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관광후 휴게소에 들리니 장뇌삼 재배지에 안내 10년산 20년산 선전이다
용정으로 가는도중에 화룡시가 보인다
용문교를지나면서 차창으로 바라본 해란강 일송정은 멀리서 아스라이 보이는데
달리는 차창으로 사진을찍을수가없다 도로사정이 나빠 흔들려서 아래 보충설명을
빌려와 올리니 참고하시길
용정중학교 전신 대성중학교 건물이 낡아 출입을 금해 밖에서 사진만 찍었다
용정중학교 현교사
체육시간에 졸업사진을 찍는지 선생님 지도하에 촬영준비를하고있다
들어가보질 못했지만 생활관이 아닌가 싶다
연변 자치주답게 한글과 중국글로 병행한 간판들
또다른 다리에서본 해란강
상점들이 너무 한가하다
오늘밤 메뉴는 불고기다 뭐든지 추가는 돈을 지불해야된다
연길시내 번화가의 야경 변두리는 전기불도없고 고요하기만하다
중심부에는 통강이 흐르고있다
4편은 아래지도에서 보듯이 연길시에서 용정시로 이동하면서 우리의 가곡 "선구자"로 널리 알려진 일송정과 용문교
그리고 해란강, 용두레 우물 등을 관람하고, 민족시인 "윤동주"시인이 다녔다는 "용정중학교"를 관람한 이야기로 꾸며진다..
중국 길림성(吉林省) 용정시(?井市)를
찾아서...
연길에서 버스를 타고 30여분을 달리면 해란강이 흐르는 항일독립의 요람인 용정시에 닿을 수 있다.
이곳은 한국의 역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특히 민족시인으로 알려진
윤동주가 중학교를 이곳에서 다녔고,
박경리의 대하소설인 토지(土地)에 나오는 배경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용정은 1백년 전에 개척되기 시작했는데, 1880년 초까지는
황량한 원시림지대로 해란강 유역에 아름다리 나무가 울창했고
갈대와 가시덤불이 그득했며 온갖 맹수가 살았다고 한다. 1883년 봄, 함경도 회령에서 넘어온 조선농민이 처음으로 해란강
유역을 개척해 마을을 일구고 옛우물자리를 찾아 우물을 만들어 이곳을 용정(龍井)이라 불리었다고 한다.
이곳 용정민속관에는 한국 교포들의 풍속, 항일의사들의 사적 등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용정중학교는 일본통치시 항일의사들을 배양한 곳으로
교정에 있는 윤동주시인의 시비에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새겨져 있다. 이처럼 용정은 한국의 항일역사와 함께 하였기 때문에 곳곳마다 한국 선조의 숨결이 배어있는 유서깊은 곳이다.
백두산 여행의 마지막밤을 보냈던 연길시내 호텔(한성 세기호텔)에서 출발하여 용정시내로 이동하면서
안내원이 잠깐 차를 멈추고 일행을 향하여 멀리 야산에 정자를 가르키며 "저곳이 유명한 일송정(一松亭)입니다"라고 말한다..
위 사진속 멀리 비암산 정상에 "일송정(一松亭)"이 아스라히 보인다.
일송정(一松亭)
선구자 노랫말에 나오는 일송정은 푸른 소나무인줄 알았는데 왠 정자를 가르키면서 일송정이라고 설명한다...
후에 알았지만 일송정은 정자 모양의 소나무를 뜻하는데, 일제하에 애국지사들이 밤마다 이 소나무 밑에서 비밀리에 만나
독립운동을 모의했다고 한다, 이런 사실을 알게된 일제는 이 소나무에 구멍을 뚫고 약품을 넣어 고사 시켰는데,
그후 1991년부터 여러차례 용정시가 한국의 도움을 받아 소나무를 다시 심고 정자를 신축하였다고 한다.
비암산 정상에 "일송정"과 정자주변에 새로심은 "소나무"
일송정 푸른솔은 ~ ~ 로 시작되는 가곡 "선구자"에 나오는 바로 그 일송정이다.
아쉽게도 그 시절의 일송정은 아니지만 늘 가슴속에 그리던 곳이였으니 한편으론 안타깝기도 하다.
"일송정 기념비" - 기념비 오른편으로 멀리 일송정이 함께 보인다.
설명에 의하면 이곳 비암산 정상 일송정에 오르면 용정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고 반대편으로는 넓은 평야가 끝없이 펼쳐진
용정의 광활한 곡창지대가 펼쳐진다고 한다. 특히 이곳에서 생산된 쌀은 그 옛날 중국 황제들에게 진상될 정도로 유명했단다.
용문교(龍門橋)와 해란강(海蘭江)
먼 발치에서 아쉽게 일송정을 관람한후 전용버스편으로 용정시내로 진입하였다.
안내원의 설명은 계속된다..."지금 우리일행이 지나는 이 다리가 "용문교"이며, 그 아래 흐르는 강이 "해란강"입니다"...
눈 깜작할 사이에 용문교를 지나니, 잠시 차를 세워서 기념사진만 한장 찍자고 해도 그냥 지나쳤으니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용두레 우물
용두레 우물은 1839년 ~ 1880년 사이에 조선에서 이민온 장인석과 박인덕에 의해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 우물은 일찍이 여진족이 쓰던 우물로 한족과 조선족들이 우물이 깊고 오가는 길손들이 두레박을 빌리는 일이 잦아 두례박
즉, 용두레를 해놓아 그때부터 용두레 우물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이고장 이름도 용두레촌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사실 오늘날 연길이 중국 조선족의 행정과 소비의 중심이 되었지만 조선족의 뿌리가 자라기 시작한 곳은 이곳 용정이라고 한다,
참고 ; 연변의 해란강은 반만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겨레의 성산-장백산 기슭에서 발원하여 청산리계곡과 화룡분지, 평강벌을
감돌아서 용정시를 안은 풍요로운 땅에 흘러든다. 강 길이는 145Km로서 연변조선족자치주 인구 반수가
이 강안에 살고있다.
우리 조상들이 이 고장을 찾아와 용두레 우물을 파고 벼농사를 짓기 시작한것은 19세기
후반기부터였다.
가난한 농민과 애국지사들이 이곳에 모여 새 학당을 꾸리고 민족계몽과 반일 기치를 높이 들고 일어나게 되자
용정은 일약
독립운동의 중심으로 부상하였다. 1920년 10월에 있은 청산리전투도 바로 이곳 해란강 상류의 백운평 마을에서
벌어졌다고 한다. 이곳을 배경으로 우리의 가곡 "선구자(先驅者)" 노래가
만들어졌다고 한다(윤해영 작사, 조두남 작곡)
1.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2. 용두레 우물가에
밤새소리 들릴 때, 뜻 깊은 용문교에 달빛 고이 비친다
이역하늘 바라보며 활을 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3. 용주사 저녁종이
비암산에 울릴 때, 사나이 굳은 마음 길이 새겨 두었네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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