 길
산꿩은 꾹꾹 꾹 시냇물은 졸졸졸 봄비 맞으며 필마로 돌아오네
낯선 사람 만나서도 반가운 것은 그 말씨 정녕코 내 고향 사람일세
부봉
백두대간이 포암산과 하늘재를 지나 문경새재에 접어들면서 한가자를 뻗은 후 주흘산(1106m)을 또 한 가지를
뻗어 부봉 6개 봉우리를 남 들어 놓고 제3관문 (조령관)과 조령산을 지나 이화령까지 주능선을 이어 놓고 있다
6개 봉우리는 916m~933m의 암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아기자기한 등산로상에서 바라보는 백두대간 능선과
문경새재 계곡의 경관이 아름답다
우리나라는 이리랑이라는 노래가 각 지방마다 많이 전해 내려 오는데 이 노래는 문경지방에서 내려오는 아리랑이다
매화말발도리
작은 폭포도 만나고
귀뜰집
주로 산악지대에서 사용하던 한국식 통나무집으로 위에서 내려다보면 우물정자 모양이 되고
방틀집 말집 목채집 특목집 투방집 혹은 한정식집 이라고도 한다
귀뜰집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어 3세기 중국의 역사서인 삼국지 위지 동이전 진한조에 나무를
옆으로 쌓아 올려 집을 짓는데 모양은 감옥을 닮았다고 기록되어 있어 삼한시대에 많이 건축
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북시베리아 파미르고원 북유럽 아메리카 산악지대 등 세계적으로
많이 분포되어 있고 1970년대 말까지 화전민의 뀌뜰집이 문경새재 주흘산 등산로변에
남아 있으며 현재 울릉도 나리분지에 남아 있는 귀뜰집은 문화재로 남아 있다
오르다 보니 리기다소나무 같은데 마치 편백나무처럼 쭉쭉 뻗어 있다
이진터
임진년 (1592) 왜장 고니시 유끼 나가(소서행장)가 18.500명의 왜군을 이끌고 문경새재를 넘고자
진안리에서진을 치고 정탑 할 때 선조대왕의 명을 받은 신립장군이 농민 모병군 8.000명을
이끌고 대치하고자 제1진을제1관문 부근에 배치하고 제2진의 본부를 이곳에 설치하였다
그러나 신립장군은 새재에서 왜적을 막자는 김여물 부장 등 부하들의 극간을 무시하고
허수아비를 세워 초병으로 위장 후 충주달천(탄금대) 강변으로이동하여 배수진을 쳤으나
왜군초병이 조선초병 머리 위에 까마귀가 앉아 울고 가는 것을 보고 왜군이
새재를 넘었다고 한다
간혹 한 사람씩 내려올 뿐 아직 길은 한산하다 이곳이 해발 500m 지점이다
앞으로 100m 정도 경사길을 1.5km 오르면 제3문에 도착할 수가 있다
산괴불주머니
상처 난 소나무
V 모양의 이 상처는 일제말기(1943~1945)에 자원이 부족한 일본군이 한국인을 강제로 동원
에너지원인 연료로 사용하기 위하여 송진을 채취한 자국으로 8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상처는
아물지 않고 있다
이곳 산속에는 이제야 목련이 피어 있다
회색개똥지바뀌(맞는지 모르겠어요)
괭이눈?
낙동강발원지
세종실록 지리지 (1454년)에 의하면 낙동강은 그 근원이 셋인데 하나는 봉화현 북쪽 태백산 황지에서
나오고 하나는 문경현 북쪽 초점에서 나오며 하나는 순흥 소백산에서 나와서 물이 합하여 상주에
이르러 낙동강이 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문경 초점은 문경새재의 옛 지명으로써 낙동강과 한강의
분수령이며 낙동강의 역사적 발원지로서 의의가 매우 큰 곳이다
책바위
옛날 인근에 살던 큰 부자가 자식이 없어 걱정인지라 하늘에 지성을 들여 천신만고 끝에 아들을 얻었으나
자라면서 점점 몸이 허약해져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자 몸을 고치고자 유명하다는 문경의 도사에게 물었다
당신 집터를 둘러싼 돌담이 아들의 기운을 누르고 있으니 아들이 담을 직접 헐어 그 돌을 문경새재 책바위
뒤에 쌓아 놓고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올리라고 일렀다
이후 아들은 돌담을 헐고 삼 년에 걸쳐 돌을 책바위까지 나르니 어느새 몸이 튼튼해졌고 공부도 열심히 하여
결국 장원급제까지 하였다
그 후 이곳을 넘나들던 과거객들이 책바위 앞에서 소원을 빌면 장원급제를 한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나야 아직 힘든 줄 모르고 올라왔는데 옆지기는 몇 번을 쉬며 드디어 제3관문 조령관에 도착을 했다
많은 시비들이 있지만 두 개만 담았다
충북 쪽에서 바라본 조령관(제3관문)
백두대간의 조령산 고개를 넘는 새재는 예로부터 영남지방과 서울을 연결하는 관문이자 군사적 요새지이다.
새재라는 지명은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 새로 된 고개, 억새풀이 우거진 고개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새재는 산새가 높고 험준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문경새재에는 1 관문인 주흘관, 2 관문인 조곡관, 3 관문인 조령관 총 3개의 관문이 있다.
그중 3 관문은 새재 정상에 자리 잡고 있다. 북쪽에서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해 선조 때 공사를 시작하여 숙종 때
중창한 3 관문은 고려 초부터 조령이라 불리면서 중요한 교통로의 역할을 하였다. 문루는 1907년 훼손되어
불에 탔고, 홍예문과 누각, 좌우의 석성 135m는 1976년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충북연풍 쪽을 잠시 살펴보자
연풍새재비
과거의 길
시화연풍 길 이야기
연풍조령정
조령 안내문
백두대간 조령비
여기까지는 오손도손 잘 올라왔는데 충북 쪽에 잠깐 다녀올 테니 화장실에 다녀오던가 기다리라 했는데
잠시 내려갔다 올라왔더니 옆지기 어디로 사라지고 없다 내려갔나 하고 한참을 내려가도 보이지 않아
다시 올라와 전화를 해도 전화를 받지 않는다 갈만한 곳을 다 찾아봐도 없어 내려가며 올라오는 분들께
키 작은 여성 내려가는 것 보셨냐 했더니 봤다 해서 쏜살 같이 내려가니 저 아래에 가고 있다
올라올 때는 힘들어하더니 내려갈 때는 잘 내려간다.
어디 갈 때는 전화기를 가지고 다니라 해도 지독스럽게 말은 타지 않으니 내가 질 수밖에....
자주 알록제비꽃
바위굴과 새재우
옛날 갑작스러운 소낙비로 이 바위굴에 들어와 우연히 마나게게 된 두 남녀가 깊은 인연을 맺고 헤어진 후
처녀가 아이를 낳았는데 성장하며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놀림이 심하므로 어머니가 자초지종과 함께
아비의 엉덩이에 주먹만 한 검은 점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그 후 아이는 아버지를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던 중 어느 깊은 산골 주막에서 중년의 선비가 어허
그 빗줄기 마치 새재우 같구나 함으로 아이가 새재우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고 어머니와 같은 이야기를
함으로 부자기간임을 알게 되어 행복하게 살았다고 하며 지금도 청춘 남녀가 이곳에 들면 사랑과
인연이 더욱 깊어져 평생을 헤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천남성
개감수 (대극?) 맞는지요
부산지방에서 그렇게 찾아도 없더니 봉명산 출렁다리에서 만나고 여기서 또 여러 곳에서 만나게 된다
이름하여 구슬붕이다. 집단으로 피어 있었다
우리가 올라갈 때는 몇 사람 보일락 말락 하더니 내려올 때 보니 많이도 올라간다
좌측이 조령산이고 중앙에 제1관문 주흘관이다 우측은 주흘산이다
맑은 물이 흐르고 천변에는 수달래 대신 수철쭉이 대신하고 있다
아침 7시 반부터 12시까지 쉬엄쉬엄 4시간 반. 15km.24.000보를 걸었다
Olivier Toussaint - Eden Is A Magic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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