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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대전

이상재 선생 생가와 한산이씨 시조 묘

 

 

                                                                          밖에서본 이상재선생 생가

 

          월남 이상재 선생은, 구한말의 정치가이시자 독립운동가로 서재필과 독립협회를 조직하였고,

          부회장으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였다. 개혁당 사건으로 복역하였고, 헤이그 만국 평화회의

            밀사파견을  준비했습니다.  

           소년연합척후대 초대 총재이셨으며, 조선일보사 사장등을 지냈습니다.

           이러한 월남 이상재 선생을 이야기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독보적인 유머 감각과 해학입니다.

           영국의 처칠에 버금가는, 빼어난 선생의 위트를 엿볼 수 있는 일화 몇개를 소개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① 통감정치시대 이완용, 송병준에게   

          “대감네는 동경으로 이사 가시지요.” 라고 했다.

          “그건 무슨 소리요?” 라고 되묻자,

          “대감네는 망하게 하는 데는 천재들이니까 동경에 가면 일본도 망할게 아니요?” 라고 대답하셨다.

 

            ② 1922년 민립대학 설립 운동 시  

            어느 미국인 선교사가 귀국길에 하와이에 같이 가서 기금을 모집하자고 제의했으나

           월남 이상재선생은 거절했다.
          “나는 일본 여권으로는 천당에서 오라고 해도 가지 않겠소” 
 

 

           ③ 젊은 사람과 허물없이 농담하고 장기도 두는 것을 보고... 

           젊은 사람과 허물없이 농담하고 장기도 두는 것을 보고 아이들이 버릇이 없어진다고

            충고하는 친구가 있었다.

          “내가 젊어져야지 젊은이더러 노인이 되라면 어떻게 하겠소?”  

 

           ④ 일본인이 자기네 병기창을 구경시키고 감상을 물었다.  

          “과연 일본이 막강하다는 것을 알겠소.

          그러나 칼로 일어선 자는 칼로 망한다는 말이 있으니 그것이 걱정이오”  

 

          ⑤ ‘시국강연회’ 유머  

         “방금 보고 온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내가 이곳으로 오는 도중에 호떡 한 개를 가지고

          두 아이가 서로 싸우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 아이는 중학생이고, 한 아이는 소학생.

          그런데 소학생이 가진 호떡을 중학생이 빼앗아서 처음에 별떡을 만들어 준다고 하면서

          조금씩 먹기 시작하다가 소학생이 울면서 앙탈을 하니까 이번에는 달떡을 만들어 준다고

          모난 데를 돌려가면서 뜯어 먹었습니다. 결국 중학생이 꾀를 부려서 소학생의 호떡을 다 먹어

          버리니까 소학생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자꾸 울고만 있더니 ……”

          청중들은 무슨 뜻인지 알아차리고 크게 박수를 쳤다. 일본 경찰이 강연을 마치게 하고 사람들을

          해산시켰다.

 

         ⑥ 3.1 운동이 끝나고... 

          3.1 운동이 끝나고 실태 조사를 한답시고 미국에서 스타(Star)라는 이름을 가진 박사가

          일본 총독부의 초청으로 한국에 왔다. 총독부 고위 관리는 스타 박사에게 말했다.

         "조선인들은 아주 무례하고 또 무식하기가 이를 데 없어요. 그래서 앞으로는 조선인들을

          교화시키기 위해 문화정책을 펼칠 생각이오. 박사께서는 조선의 이름 난 자들을 찾아가

          그들의 동향과 생각을 좀 파악해 주시면 고맙겠소."

          그리하여 어느 날 스타 박사는 이상재 선생의 처소를 찾았다. 선생이 말하였다.

         "대낮에 별(Star)이 나온다는 게 말이 않되잖소? 밤에 오도록 하시지요. 허허허!"

          이 말에 스타 박사는 탄성을 질렀다. 선생의 뛰어난 유머 감각에 감탄한 것이었다.

         그리고 총독부에 "조선인은 매우 훌륭합니다. 교화정책이라니, 안 될 말이오."라고 했다. 

 

         ⑦ 학교 강연에서 

         한 번은 어느 학교에서 강연을 하는데, 일본 순사들이 복도를 수시로 드나들며 선생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였다. 혹여 일본에 해가되는 말을 하지 않을까 염려해서 였다.

         강연중에 자꾸 왔다갔다 하는 일본 순사들이 눈에 거슬린 선생이 한마디 하였다.

        '어허! 초봄이 지난지가 한참인데, 아직도 개~나리가 만발하였구나." 라고...

         처음엔 영문을 모르던 학생들이 차츰 한 명씩 웃기 시작하더니 이내 웃음 바다가 되었다.

         개는 일본인을, 나리는 순사(형사)를 억지로 높여 부르는 말이었다.

         이것이 암호(?)처럼 퍼져 나중에는 '어디 어디에 개나리가 피었다'는 은어가 생기기도 했다.

 

                                                                                               본채

                                                                                 안에서본 대문채

                                                                       허청과 광으로 여겨진다

                                                                                안채로 들어가는 대문

 

유물전시관,

민족의식 고취와 교육을 통한 인재양성, 언론을 통한 민족계몽운동 등을 엿볼 수 있는 곳입니다.

유물전시관에는 서적 132점, 임명장 6점 등 선생의 유품 244점이 보존 전시되고 잇습니다.

 

 

 

 

월남 선생이 이희택씨와 밀양박씨 사이에 태어나 보모와 함께 유아시절부터 청년시절을 보내며 살던 곳이다.
15세 때 강릉유씨와 결혼한 후 함께 신혼을 보냈으며,
선생이 18세 때 집을 떠난 후에도 부인은 이곳에서 아이들을 낳고 기르며 선생을 뒷바라지 했다. 
 

 

                               

 
월남 이상재 선생 사진,
 

         본관 한산(韓山). 호 월남(月南). 본명 계호(季皓). 충남 서천 출생. 1867년 과거에 낙방, 서울에서

         박정양과 사귀어 l0여 년 간 그의 집에서 식객 노릇, 1881년 그가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의

         한 사람으로 일본에 갈 때 수행원이 되어 도일, 동행하였던 홍영식·김옥균 등과 깊이 사귀었다.

         1884년 우정국총판 홍영식의 권유로 우정국 주사가 되어 인천에서 근무하다가, 갑신정변 후 낙향.  

 

         1887년 박정양이 초대 주미공사에 임명되자 그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1등서기관으로 근무,

         청나라의 압력으로 이듬해 사신 일행과 함께 귀국. 1894년 갑오개혁 후 박정양이 내무독판이 되자

         우부승지 겸 경연참찬이 되었고, 이어 학무아문참의로 학무국장을 겸임하면서 신교육령을

         반포하여 실시하게 하였다. 

 

         1895년 학부참사관·법부참사관을 지내고, 1896년 국어학교 교장·내각총서 및 중추원 1등의관을

         거쳐 의정부 총무국장이 되었다. 서재필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 부회장이 되어 만민공동회를 개최,

         1898년 독립협회사건으로 구금되었다가 10일 후 석방되어 의정부 총무국장을 사임. 1902년

         개혁당사건으로 3년간 복역하는 동안 그리스도교도가 되었다. <출처; 두산백과> 

 

 

 

 

 

온 국민이 그를 애도하다! 최초의 사회장으로 치른 월남 이상재 선생 장례식 소개,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기자 특사로 출옥, 1905년 의정부참찬에 임명되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밀사파견 준비차 내밀히 한규설·이상설의 집을 왕래하던 중 체포되었으나,

증거불충분으로 2개월 후 석방되었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듬해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종교부 총무 및 교육부장을 겸임하던 중 3·1운동에 민족대표로 참여교섭을 받았으나 참가를

거부하였다.

1921년 조선교육협회 회장이 되어 베이징(北京)에서 열린 만국기독교청년연합대회에 조선

대표로 참석 후 1923년 소년연합척후대(보이스카우트) 초대 총재가 되고, 이듬해 조선일보사

 사장에 취임. 1927년 신간회 초대 회장에 추대되었으나 곧 병사. 장례는 한국 최초의

 사회장으로 집행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출처; 두산백과>

 

 

 

 

 


      이 묘자리는 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라 하는데 주산(主山)과 주변 산들의 모습을 살펴보면 알맞

      은 명명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묘의 조성과 관련하여 두 설화가 전래돼 오고 있다.

      그 첫째는 이곳은 원래 동헌(東軒)자리로 원이 정사를 보던 곳이었는데 동헌마루 중 한 평 정도의 부

      위가 자주 썩어 여러 차례 보수를 했다. 
      하루는 이를 괴이하게 생각한 원이 당시 아전으로 있던 한산이씨에게 달걀을 묻도록 명하고 20일 후

      에 꺼내볼 요량이었다. 심부름을 맡았던 아전이 원의 뜻을 짐작하고 달걀을 묻은 15일 후에 꺼내보니

      묻은 달걀들이 병아리가 거의 다된 사실을 확인하고 그 자리에 곯은 달걀들을 바꾸어 다시 묻어 놓았

      다. 달걀을 묻은 20일 뒤 원이 달걀을 꺼내오도록 명하여 그 곯은 달걀들을 파내어 원에게 보이니 원

      은 자기가 잘못 판단한 것으로 생각했다. 좋은 명당인 것을 확인한 아전은 깊은 밤에 남몰래 자기 부

      친의 백골(白骨)을 그 자리에 묻었고 그 명당 덕으로 가문이 창성해지자 동헌을 딴 곳으로 옮기고 성

      분(成墳)했다는 전설이다.


      둘째는 원래 이 묘역에는 고려조 때 건립한 절이 있었는데 고려말경 풍수지리학에 밝은이가 한산현감

      으로 부임해와 근무하면서 이 절의 법당마루 밑 땅이 금계포란형의 큰 혈장(穴場)임을 알고 그 진가

      (眞假)를 시험하기 위해 이호장(李戶長)에게 달걀을 묻도록 명했는데 약삭빠른 이호장이 곯은 달걀만

     을 골라 묻고 후일 캐내어 현감에게 바치니 현감은 자신이 잘못 판단한 것으로 알고 실망했다는 것이

     다. 얼마 후 그 현감은 강화군수로 전임해갔고 이 절에서는 떠돌이 중이 살해되는 괴사건이 일어나 이

     절의 중들이 모두 자취를 감추어 절은 황폐해졌다. 그 후 이 자리에 이호장이 묻히게 됐다는 전설이다.

 

       묘를 쓴지 얼마 되지 않아 경학(經學)의 대가인 가정 이곡(稼亭 李穀)과 성리학의 대가이며 고려

       말의 명신인 목은 이색(牧隱 李穡)부자가 태어나 두 사람 모두 원(元)나라 대과(大科)에 급제하는 기

       적을 낳았다. 
       이 밖에도 조선조의 기재(奇才)로 역학(易學)에 정통했던 예언가 토정 이지함(土亭 李之函)과 명재상

       이산해(李山海), 근세의 사회운동가로서 국권회복에 헌신한 월남 이상재(月南 李商在)등도 이호장의

       후예들이니 이같이 한산 이씨들이 성운을 누리고 많은 인재가 배출된 것은 오로지 이 묘의 덕이라고

       말하는 이가 많다.

                             지방 관아의 뜰에 남아 있던 것으로 전하는 3층 석탑이다. 탑신(塔身)의 1층 몸돌 남쪽면에

                             새긴 기록에는 고려 성종 10년(991) 한산지방의 호족이 나라를 지키기 위한 뜻을 담아

                             이 탑을 세웠다고 적고 있다. 문화재청

 

 

                          이곳을떠나 동백정으로 가면서 성북리 오층석탐을 잠시 둘러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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