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하늘을 보고 기온을 느끼면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다 어디로든 떠나야만 직성이 풀린다
진즉부터 여행일정이 잡혀있는데 25일날 비소식이 있어 찜찜하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아침 일찍
38명이서 관광 뻐스에 오른다
장거리를 달리고 달려 홍천에 도달하니 구간구간 공사로 차량정체 예정보다 30분 늦게 도착
가끔 접하는 내린천 이제는 눈에 익은 곳도 보인다 1년에 무려 3번을 왔으니 그럴만도하다
옛날에 군 공병대가 이곳 길을 정비하고 넓혔나보다 감사의비를보니
차에서 내려 조금만가면 자작나무 숲인줄 알았다 그런데 이정표를보니 3.2km 헉 땀좀 빼겠다
백두산과 북해도에서 본 자작나무 난 추운지방에서만 자라는 나무인줄 알았는데 여기에도 숲이 있다니
하긴 인제도 무척 추운지방이긴 하지만....블친 바이오렛님이 그린 자작나무가 생각난다
오르다보니 이렇게 잣나무 단지도있다
자작나무숲 1헥타르(ha)가 승용차 3대가 내뿜는 양의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는 것으로 나타나 온실가스
감축의 효과 있다한다
원대리 자작나무숲은 국내 최대 규모로 조성되었다. 138ha 경제림 단지 중 25ha가 운영되고 있다.
경제림단지로 조성되어 20년 이상의 수려한 수목으로 경관이 우수하며 국내에서 가장 많은
자작나무를 보유하고 있다.(50만 그루 이상).
국내에서 특히 남한에서 보기가 어려운 자작나무 숲 군락이 조성되어 콘텐츠의 희귀성 및 희소성이
높으며 인제의 최대 관광사업(빙어축제와 내린천 래프팅 등)의 중심부에 위치하여 관광 사업간
연계성이 우수하다. 또한 44번 국도와 인제IC(서울양양고속도로_2015년 12월 개통예정)에서의
근접한 지역에 위치하여 진입 여건과 지리적 여건이 우수하다.
존재 자체가 고유명사인 원대리 자작나무숲은 2012년 개방한 이래로 2013년 55,000명 2014년에는
101,509명이 방문하여 인제의 떠오르는 관광명소가 되었으며 인근 내린천수변공원에서는 래프팅,
리버버깅은 물론 짚트랙, 번지점프, 슬링샷, ATV 모두 이루어져 지역관광과의 연계성도 우수하다
백과사전에서
자작나무를 찾아서
안도현
따뜻한 남쪽에서 살아온 나는 잘 모른다
자작나무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대저 시인이라는 자가 그까짓 것도 모르다니 하면서
친구는 나를 호되게 후려치며 놀리기도 했지만
그래서 숲길을 가다가 어느 짓궂은 친구가 멀쑥한 백양
나무를 가리키며
이게 자작나무야, 해도 나는 금방 속고 말테지만
그 높고 추운 곳에서 떼지어 산다는
자작나무가 끝없이 마음에 사무치는 날은
눈 내리는 닥터 지바고 상영관이 없을까를 생각하다가
어떤 날은 도서관에서 식물도감을 뒤적여도 보았고
또 어떤 날은 백석과 예쎄닌과 숄로호프를 다시 펼쳐보았지만
자작나무가 책 속에 있으리라 여긴 것부터 잘못이었다
그래서 식솔도 생계도 조직도 헌법도 잊고
자작나무를 찾아서 훌쩍 떠나고 싶다 말했을 때
대기업의 사원 내 친구 하얀 와이셔츠는
나의 사상이 의심 된다고, 저 혼자 뒤돌아 서서
속으로 이제부터 절교다, 하고 선언했을지도 모른다
그때마다 나는 이렇게 말해 주고 싶었다
연애시절을 아프게 통과해 본 사람이 삶의 바닥을 조금
알게 되는 것처럼
자작나무에 대한 그리움도 그런 거라고
내가 자작나무를 그리워하는 것은 자작나무가 하얗기 때문이고
자작나무가 하얀 것은 자작나무숲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때 묻지 않은 심성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친구여, 따뜻한 남쪽에서 제대로 사는 삶이란
뭐니뭐니해도 자작나무를 찾아가는 일
자작나무 숲에 너와 내가 한 그루 자작나무로 서서
더 큰 자작나무숲을 이루는 일이다
그러면 먼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깜짝 놀라겠지
어라, 자작나무들이 꼭 흰 옷 입은 사람 같네, 하면서
인증도하고
백석의 자작나무
‘산골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
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산도 자작나무다
그 맛있는 메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
그리고 감로같이 단샘이 솟는 박우물도 자작나무다
산 너머는 평안도 땅도 뵈인다는 이 산골은 온통 자작나무다.’
백석하면 생각나는게 길상사와 김영한이다
백석과 김영한은 3년간의 뜨거웠던 사랑은 기생이라는 이유로 백석 부모님의 반대로
해어지게됩니다 북으로간 백석을 못잊어하는 아래의 사연을 조금 소개합니다
그렇다면 백석과 결별한 후 남한에 남은 진향, 즉 김영한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김영한은 1951년
성북구 지금의 길상사가 있는 땅을 구입합니다. 원래 이곳은 일제시대 백인기의 별장으로 건물
3채가 들어서 있었으며 해방후에는 청암장으로 불렸습니다. 이게 대원각입니다
여하간 이렇게 돈을 모은 김영한은 북으로 간 백석을 잊지 못했는지 백석의 생일인 매년 7월1일
이면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곤 팔순을 바라보던 1987년 자신이 평생 애독하던
에세이 저자 고 법정(法頂)스님과 연락하게 되지요. 김영한씨는 김대도행(金大道行)이라는 분을
통해 미국 로스앤젤레스 고려사에서 법정스님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아무 조건없이 대원각을
시주할 테니 절로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지만 법정스님은 “평생 주지도 맡아본 적이 없다”고 거
절했습니다. 법정스님은 여러 번 사양했지만 1994년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을 펴며 불교
의 사회적 책무를 알리다 마침내 김영한씨의 청을 받아들입니다.
1996년 마침내 대원각은 길상사로 이름을 바꾸는데 대지-임야가 7000여평, 시가 1000억원에 달했
습니다. 이렇게 통큰 시주를 하고 김영한이 법정스님으로부터 받은 것은 염주 한벌과 길상화(吉祥
華)라는 법명이었으니 아름다운 기부가 분명하지요. 여기서 여러분은 백석이 동경 아오야마학원
유학시절 머문 주소가 길상사였다는 그 우연을 다시 떠올려 보시길 바랍니다.
1999년 김영한씨는 세상을 떠나며 화장을 한 뒤 첫눈이 길상사에 내리면 자신이 머물던 길상헌(지
금의 길상사 입구에서 왼쪽 건물) 뒷편 계곡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지금 길상헌 뒤에
는 작은 사당과 김씨의 소박한 유골함과 ‘나와 나탸샤와 흰당나귀’가 적힌 김씨의 약력판이 서있
습니다. 백석도 95년도에 이북에서 84세로 세상을 떠납니다
자작나무 / 류시화
아무도 내가 말하는 것을 알 수가 없고
아무도 내가 말하지 않는 것을 말할 수 없다
사랑은 침묵이다
자작나무를 바라보면
이미 내 어린시절은 끝나고 없다
이제 내 귀에 시의
마지막 연이 들린다 내 말은
나에게 되돌아 울려오지 않고
내 혀는 구제받지 못했다
단풍나무도 이제 잎이 시들기 시작했다
인제군 인제읍 원남로 760(지번 인제군 인제읍 원대리 728)
Bright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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