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달기 약수터에 도착했는데 숙소를 알아보니 주위에는 없고 조금 나가면 모텔들이
많다는데 비싸다고 읍내로 나갔다 오라는 주민의 말을 듣고 읍내로 향하는데 민박집이보여
전화하니 비철이라서 안한다고 동원장으로 가라고 일러준다 들어가니 방이 많다고하여
하루쯤 이런곳에 자보는것도 괜찮겠다 싶어 오 케이하고 지정 방으로 들어가니 생각한것
처럼 썩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그래도 시내로 나가는 것 보다는 괜찮다 싶어 눌러앉았는데
아래층에 가든을 운영한다기에 여기까지 왔으니 달기약수로 고운 닭백숙을 시켰다
한시간쯤 걸린다기에 씻고 내려오니 참으로 친절하게 부부께서 대해주신다 바깥분은 예산이고
아내되는 분은 아산이라는데 꽤나 멀리 오셔서 장사를 하신다
둘이서 닭한마리를 다먹고 소주도 한병이나 비웠다. 아침에 일어나 이른 아침먹고 사과이야기가
나와서 옆지기가 한박스 사잔다 내돈 들어가는 거아니니 예스 나는 실기만 하면 되니까 ㅎㅎ
오전일찍이어서인지 왕래하는 사람도 별로 없고 우리앞에 오신분이 물을 받고 계신다
우리도 조그마한 통을사서 한통체워왔다
우리나라 약수터는 어딜가나 이렇게 철분이 많아 지저분하게 보인다
한양에서 금부도사를 지냈던 청송사람 권성하가 낙향해 청송읍 부곡동에 자리를 잡은 것은 조선 말기.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청송은 지금도 ‘육지 속의 섬’이라 불리지만, 당시에는 찾아가는 것조차 힘든
오지 중의 오지였다. 더구나 강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 계곡물이 많은 것도 아니어서 늘 먹을 물이
부족해 주민들이 많은 불편을 겪었다. 이를 안타까워하던 권성하는 동네사람들을 모아 수로 공사를
시작했는데, 하루는 공사를 하던 사람이 바위틈에서 ‘꼬록꼬록’ 소리를 내며 솟아나는 물을 발견했다.
그 물을 마셔보니 알싸한 맛이 느껴지며 속이 편안해졌고, 이를 동네사람에게 알리니 모두가 신기하게
여기며 약수를 찾았다고 좋아했다. 이곳의 물이 솟아나는 소리가 꼭 닭 우는 소리처럼 들린다고 ‘달계약수’라
이름 붙였는데, 세대를 거듭하면서 ‘달계약수’가 ‘달기약수’로 바뀌었다고한다.
마을사람들은 이 물을 떠 밥도 하고 닭도 삶았는데, 달기약수로 지은 밥은 찰밥이 되고 닭은 기름기가
쏙 빠지면서도 살은 부드러워졌다. 이 약수의 효능은 청송 일대에 유명해졌고, 그래서 청송사람들은 사위가
찾아오면 으레 토종닭을 잡아 달기약수로 백숙을 만들어주었다. 사위들은 처음 맛본 ‘푸르스름한 백숙’을
너무도 맛있게 먹어, 이들의 입을 통해 청송 달기백숙의 맛이 전국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달기약수 백숙은 철분이 함유된 약수로 조리해 짙은 녹색을 띠는 것이 특징이다. 닭고기의 담백한 맛과
약수의 쌉쌀한 맛이 더해져 입맛을 되살리기에 안성맞춤이며, 사이다처럼 톡 쏘는 맛의 달기약수는 위장병
, 신경통, 빈혈, 어지럼증 등에 특히 효과가 있다고 전해진다
차로 한바퀴 돌며 풍경을 담아보고 송소고택으로 향한다
도착하여 조금더 나아가야 되는데 오래된 건물이보여 들어가니 심씨들 사당인듯
경의제 청송심씨의 사당 시제를 모시는 장소 이겠지
문이 열려있어서 들어가봤다
중요민속자료 제250호. 조선 영조 때 만석의 재산을 가졌던 심처대(沈處大)의 7대손
송소(松韶)심호택(沈琥澤)이 1880년경 파천면 지경리(호박골)에서 조상의 본거지인
덕천리로 이거하면서 건축한 가옥으로, ‘송소세장(松韶世莊)’이란 현판을 달고 9대간
만석의 부를 지녔던 주택이다.
10채의 건물이 경내에 있는데 그 중 측간(안채·사랑채)과 대문간채는 개화기 이후의 건물이다.
그 외의 건물에도 중수시 1912년 이래의 개화형 흔적이 보여 1880년대 건축구조가 온당하게
보존되고 있다고는 할 수 없다. 백과사전에서
송소고택(松韶古宅)은 경상북도 청송군 파천면 덕천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가옥이다.
2007년 10월 12일 대한민국의 중요민속문화재 제250호로 지정되었다.
굴뚝 모양이 특이해서 담아봤다
집안 일을돌보는 아낙네들의 숙소가 아니었을까 저쪽문으로 들어가니 장독대가 보이던데
아궁이
이 집은 조선 영조때 만석의 부를 누린 심처대의 7세손 송소 심호택이 호박골에서 조선의
본거지인 덕천마을에 이거하면서 지은 99칸의 대규모 저택으로 1880년경에 건립되었다.
대문은 솟을 대문에 홍살을 설치하였으며 큰 사랑채는 정면5칸 측면2칸의 팔작지붕으로 크고
화려한 건물로 주인이 거처하던 곳이며 우측에 작은 사랑이 있다.
안채는 안주인이 거처하던 곳으로 'ㅁ'자형을 이루고 있으며 대청마루에는 세살문 위에 빗살무늬의
교창을 달았고 건물마다 독립된 마당이 있으며 공간이 구분되어 있는 등 조선후기 상류층 주택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다.
청송 심부자는 조선시대 12대 만석꾼인 경주 최부자와 함께 9대에 걸쳐 무려 250여년간 만석의 부를
누렸던 영남의 대부호로 한때 전국적인 명성을 떨쳤던 대표적인 집안이다. 위키리백과
집안에 디딜방아가 있다
오래된 향나무가 문설주 역활을하고 있다
사랑채로 들어가는 문인듯
대문간채는 정면 7칸, 측면 1칸의 기와를 이은 맞배지붕인데 대문 좌우로 행랑채가 있다.
대문간채와 이웃한 북방에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마당채가 있다.
안채 앞마당에 화단이 있고 그 남쪽에 우물이 있는데 주변에 잘생긴 나무들이 서 있다.
안채 남쪽 샛담 안쪽에 은행·단풍·옥매화·향나무·전나무가 있어 운치를 자아낸다. 안채는
변형의 ㅁ자형 날개집 평면이고 반듯한 안마당, 부엌 쪽에 우물이 있고 옆에 화단이 조성되어 있다.
안채에 안방과 함께 사랑방이 공존하는 구성인데 사랑방이 앞에, 안방이 뒤편에 자리잡았고,
그들은 보통 살림집에 비하여 규모가 장대해서 부잣집답다고 할 만하다. ㅁ자형 앞날개 중앙에
중문이 있고 그 우측에 작은사랑, 좌측에 큰사랑이 있다. 큰사랑의 사랑방은 정면 2칸, 측면 칸반인데
방 뒤편 반칸은 미닫이의 분합(分閤: 창살문)을 들여 반침(큰 방 옆에 붙는 작은 방)을 만들었다.
사랑방에 이어 4칸의 대청이 자리하는데 방 앞 퇴칸까지 치면 상당한 넓이이다. 대청 건너에 책방이
있는데 구들과 마루로 1칸씩 구조하였고, 이어 좌측날개가 안방채 쪽으로 뻗는데 구들을 들인 책방
말고는 마루를 깐 고방(庫房: 물건을 넣어두는 방)이 계속된다. 내고(內庫)인 셈이다. 이는 맞은편
우측날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중문 우측 작은사랑도 2칸의 방과 1칸의 대청 그리고 뒤에 구조된
방이 자리잡고 있다.
안방이 있는 본채는 날개와 일단 분리하는 특성을 보였다. 우측부터 부엌·안방·대청·상방·안사랑방의
순인데, 부엌이 2칸 반, 안방이 4칸, 대청 2칸, 상방 2칸, 안사랑방 2칸 반 규모이다. 대청을 제외한
방에는 평천장 윗부분에 다락을 설비하여 수장중간을 확보하였다.
기둥간살이는 영조척(營造尺)으로 9척이 기본이나 대청 넓이는 10척, 부엌은 12척으로 하는 변형을 보였다.
부엌 12척은 1912년 이후 개수하면서 개화기적인 척도가 이용되었던 듯하다.
사당채는 안채와의 사이에 담장이 있어 일곽을 따로 형성한 셈이 되었다. 솟을삼문을 들어서면 사당채가
있는데 보통의 가묘(家廟) 형상이 아니고 정자의 유형이며 기거할 수 있게 구조된 방이 있고 정실(淨室)이
있는 구성이다. 역시 특색을 보인다고 하겠다. 안채 뒤울에 화단이 있고 장독대가 있으며 한편에
방앗간채가 있다. 백과사전에서
송정고택도 밖에서만 바라봤다 문이 굳게 잠겨있다
송소고택을 뒤로하고 백석탄으로 이동
고와리 휴게소까지 갔다가 되돌아왔다
겨울이라서 그런지 계곡에 물이 적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살펴보기는 좋았다
오랜세월 물에 닳고닳아 번들번들 미끄럽게 생겼다
For the good times
'경북.대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양여행 1 (0) | 2016.05.16 |
---|---|
방호정과 묵계서원 (0) | 2016.03.06 |
주왕산과 대전사 (0) | 2016.02.29 |
청송 얼음골과 주산지 (0) | 2016.02.28 |
신돌석 장군 유적지와 괴시리 마을 (0) | 2016.02.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