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래미마을은 원래는 의령 여씨들이 일부 살고 있었는데 조선 숙종때 관찰사를 지낸
의성 김씨인 팔오헌 김성구 선생이 이 마을로 와서 우물을 만들고 농토를 새로 개척하면서
정착한이후 마을도 번창하고 의성 김씨들이 많이 모여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마을 중앙에는 학록서당과 큰샘이 있고, 아랫마을에는 학이 날라와 앉았다고 하는
학정봉과 감태봉 아래 독립운동가 남호 김뢰식 선생이 살던 남호구택과 영규헌,
김씨 종택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윗마을에는 3.1 운동 직후 독립청원서를
작성했던 유서깊은 만회고택과 명월 등이 있어, 마을 전체가 口자 전통와가로
이루어진 의성 김씨 집성촌입니다.
지금도 의성 김씨와 타성씨를 합하여 90여 가구가 살고 있지만 조선 말기 전성기에는
의성 김씨들만 100여호가 넘었다고 합니다. 거기다 과거에 급제를 하거나 벼슬에
오른 선비들이 많아서 영남일대 유림들과의 교류가 아주 활발했다고 합니다.
먼저 이 마을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바래미샘이 있습니다. 팔오헌 선생이
명풍수인 선거사를 불러서 터를 잡았다고 하는데요, 여름에는 차고 겨울에는 따뜻한 물이
끊이지 않고 솟아나서 온 마을 주민이 지금까지 이 우물을 이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물맛이 좋고 깨끗해서 일명 큰샘이라고 불리며 원근각지에 명천으로 소문이 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쪽 소나무가 우거진 산밑으로 역시 팔오헌 선생이 후학양성을 위해서 팔오수강을
성실하게 지키며 근면 자조 협동의 자립정신 고취시키는 등 실학사상을 강학하던 곳인
학록서당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또 문화재자료 제 18호인 남호구택은 1876년에 건립되어 남호 김뢰식선생이 살던 곳인데요,
경상도의 아주 명망 높은 부호였던 남호 선생 상해임시정부에서 군자금을 모금할 때에 전 재산을
저당 잡히고 대부받은 돈을 내놓아서 그 공으로 1977년에 건국공로 표창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중요민속자료 제 169호인 만회고택은 조선 말기에 승정원 부승지를 지낸 만회 김건수 선생이
살았던 곳인데요, 그 전 6대조부터 살았으니 300년이 넘은 집입니다. 3.1 운동 직후에 유림들이
심산 김창숙 선생을 중심으로 이곳에 모여서 파리만국평화회의에 제출한 독립청원서를 작성했던
유서깊은 곳으로 1925년에 유림단 독립운동 자금 모금시에는 영남북부지방 유림들이 함께 모여서
의논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또 기념물 제 117호인 김건영 가옥은 구한말 독립운동가였던 해관건영 선생이 지은 집으로
1919년 파리장서운동을 전개할 때 이곳 사랑채가 지역 유림들의 연명장소로 이용되었던
아주 뜻깊은 곳입니다. 김규영선생의 문과홍패와 김건영선생의 소수의망첩 등의 전적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 외에도 단사 김경온 선생이 영조원년에 진사를 하고난 뒤 지어서 은거를 하며 만권의
책을 읽었다는 단사정이나, 남호선생이 세워서 국명저와 중국고대, 당송대의 중국본
서적이 보관되어 있는 영규헌, 병자각, 수오당, 개암종택, 팔오헌 종택, 해와고택 등
선조들의 살아가던 모습이 눈앞에 선하게 보일 정도로 유적이 많이 남아있는 곳입니다.
바래미라는 지명은 바다밑이라는 말이 점차 변형되어 바래미가 되었다고 하는
이곳의 실제 지명도 해저마을인 해저리다.
현 도로명 주소가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바래미길인데 과거 지번으로는
봉화군 봉화읍 해저리(海底里)다.
팔호헌 종택 높은 벼슬을 했어도 집을 화려하지 않게 지었다
- 팔오헌 김성구 -
경오전(耕吾田)내 밭을 갈고 / 음오천(飮吾泉)내 샘물을 마시며
채오전(採吾巓)내 산의 나물을 캐고 / 조오천(釣吾川)내 개울의 고기를 낚고
피오편(披吾編)내 책을 읽고 / 무오현(撫吾絃)내 거문고를 뜯고
수오현(守吾玄)내 현묘함을 지키며 / 종오년(終吾年)내 생애를 마친다.
조선 고종 13년(1876)에 지어진 이 집은 남호 김뢰식이 살던 집으로 응방산 줄기의
낮은 야산을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솟을대문이 있는 대문간채를 들어서면 안채와 사랑채가 인접하여 'ㅁ'자 형을 이루고 있다.
현재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8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남호 김뢰식은 이 지방의 명망 높은
부호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전재산을 저당하고 대부를 받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자금으로 내놓아
그 많던 재산이 없어진 상태라고 한다.
그 공으로 건국훈장을 받긴 했지만 자손들의 입장에서 친일족속들이 판을 치는 이 나라에서
전재산을 헌납하고 달랑 건국훈장 하나 받은게 현실적으로 합당하게 받아들여질까?
물론 그러할 수도 있겠으나 당사자가 아닌 입장에서 보더라도 뭔가 불평등한 느낌이다.
쿠니님 글중에서
소강고택(所岡古宅)은 110여 년 된 고택이다. 이를 입증하듯 오래된 기와에서만 자라는
와송이 곳곳에서 눈에 띈다. 주인장의 증조부인 남호(南湖) 김뢰식(金賚植)이 둘째 아들인
소강(所岡) 김창기(金昌祺)가 분가할 때 지어준 집으로, 첫째 아들에게 물려준
남호구택(南湖舊宅)이 바로 뒷집이다.
금낭화 꽃이 탐스럽게 피어있다
소강고택의 마루
공사중이어서 안을 제대로 볼수없어 아쉬웠다
고택의 안채는 본채의 북쪽에 ‘⊓’자형 평면으로 배치되었다. 중앙에 대청마루 3칸을 ‘一’자형으로
배치하고 좌우로 익사 1칸씩을 덧달아 정면 5칸이 되었다. 대청 정칸의 기둥 간격은 양쪽 협칸보다
677㎜(2.1尺) 넓게 계획되었다. 대청 좌우의 익사에는 안방과 건넌방, 상방이 대칭적으로 배치되었는데,
서측의 안방 위쪽 웃방은 현재는 온돌방인데 이전에는 마루방으로 고방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아래로
웃방 부엌 1칸이 설치되었는데 현재는 입식부엌으로 개조되었다. 대청 동측에는 1칸 반 크기의 상방
위쪽에 1칸의 마루바닥으로 된 고방이 설치되어 있고, 마당쪽으로는 상방부엌 1칸을 건너 상방이 1칸
놓여 있다. ‘ㅁ’자 집의 경우 안방과 상방이 안마당과 면한 곳에는 보통 쪽마루가 설치되는데 만회고택에서는
쪽마루가 설치되지 않았다. 상방과 사랑방 사이 빈 공간에는 지붕을 낮추어 현대식 화장실이 만들어졌는데
이전에는 소에게 줄 여물을 썰던 여물간이었다고 한다.
만회고택의 안채는 조선 중기 건축으로 추측되며 안방과 사랑방 뒤쪽에 각각 수납공간을 두고 있는 경북지방
‘ㅁ’자 집의 고식 평면배치법이 통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토향고택(土香古宅)은 1876년(고종 13년) 통훈대부를 지내고 봉화초등학교 전신인 조양학교(朝陽學校)를
설립(1909년)한 암운(巖雲) 김인식(金仁植) 선생이 건립하였다. 5칸 규모의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큰사랑방과 큰사랑마루가 있고, 사이에는 대문채 좌측에서 큰사랑까지 연결된 담장이 있어 그 사이의 통로를
지나 안대문을 열고 안채로 들어가게 된다. 정침은 정면 7칸 측면 7칸의 규모가 큰 ㅁ자형의 주택이다.
안채 부분의 평면은 부엌, 안방, 대청이 연결된 일자형 배치 형태를 취하고 있다.
고택의 현판(懸板)‘토향(土香)’은 김인식(金仁植)의 손자 김중욱 (金重旭 1924~1967)의 호(號)다.
중앙고보(中央高普)와 고려대학교(高麗大學校)를 졸업한 후 경제기획원 예산담당관을 지냈다.
김중욱은 일제 때 학도병으로 징집되었다가 만주에서 행군도중 탈출하여 광복군으로 항일 운동을 하였다.
아들 김종구(金鍾九)가 일찍 작고하신 선친을 기리기 위해 ‘토향고택’이라 명명하였다.
시인이기도 한 김선생은 그간 교직에 몸담았다가 작년에 정년퇴직하여 시댁인
의성김씨 종택을 “토향고택” 한옥스테이 시설로 운영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도자기만들기, 붓글씨체험 그네타기도 할 수있다.
김종구님 010-5020-9036 김희선님 010-3533-9036
안주인 김선생님이 어찌나 곱고 인자한 모습이던지 조용조용 설명을 잘해주시는데
일행은 차에서 기두리고 마음은 바쁜데 떠날수가 없다 김희선 선생님 다음에 부부함께
찾아뵙겠습니다. 저혼자 들려서 좋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토향고택은 서예가 겸 도예가인 남편과 국어 교사였던 아내가 운영하는 봉화읍의 고택 중 하나다
. 예로부터 영남 지역의 양반들이 대를 이어 거주했던 이곳, 바래미 마을에는 유난히 고택이 많은
편인데, 전통문화를 겸한 창작예술을 경험할 수 있는 집은 토향고택이 거의 유일하다. 증조부
때부터 이 집에 살았다는 바깥주인은 초등학교 때까지 이곳에서 지내다가 서울로 갔고,
1977년도에 다시 귀향해 2012년 여름부터 한옥 체험업을 시작했다.
별채엔 ‘암운시사(巖雲詩社)’라는 현판이 붙어있다.
이곳엔 인근의 시인묵객들이 모여 자작시를 읊고 논하던 시동인회가 있었음을 말해준다.
단체로 다니다보니 시간에 쫓기어 다 돌아보지 못한 아쉬움 다음에 다시 찾아
민박도하며 다시돌아 봐야겠다
시골에있는 음식점치고는 규모도 크고 주위 풍광도 좋고 정말 깔끔하고 맛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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