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충청.대전

덕숭산 수덕사

                                                                    충남 예산군 덕산면 수덕사안길 79

                서해를 향한 차령산맥의 낙맥(落脈)이 만들어 낸 덕숭산(德崇山)은 북으로는 가야산(伽倻山), 서로는 오서산,

                동남간에는 용봉산(龍鳳山)이 병풍처럼 둘러쌓인 중심부에 서 있다. 이 덕숭산 자락에 많은 고승들을 배출한

                한국불교의 선지종찰(禪之宗刹) 수덕사가 자리하고 있다. "백제는 승려와 절과 탑이 많다"라고 중국사서

                (史書)인 '북사(北史)' , '수서(隨書)', '주서(周書)'에 기록되어 있다. 그 문헌에 나타난 백제 사찰로는 흥륜사

                (興輪寺), 왕흥사(王興寺), 칠악사(漆岳寺), 수덕사(修德寺), 사자사(師子寺), 미륵사(彌勒寺), 제석 정사(帝釋精寺)

                 등 12개가 전하지만 현재까지 큰 규모를 유지하고 있는 사찰은 수덕사 뿐이다. 백제사찰인 수덕사의 창건에

                 관한 정확한 문헌 기록은 현재 남아있지 않으나, 학계에서는 대체적으로 백제 위덕왕(威德王, 554~597) 재위

                시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수덕사 경내 옛 절터에서 발견된 백제와당은 백제시대 창건설을

                방증할 수 있는 자료이다. 수덕사의 고려시대 유물로는 충렬왕 34년(1308)에 건축된 대웅전과 통일신라 말기

                양식을 모방한 삼층석탑, 수덕사 출토 고려자기, 수덕사 출토 와당 등 있다. 임진왜란으로 대부분의 가람이

                소실되었으나 수덕사 대웅전은 다행히 옛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1937~40년 보수 당시 발견된 대웅전

                동측 내부 전면에 기록된 단청개칠기 (丹靑改漆記)에 의하면 중종 23년(1528)에 대웅전 색채보수,

                영조 27년(1751), 영조 46년(1770)에 대웅전 보수, 순조 3년(1803)에 대웅전 후면의 부연보수와 풍판의 개수 등

                 4차례 대웅전 보수가 있었음을 알수 있다. 1673년 조성된 수덕사 괘불과 18세기 제작된 수덕사 소종은 조선후기

                 수덕사의 꾸준한 불사활동을 보여주는 유물들이다.

                                                              오줌싸게 모습 어릴때 많이 봤던 모습입니다

                                                  * 전설
                  백제시대에 창건된 수덕사가 통일신라시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가람은 극히 퇴락이

                  심해 대중창불사를 하여야 했으나 당시의 스님들은 불사금을 조달하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묘령의 여인이 찾아와서 불사를 돕기 위해 공양주를 하겠다고 자청하였다. 이 여인의

                   미모가 빼어난 지라 수덕각시라는 이름으로 소문이 원근에 퍼지게 되니, 이 여인을 구경하러 연일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중 신라의 대부호요 재상의 아들인 '정혜(定慧)'라는 사람이 청혼을 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이 불사가 원만성취되면 청혼을 받아들이겠다고 하는 여인의 말을 듣고 이 청년은 가산을

                   보태어 10년 걸릴 불사를 3년만에 원만히 끝내고 낙성식을 보게 되었다. 낙성식에 대공덕주로서 참석한

                   이 청년이 수덕각시에게 같이 떠날 것을 독촉하자 '구정물 묻은 옷을 갈아 입을 말미를 주소서'하고

                   옆방으로 들어간 뒤 기척이 없었다. 이에 청년이 방문을 열고 들어가려하자 여인은 급히 다른 방으로

                   사라지려 하였다. 그 모습에 당황한 청년이 여인을 잡으려하는 순간 옆에 있던 바위가 갈라지며 여인은

                   버선 한짝만 남기고 사라지니, 갑자기 사람도 방문도 없어지고 크게 틈이 벌어진 바위 하나만 나타나

                   있었다. 이후 그 바위가 갈라진 사이에서는 봄이면 기이하게 버선모양의 버선꽃이 지금까지 피고 있으며

                   그로부터 관음보살의 현신이었던 그 여인의 이름이 수덕이었으므로 절이름을 수덕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여인을 사랑한 정혜라는 청년은 인생 무상함을 느끼고 산마루에 올라가 절을 짓고

                   그 이름을 정혜사라 하였다고 한다

                   창건에 대한 뚜렷한 기록이 없어 창건설화가 분분하나, 사기(寺記)에는 백제 말에 숭제법사(崇濟法師)에

                   의하여 창건되었다고 하며 제30대 무왕 때 혜현(惠現)이 『법화경』을 강론하였고, 고려 제31대 공민왕 때

                   나옹(懶翁)이 중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설에는 599년(법왕 1)에 지명법사(知命法師)가 창건하였고

                   원효(元曉)가 중수하였다고 한다.

                   창건 이후의 상세한 역사는 전하지 않지만, 한말에 경허(鏡虛)가 이곳에 머물면서 선풍(禪風)을 크게 일으켰고,

                   1898년(광무 2)에 경허의 제자 만공(滿空)이 중창한 뒤 이 절에 머물면서 많은 후학들을 배출하였다.

                   우리나라 4대 총림(叢林)의 하나인 덕숭총림(德崇叢林)이 있으며, 많은 수도승들이 정진하고 있다

 

 

                                         한켠에 산수국이 곱게 피어있다

 

 

 

 

 

 

 

 

 

 

중국의 승려.

본명은 계차()인 중국의 승려인데

 몸집이 뚱뚱하고, 이마는 찡그리며,

배는 늘어진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다.

포대화상의 환한 미소를 보니

잠시라도 근심, 걱정이 사라지는 듯하다. 

 중국에는 사찰뿐이 아니고 관광지에가도

포대화상이 많이 있다

                                                                                                     코끼리석등

 

 

 

 

 

 

 

 

 

 

 

                        '대웅전(국보 제49호)'이예요

 

              백제시대 사찰인 수덕사의 창건에 관한 정확한 문헌기록은 현재 남아 있지 않으나,

              학계에서는 대체적으로 백제 위덕왕(554~597) 재위 시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따.

              석가, 아미타, 약사 삼존불을 모신 이 대웅전은 19337년 수리공사 때 발견된 묵서의

              내용으로 보아 1308년(충렬왕 34년)에 건립 되었다. 건축은 고려시대에 유행된 주심포

              양식이고 정면 3칸, 측면 4칸 규모의 맞배지붕이다. 바른 돌쌓기 형식의 기단에 사각형의

              자연석으로 기둥 놓은 자리를 북돋게 조각한 주춧돌을 놓았고, 그 위에 배흘림 기둥을

              세웠다. 정면의 각 칸에는 섬세한 빗살 3분 합문이 있고, 측면에는 맨 앞쪽에 출입문을

              설치하였다. 뒷면에는 각 칸에 문을 장식하고 있지만 중앙 칸에만 문을 달았따. 외부에

              노출된 가구는 나무가 간직하고 있는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며, 흑면 맞재지붕의 선과

              노출된 목부재의 구도는 아름다움의 극치하고 할 수 있다. 건축된 연대가 확실하고

              조형미가 뛰어난 점으로 한국 목조 건축사에서 매우 중요한 건물이다

 

                     '예산 수덕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복장유물(보물  제1381호)예요

 

                  보물 제1263호. 삼베 바탕에 채색. 세로 1,059㎝, 가로 727㎝. 응열(應悅), 옥준(玉俊), 학전(學全),

                  석능(釋能)의 4명의 화원(畵員)이 1673년(현종 14)에 그렸다. 이들은 충청남도 신원사(新元寺)

                  노사나불괘불탱(1664년)도 제작했기 때문에 같은 밑그림을 사용한 듯 유사하지만 이 괘불탱에

                  더 많은 권속이 등장하며 채색의 부분적인 변화가 있다. 보살 형태의 주존불(主尊佛)에

‘                 원만보신노사나불(圓滿報身盧舍那佛)’의 존명이 있으며 1767년, 1780년, 1801년, 1888년 4번의 중수를 거쳤다.

                 본존인 정면 입상의 노사나불을 중심으로 12대보살, 10대제자, 범천과 제석천, 사천왕, 화불, 비천 등이

                 좌·우대칭으로 에워 싼 구도이다. 보관(寶冠)을 쓴 노사나불은 강조된 두 손을 어깨 높이로 올린 설법인(說法印)의

                 손 모양을 하고 있다. 지권인(智拳印 : 왼손 집게손가락을 올려 세우고 오른손으로 그 첫째 마디를 쥔 손 모양)의

                 비로자나불을 포함하여 9구의 화불이 이 노사나불을 장엄하고 있다. 원통형에 가까운 신체의 노사나불은 육중한

                 보관, 목걸이, 문양과 영락(瓔珞 : 구슬을 꿰어 만든 장신구)으로 장식된 천의(天衣 : 천인(天人)이나 선녀의 옷),

                 그리고 신광(身光 : 부처나 보살의 몸에서 발하는 빛) 안에 묘사된 8구의 화불과 모란문으로 화려함이 돋보인다.

                 12대보살 중 여의(如意)를 든 문수보살과 경책(經冊)을 얹은 연꽃을 든 보현보살, 붉은 해를 든 일광보살(日光菩薩)과

                 흰 달을 든 월광보살(月光菩薩), 정병(淨甁)을 들고 흰 너울을 쓴 관음보살과 보주(寶珠)를 지니고

                 석장(錫杖 : 중이 짚고 다니는 지팡이)을 짚은 지장보살이 보인다.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은 적색의

                 두광(頭光 : 부처나 보살의 정수리에서 나오는 빛), 일광보살과 월광보살, 범천과 제석천은 투명한 흑사(黑絲)의 두광,

                 가섭존자(迦葉尊者)와 아난존자(阿難尊者)는 투명한 두광, 이외 녹색 두광 등 표현이 다양하다.

                 합장한 범천과 제석천은 둥근 목깃의 복장을 했다. 샌들(sandal)을 신거나 석장 또는 부채를 든 10대제자는

                 얼굴 표정과 자세, 승복의 색상 등이 자유롭다. 노사나불의 두광 위에는 각 2구의 불상 및 보살상, 6구의 타방불,

                 비천상이 법회 모임을 극적으로 이끌고 있다. 하단부의 사천왕을 보면, 북방천왕은 비파(琵琶)를 연주하고,

                 동방천왕은 칼[劍]을 짚었고, 남방천왕은 여의주(如意珠)와 용(龍)을 잡고, 서방천왕은 탑과 당(幢)을 들었다.

                 권속들이 조그맣게 묘사되어 독존불처럼 보이는 노사나불이 오색 광선을 배경으로 등장한 화면은 신비롭다.

                 적색, 녹색, 흰색, 청색, 황색 등 부드럽고 밝은 색상이 사용되었다. 옷 문양과 영락 장식은 금채(金彩)하였다.

 

                                                                             지장보살

 

                                                                                 관세음보살

 

                                                  마침 법고각에는 저녁 예불 북을 여러스님이 돌아가며치고있다

                                       청련당(요사채인듯)

                                              

                                            예불법고를 모든 사람들이 조용히 지켜보고있다

 

 

 

비구니들의 정진도량

                               ■ 일엽스님은 … 

              1896년 목사의 딸로 태어나 이화학당에서 신학문을 수료하고 도쿄(東京) 유학을 다녀온 개화기 최초의

              여류 문인. 신여성운동을 주도하여 세상의 이목을 한 몸에 받았으며 여러 번의 결혼과 실패, 자유연애론과

              신정조론을 주창한 여성해방운동가였다.

              일세를 풍미하던 신여성이던 그는 1923년 수덕사에서 만공선사의 법문을 듣고 발심한 뒤 1933년 금강산

              마하연에 주석하던 만공스님을 법사로 금강산 서봉암에서 출가, 당대 최고의 인텔리 여성 김원주는

              근대 비구니계의 최고봉 일엽(一葉)스님이 된다. 일엽스님은 “성품을 백련과 같이 한 후에야 비로소 산문을

              나가 중생을 교화하라”는 스승 만공스님의 유지에 따라 만년에 이르기까지 절필하고 줄곧 禪과 수도에만

              전념했다. 특히 견성암 입승을 맡아 30년 동안 한 번도 산문을 나가지 않고 장좌불와하는 등 보통

              선객으로는 감히 흉내내기 힘든 용맹정진을 몸소 보여주었다.

              또한 덕숭총림 비구니 선원 건립 등 불교중흥을 위해 앞장서고 말년에는 유려한 문체로 중생교화를 위한

              저술을 남기기도 했다. 1960년 <어느 수도인의 회상>, 1962년 <청춘을 불사르고>를 펴내 세인들의 폭발적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며 ‘청춘을 불사르고’가 베스트셀러가 되자 출가에 대한 젊은이들의 관심이

              급속도로 많아졌다.

              스님은 당신의 입적을 예견했는지 1970년 4월 마지막 생일날 ‘일생에 다시 오지 않는 오늘’이라는

              게송을 남긴다. “일생에 다시 오지 않는 오늘이요/ 영겁에 얻기 어려운 이몸이라/ 태어나 험한 길 거쳐

              이 산에 이르니/ 오늘에야 문득 옛 근심 잊노라.”

              일엽스님은 1971년 1월28일 세수 76세 법랍 38세로 스님이 설립한 덕숭총림 비구니 총림원에서 열반했다.

              스님의 영정과 추모탑이 덕숭산 수덕사 환희대에 모셔져 있다.위의 글들은 모셔온 것입니다

 

                        원통보전은 현세의 부처님이신 관세음보살 상을 모신곳이다 여기서는 환희대라고한다

                         일엽스님이 만년에 기거하던 곳으로 30여년동안 절필했던 글을 쓰기도 했다고함

 


'충청.대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경 옥려봉과 죽림서원  (0) 2017.01.13
수덕여관과 이응노.나혜석.일엽스님  (0) 2016.10.22
추사고택과 기념관  (0) 2016.10.20
맹씨행단과 추사고택  (0) 2016.10.15
아산 외암마을 후속  (0) 2016.0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