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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 훈몽재

고향 시제에 가면서 순창 쌍치 친적집에 들러 볼일을 보고 가면서 예전에도 이정표를 본 곳이기에

시간도 있고 해서 훈몽재에 들려보기로 한다(11/1)

훈몽재에 도착 앞에 비가 있어 살펴봤더니 백은울산김상렬선생송덕비다 

훈몽재(訓蒙齋)는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1510~1560]가 1548년(명종 3)에 순창 점암촌

백방산 자락에 지은 강학당이다

김인후(金麟厚, 1510년 ~ 1560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이다. 본관은 울산(蔚山)이며,

자는 후지(厚之), 호는 하서(河西) · 담재(湛齋),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문묘에 종사된 

해동 18현 중의 한 사람이다.

1510년(중종 5) 전라도 장성 대맥동에서 아버지 의릉참봉 김령과 어머니 옥천 조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고 시문에 뛰어난 자질을 보여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10살 때 모재 김안국에게 《소학》을 배웠다.

1528년(중종 23)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하고 1531년 사마시에 합격한 뒤, 1533년 성균관에서 퇴계 이황(李滉)을

만나 함께 학문을 닦았다. 1540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에 등용되었으며, 이듬해 호당(湖堂)에

들어가 사가독서하고, 홍문관저작이 되었다.

 

1543년 홍문관박사 겸 세자시강원설 서가 되어 세자를 보필하고 가르치는 직임을 맡았다. 6월에 홍문관 부수찬 겸

경연검토관으로 승진하여 차자를 올려 기묘사화 때 죽임을 당한 제현(諸賢)의 원한을 개진하여 문신으로서 본분을

수행하였다. 기묘명현의 신원 복원이 이루어지지 않자 그해 12월에 부모 봉양의 걸 양(乞養)을 청하여 옥과현감으로

나갔다.

 

1544년 중종이 승하하자, 이듬해 1545년 5월에 제술관(製述官)으로 서울에 올라왔다. 그사이 인종이 자주 환후가

있음을 보고 처방에 참여코자 하였으나 거절당하여 어버이 병을 들어 귀근을 청하여 임소로 돌아왔다. 7월에 인종이

갑자기 승하하고, 곧이어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병을 칭하여 사직하고 고향 장성으로 돌아가 후학 양성과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의 성리학 이론은 한국 유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당시 이항과 기대승 사이에 논란이 되었던 태극음양설에 대하여, 그는 이기(理氣)는 혼합되어 있으므로 태극이

음양을 떠나서 존재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도(道)와 기(器)의 구분은 분명하므로 태극과 음양은 일물(一物)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이항의 태극음양일물설(太極陰陽一物說)에 반대하고,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은

모두 그 동처(動處)를 두고 이른 말임을 주장함으로써 후일 기대승의 주정설(主情說) 형성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수양론에 있어서는 성경(誠敬)을 주된 목표로 삼았다. 노수신과 함께 숙흥야매 잠 해(夙興夜寐箴解)를 논한

내용을 보면, 마음이 일신을 주재한다는 노수신의 설을 비판하고, 마음이 일신을 주재하지만 기(氣)가 섞여서

마음을 밖으로 잃게 되면 주재자를 잃게 되므로, 경(敬)으로써 이를 바르게 해야 다시금 마음이 일신을 주재할 수

있게 된다는 주경설(主敬說)을 주장하였다. 천문·지리·의약·산수·율력 등에도 정통하였다.

 

시문에도 능해 10여 권의 시문집을 남겼으며, 도학에 관한 저술은 일실(逸失)되어 많이 전하지 않는다. 저서로는

《하서집》·《주역관상 편》·《서명사천도》·《백련초해》 등이 있다.

제자로는 변성온·기효간·조희문·양자징·정철·오건 등이 있으며, 기대승·김천일·박순 등도 문인을 자처했다.

사후 장성 필암서원에 배향되고, 문묘에 종사되었다.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

춘추관·관상감사에 추증되고, 김부자(金夫子)로 존숭 되었다. 위키백과에서

하서 김인후 선생을 기리기 위해서 지은 정자

훈몽재 고인돌 

훈몽재 양정관

양정관 현판

양정관 마루 

양정관창건기

양정관창건상량문

훈몽재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나, 5대손인 김 시서가 장성에서 이곳에 이사하여 선조 하서 김인후의 유업을

계승하고자 1680년경 원래의 터 인근에 자연당이라는 이름으로 복원하여 여러 명사들과 교유하였다.

자연당중건기

자연장중건살량문

훈몽재

훈몽재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하서 김인후는 1548년(명종 3) 봄 장성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처향(妻鄕)인 순창 점암촌

(鮎巖村)에 우거 하여 초당 훈몽재(訓蒙齋)를 짓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유유히 속세를 벗어난 생각을 가졌다.

점암은 수석이 절승 하며 강 언덕에 반반한 바위가 있어 능히 수십 인이 앉을 만하였는데, 이곳에서 제자월계

조희문, 고암 양자징, 영응 이지남등과 더불어 《대학》을 강론하였는데 세상이 대학암(大學巖)이라 일컫는다.

훗날 송강 정철이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하여자 친구필로 『大學巖』이라 써서 바위에 각자 하였다고 한다.

또 상류에는 낙덕암(樂德巖)이 있는데 이곳 역시 하서 김인후가 쉬고 노닐며 강송(講誦)하던 곳이다.

이와 같이 하서 김인후는 자연에 귀의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체념한 체 시와 술을 벗 삼아 유유자적 세월을 보냈는

데 마음은 오히려 태평스러웠다. 이러한 마음을 표현한 시(詩)가 『자연가』이다.

청산도 절로 절로, 녹수도 절로 절로.
산도 절로 물도 절로 하니, 산수간 나도 절로.
아마도 절로 삼긴 인생이라, 절로 절로 늙사오리.

식당

 

타인의계절/한경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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