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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교장과 홍난파 집터와 딜쿠샤

12월 16일 고교동기들 모임하고 17일 토요일 오전에 광명동굴 오후에

경교장에 들렸다

서울 종로구 새문안로 29
(지번) 종로구 평동 108-1

02-735-2038

경교장(京橋莊)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었던 백범() 김구(金九)선생이

 1945년 중국에서 돌아온 이후 1949년 6월 26일 암살당할 때까지 집무실과 숙소로

 사용했던 건물이다. 1938년에 건립된 이 건물의 명칭은 당초 죽첨장(竹添莊)이었으나

 김구(金九)선생의 거처로 사용되면서 근처의 개울이름을 따서 경교장(京橋莊)으로

 이름을 변경하였다고 전한다. 이후 자유중국대사관 관저, 국군의료진 주둔지,

 월남대사관 관저 등으로 사용되었으며 1968년 고려병원(현 강북삼성병원)이 인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지하1층, 지상2층 규모의 양관으로 전면 분할의 비례가 아름답고

 1층의 출창(出窓)과 2층의 들임 아치창을 이용한 단아한 외관이 일품이며,

 김해경(시인 이상)이 졸업한 경성고공 출신으로 우리나라 근대 건축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인 김세연(金世演, 1897~1975)이 설계하여 1930년대 건축술을 잘 보여주고

 있는 건축물로 평가되고 있으나, 건물의 우측면과 후면은 병원의 신축건물과

 연결되었으며 내부구조도 병원용도에 맞추어 개조된 상태이다

.

연면적 874.05㎡(264.4평) 1,119.2㎡ 고전풍
▒ 재 료
: 벽돌조
▒ 설 계 자
: 김세연(金世演)
▒ 시 공 자
: 대림조(大林組) 경성지점(京城支店)
▒ 소 유 자 : (주)삼성생명
▒ 소 재 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동 108-1
경교장은 원래 금광(金鑛)을 경영하던 최창학(崔昌學)의 저택이었다. 광복 후 중국에서 귀국한 김구(金九)

 선생의 사저(私邸)로 사용되어 더욱 알려졌다. 이 때부터 경교장(京橋莊)으로 불리어졌으며, 광복

 이후 정치의 중심지였다.
김구는 1949년 이 집에서 안두희의 총탄에 의해 서거하였다. 강북삼성병원이 사용하고 있는데, 김구 선생이

 서거한 거실을 다시 복원할 계획으로 있다.
경교장의 이름은 교북동(橋北洞) 경찰파출소 부근에 있던 다리 이름인 경구교(京口橋)를 줄여서 부른 경교에서

 유래한다. 경구교가 널리 알려진 이유는 중국 사신이 도성 안으로 들어올 때 이 다리에서 군악을 연주하였기

 때문이라 한다.
경교장은 1936년 착공하여 1939년 준공되었으며, 당시에는 1,584평 대지에 지하 1층, 지상 2층 264.4평 규모의

 양관(洋館)이었다. 설계자는 한국 근대건축가인 김세연(金世演)이며, 시공자는 일본 대림조(大林組) 경성지점이었다.
김세연은 경기도 광주 출신으로 한국 근대건축의 제1세대였다. 경기고등공업학교의 전신인 경성공업전문학교

 건축과를 1920년에 졸업했다. 그는 박길용(朴吉龍)에 이어 두 번째 한국인 경성공업 건축과 출신이었다.

그는 졸업 후부터 1941년까지 조선총독부에 근무했으며, 한국인 최초의 구조계산 전문가였다. 조선총독부의

건축부서는 관립 건물의 건축설계와 감독을 주로 했으며, 당시 최고의 직장으로 간주되었다. 김세연은 조선총독부에

 근무하면서 경교장을 설계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 건물은 아담한 2층 양옥으로 좌우대칭형 외관이다. 정면 중앙 1층에는 현관을 두고 승ㆍ하차장을 두었다.

그 상부 2층에는 5개의 아치창을 두었으며, 지붕 중앙에는 지붕 돌출창(dormer)를 두었다. 정면 1층 좌우에는

원형 베이 윈도우(bay window)를, 2층에는 3개씩 장방형 수직창을 설치하였다. 지붕은 완만한 경사의 우진각지붕형이다

. 전체적인 건물 양식은 고전주의적인 경향을 보이고 있다.

                                                     임시정부 선전부 활동공간

김구 선생은 1876년 황해도 해주에서 가난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동학에 입문하여

황해도 동학농민운동의 선봉장이 됐다. 1896년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울분을 참지 못해 일본인

 스치다를 살해하고 사형을 언도받았다. 고종의특사로 풀려난 그는 191931 운동이 일자 중국 상하이로

 망명, 임시정부요원으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1940년 한국광복군 창설, 임시정부 주석 등을 역임하면서 독립운동에 전념했던 그는 광복이 된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었다. 대한민국의 진정한 독립을 위해 신탁통치 반대운동에 앞장섰던 선생은

1949626일 경교장 집무실에서 비운의 총탄을 맞고 서거했다.

 

눈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는

발걸음을 어지럽게 걷지마라.

오늘 나의 발자국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김구 선생의 고결한 말씀에 눈길이 쏠린다

                             안두희의 총탄에 맞아 서거한 후의 모습

                                    총알이 뚫고간 유리창

  빈소에 조문하는 국민들 당시 서울 시민 140만이었는데 이곳 빈소를 다녀간 사람들의 124만에 이르렀다.

  선생의 서거로 인해 국가적인 슬픔이 얼마나 컸는지 가늠할 수 있는 일이다

                                                           김구선생 국민장 행렬

 

                           백범김구선생은 왜경을 죽이고 마곡사에 숨어지내다 중국으로 건너가셨다

                            마곡사에는 지금도 김구선생이 기거하셨던 건물이 보전되어있다

 

 

 

 

<김구선생이 서거 암살 당시 입고 있던 저고리>

 

지하 전시실에는 경교장의 역사에서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약을 담은 전시물이 있다.

전시물 중에는 김구 선생이 늘 입고 다니던 하얀 저고리가 보인다. 목과 가슴에서 흘러내린

 핏자국이 묻은 옷이다. 그날을 역사가 우리민족에게 영원히 새겨지듯 핏자국은 아직도 선연하다.

 

 

 

 

 

 

 

 

 

 

종로구 평동 108번지에 자리한 경교장은 금광업자 최창학이 1938년에 지은 개인 저택이었다.

건물 양식은 당시로서는 최신식 건물이었다. 건물 인테리어는 물론 내부 마감재도 이태리 대리석을

사용하는 등 최고급 건물이었다. 일제 강점기에 친일파로 알려진 최창학은 광복이 되자 이 집을

임시정부에 제공했다. 김구 주석과 임시정부 요원들이 이곳 숙소로 사용했다. 원래 명칭은

죽첨장이었으나 김구 선생이 근처에 위치한 다리의 이름을 따 경교장이라 지었다고 한다.

 

1949년 김구 선생이 서거한 후 경교장은 중화민국 대사관저, 월남대사관 등으로 사용되었다.

1967년부터는 고려병원과 강북삼성병원 건물로 사용되는 운명을 거쳤다. 그러는 중 민족의 성지인

 경교장을 복원하자는 목소리가 차츰 일게 되었다.

2001년 경교장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29호로 지정되었다. 2005년에는 국가사적 제 465호로

승격되기에 이르렀다. 이때부터 경교장 2층 김구 선생의 집무실이 각종 사료를 근거로 복원되기 시작했다.

강북삼성병원이 이전되고 경교장이 완전히 복원된 것은 20132월이었다. 복원된 경교장 전시실을

지상 1, 2층과 지하1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벽난로가 원형그대로 보존되어있다

 

 

 

김구 선생의 침실>

 

집무실 창문에 두 발의 총탄 자국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1949626일 김구 주석은 창가에 자리에서

 집무 중이었다. 당시 주한미군방첩대 요원 안두희의 접견을 받아들였는데 그는 집무실로 들어서는 순간

선생에게 총을 겨눴다. 처음 총탄은 창문을 관통했지만 나머지 총탄들이 김구 선생의 목과 가슴 등을 관통했다.

 

                                                          

 

 2층으로 올라가면 오토마 체험실이 나온다 원탁으로 둘러앉은 임시정부 요원들이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국무회의를 갖던 장면이 오토마타를 통해 재현되고 있다. 위글들은 권현지님의 서울투어에서

 

 

 

  경교장을 둘러보고 옥탑방 왕세자 쎄트장을 찾아 나선다

옛 기상청 건물을 오르는계단 일단 기상청 건물도 살펴보기위해 계단을 오른다

 

 

오래돤 건물은 조용하기만하다 문이 잠겨있는지 오가는 사람도 없다 주차된차도 없다

 

 

 

                     교남동 오솔길을 지나다보니 원형벤치에 이러한 집처 이야기가 있어 올라가본다

집은 온데간데없고 이렇게 낮은 언덕에 아래 표지판만 있고 잔디밭이다

우리나라 독립운동을 많이 도우신 분이란것만 알고 있었다

 

홍난파선생의 집을 찾기위해 본길로 내려서니 표지판이 보이는데 거주하시는 분이 있는듯

불은켜저있고 문을 흔들어보니 잠겨있다 옆 안내판을 바라보니 휴일은 휴관이라한다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파동2-16 (송월1길 38) (☎ 070-8112-7901)

홍파동 2-16번지에 있는 이 집은 대한제국 시기 항일 언론인으로 유명했던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 대한매일신보 사장의 땅 위에 세워진 것이다. 1917년 경성부청 지적조사국이 발행한

'경성부관내지적목록'에는 이 땅의 소유자가 그의 부인인 메리 모드 베델로 표기돼 있다.

 

 

봉선화는 홍난파의 꽃이다.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심금을 울린 노래였다. 그는 「봉선화」를 비롯해

 「고향의 봄」 「옛 동산에 올라」 등을 만든 작곡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다. 일제강점기부터 지금까지

 온 국민의 입가에 맴도는 노래들이다. 우리의 정서를 가장 잘 표현한 음악가로, 현대음악의 개척자로 손꼽힌다.

 「봉선화」의 작사가 김형준은 ‘봉선화’를 ‘우리(홍난파와 김형준) 신세’에 비유했던가. 그의 말처럼 홍난파의

 삶은 파란만장하다.

홍난파(洪蘭坡, 1898~1941)는 1898년 4월 10일 경기도 화성시 남양(南陽)에서 태어났다. 본명
은 홍영후(洪永厚)로 난파는 일종의 호가 되며, 본관은 남양홍씨이다. 왜정 때 매우 잘나갔던
음악가이자 우리 현대 음악의 중추적인 존재로 '봉선화','성불사(成佛寺)의 밤','옛 동산에 올
라' 등으로 유명하다.

5살에 서울로 올라와 1912년 YMCA 중학부에 들어갔으며, 음악에 자꾸 손과 마음이 가면서 내면
에 숨겨진 자신의 소질을 알게 된다. 그래서 1913년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전문학교인 조선정악
전습소(朝鮮正 樂傳習所) 서양악과에 입학하여 1년 동안 김인식(金仁湜)에게 바이올린을 배웠
으며, 1918년 창가 '야구전'을 작곡, 발표하고 왜열도로 건너가 동경음악학교에 진학, 음악과
문학, 미술을 배우며 문예의 꿈을 키웠다. 그러다가 1919년 유학생들이 벌인 독립운동에 가담
하면서 학업을 그만두고 귀국했다.

귀국하여 경성양악대 제1회 연주회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바이올린 연주
자란 기록을 세웠다. 대한매일신보 기자로도 잠깐 일하다가 1920년 '처녀혼'이란 첫 작품을 냈
는데, 봉선화는 처녀혼 첫머리에 나오는 애수(哀愁)라는 곡명으로 발표된 것이다.
1922년에는 서울 연악회(硏樂會)를 창설해 음악 교육에 나섰으며, 1925년 우리나라 최초의 음
악 잡지인 '음악계(音樂界)'를 창간했다. 그리고 1926년 다시 왜열도로 넘어가 동경고등음악학
교를 졸업하고 동경신교향악단 단원으로 활동했다.

1929년 '조선음악백곡집'과 '조선동요백곡집'을 발표하고 1933년에는 '조선가요창작곡집' 등의
작품을 냈으며, 현제명(玄濟明)과 함께 '봄노래'를 발표했다. 그 외에 바이올린독주곡인 '애수
의 조선','동양풍의 무곡','로망스' 등이 있고, '관현악곡 즉흥곡','관현반주 붙은 즉흥곡','
명작합창곡집','특선가요선집' 등을 냈는데, 그는 우리나라 선율의 요소를 작곡에 반영해 서정
적인 분위기를 그려내고자 했다. 그의 의도는 그의 평론에서도 잘 나타나며, 1930년대 이후 우
리나라 현대 음악 창작의 패턴을 정립한 음악가로 널리 찬양을 받았다.

1931년 바이올린을 더 배우고자 미국으로 넘어가 셔우드(Sherwood)음악대학을 다녔으며, 1933
년 졸업 기념으로 독주회를 가지고 귀국했다. 그리고 경성보육학교와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음
악을 가르치고, 1936년 경성방송 현악단 지휘자 및 빅터레코드의 양악부장을 지냈으며, 이영세
(李永世)와 난파트리오를 조직해 실내악 활동에 나서기도 했다. 또한 1938년 경성음악전문학교
교수로 활동하면서 '음악만필'을 냈으며, '백마강의 추억' 등 14곡의 가요를 나소운(羅素雲)이
란 예명으로 발표했다.

이렇게 우리나라 현대 음악 발전에 크게 공헌을 하며, 주옥같은 작품으로 민중의 마음을 달랬
던 그였지만 그의 말년은 그 초심을 잃으며 추악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친일파로 노선을 바꾸
며 민중의 뒷통수를 제대로 쳤던 것이다.
1937년 독립운동단체인 수양동우회 회원이라는 이유로 검거된 이후, 그해 4월 조선총독부 학무
국(學務局)에서 결성한 친일 단체인 '조선문예회'에 가입하여 왜정 정책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국민총력조선연맹'의 문화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내선일체를 강조하였고 '지나사변(支那事變)과
음악','희망의 아침' 등 친일 성향의 악취나는 작품을 발표하면서 끊임없이 왜정을 찬양했다

 

 

 

 

 

               내부는 휴일이라서 볼수없어 산수처럼님 글에서 빌려왔슴

              여기까지오면서 옥탑방 왕세자 쎄트장을 못찾고 인왕산 오르는 성벽까지 오르고 말았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성벽따라 조금더 올라본다

 

 

 

 

 

                          청와대 쪽도 흐미하게 보이네

                      봄에 올랐던 인왕산도 담아보고

                                      안산도 담아보고

                           북한산도 줌으로 당겨보고 스모크인지 미세먼지인지 주위가 어둡기만하다

 

                  안산 넘어로 해는 기울고 있고

 

                    내려오면서 딜쿠샤가 어디인지 슈퍼에서 물어보니 아래로 푹 꺼저있는 언덕길로 내려가란다

딜쿠샤(Dilkusha)는 일제강점기에 건축된 건물의 이름이다. 미국의 기업인이자 언론인인 앨버트 테일러(Albert Taylor)가

 부인 메리 테일러(Mary Taylor)와 함께 살던 집으로 ‘앨버트 테일러 가옥’이라고도 부른다.

딜쿠샤는 앨버트 테일러가 직접 지은 이름으로 힌두어로 ‘이상향’ 혹은 ‘행복한 마음, 기쁨’을 의미한다.

그는 1923년 딜쿠샤를 짓고 1942년 추방될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딜쿠샤는 붉은색 벽돌로 지은 지하 1층~2층 건물로

 총면적은 624㎡ 정도다. 서양식 주택 중에서도 구성과 외관이 독특한 편으로 일제강점기 건축 양상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화강석 기저부 위로 붉은 벽돌을 세워 교차하면서 쌓은 것이 특징으로 한국에서는 흔치

않은 방식으로 평가된다.

앨버트 테일러는 1919년 3·1 운동을 세계에 알린 인물이다. 그는 조선에서 금광과 무역 사업을 하던 기업가로,

 미국의 통신사인 UPI(United Press International)의 서울 특파원으로 임명되어 언론인으로도 활동했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난 무렵 테일러는 한국 민족대표 33명이 작성한 독립선언서를 입수했으며, 동생을

 통해 몰래 독립선언서를 외국으로 보내 보도했다.

         

테일러는 이후에도 일본군이 수원 제암리에서 주민들을 집단 학살한 제암리학살사건을 취재하는 한편,

 일본 총독을 찾아가 조선인 학살에 대해 항의했다. 이런 사건들로 그는 서대문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하기도 했으며 1941년 자택 감금되었다가 1942년 미국으로 추방되었다. 테일러는 1948년 미국에서

 사망한 이후 유언에 따라 서울외국인묘지공원에 안장되었다.

현재 딜쿠샤는 대한민국 기획재정부 소유로 되어있다. 원래 딜쿠샤는 어니스트 베델(Ernest Bethel)이

양기탁 등과 함께 창간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사옥으로 추정되었다. 서울시는 1995년부터 딜쿠샤의

 문화재 지정을 추진했으나, 건물 기초에 새겨진 ‘딜쿠샤 1923(DILKUSHA 1923)’의 뜻과 건물의 역사가 확실치

 않아 사업이 진행되지 않았다. 딜쿠샤의 역사는 2006년 앨버트 테일러의 아들인 브루스 테일러(Bruce Taylor)가

한국을 방문하며 밝혀졌다. 당시 브루스 테일러는 서울시로부터 명예 시민증을 받기도 했다. 2015년 8월

서울시는 딜쿠샤의 문화재 지정을 추진할 계획을 발표했다.

2016년 2월 서울시와 문화재청, 종로구가 ‘딜쿠샤 보존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이에 따라 딜쿠샤는 원형 복원되어

 3∙1 운동 100주년이 되는 2019년 전면 개방될 예정이다. 2월 28일에는 앨버트 테일러의 손녀인

 제니퍼 테일러(Jennifer Taylor)가 한국을 방문해 앨버트 테일러 부부의 유품과 당시 소장품 등 394점을 서울시에

기증한다고 밝혔다. 기증 물품에는 회중시계 같은 일상품부터 앨버트 테일러가 한국에서 쓴 기사 등 역사적

 물품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백화사전에서                   

테일러는 이후에도 일본군이 수원 제암리에서 주민들을 집단 학살한 제암리학살사건을 취재하는 한편,

일본 총독을 찾아가 조선인 학살에 대해 항의했다. 이런 사건들로 그는 서대문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하기도 했으며 1941년 자택 감금되었다가 1942년 미국으로 추방되었다. 테일러는 1948년 미국에서

 사망한 이후 유언에 따라 서울외국인묘지공원에 안장되었다.

현재 딜쿠샤는 대한민국 기획재정부 소유로 되어있다. 원래 딜쿠샤는 어니스트 베델(Ernest Bethel)이

양기탁 등과 함께 창간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사옥으로 추정되었다. 서울시는 1995년부터 딜쿠샤의

 문화재 지정을 추진했으나, 건물 기초에 새겨진 ‘딜쿠샤 1923(DILKUSHA 1923)’의 뜻과 건물의 역사가

확실치 않아 사업이 진행되지 않았다. 딜쿠샤의 역사는 2006년 앨버트 테일러의 아들인

브루스 테일러(Bruce Taylor)가 한국을 방문하며 밝혀졌다. 당시 브루스 테일러는 서울시로부터 명예 시민증을

받기도 했다. 2015년 8월 서울시는 딜쿠샤의 문화재 지정을 추진할 계획을 발표했다.

2016년 2월 서울시와 문화재청, 종로구가 ‘딜쿠샤 보존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이에 따라 딜쿠샤는 원형

복원되어 3∙1 운동 100주년이 되는 2019년 전면 개방될 예정이다. 2월 28일에는 앨버트 테일러의 손녀인

 제니퍼 테일러(Jennifer Taylor)가 한국을 방문해 앨버트 테일러 부부의 유품과 당시 소장품 등 394점을

서울시에 기증한다고 밝혔다. 기증 물품에는 회중시계 같은 일상품부터 앨버트 테일러가 한국에서 쓴 기사

 등 역사적 물품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소재지  서울시 종로구 행촌동 1-88 1-89번지

                             딜쿠샤 앞에는 이렇게 보호수와 권율장군 집터가 있다.

권율 장군 : 1537~ 1599


임진왜란 때 남원에서 고바야카와의

정예부대를 대파하고, 행주대첩에서

우키타를 위시한 부대를 격퇴하였다.

 

권율도원수(權慄都元帥)집터
행촌동1-113번지에는 행주대첩으로 유명한 권율장군의 집터라고 하는 표석만 달랑

 남아있다. 권율은 장군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문과에 급제한 문신(文臣)이며

중종32년(1537)에 태어나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전라도 광주목사로 있으면서 남원

 등지에서 왜군을 격파한 공적으로 전라도순찰사가 되었다.
이듬해 행주산성에서 왜군의 끈질긴 공격을 막아내어 결국 왜군들이 서울을 포기하고

남하하는 계기가 되었다. 선조32년(1599)에 사망하였으며 임진왜란이 끝난 후 선무공신 1등에

 책록 되고 영가부원군에 추증되었다.
권율장군은 인접한 필운동12번지 현재의 배화대학교 자리에 살다가 사위인

 이항복대감에게 물려주고 인근인 행촌동으로 이사한 것이라고한다. 권율장군 집터 표석

바로 옆에는 은행나무가 있는데 이 은행나무는 권율장군 집 안에 있었다고 하며 은행나무로

 인해 이곳을 은행동 혹은 은행나무골이라고 하였다. 수령 460여년인 은행나무의 높이는

 24m가 넘고 흉고(胸高)는 약7m에 달하며 1976년 종로구 지정보호수가 되었다.
이 은행나무는 신목(神木)이어서 나무에 올라가는 사람은 괴질(怪疾)을 앓거나 변사(變死)하며

 평상시에는 열매를 맺지 않지만 나라에 이변이 생길 때에는 반드시 열매를 맺어 사전에

예고해 준다는 설이 있다

 

행촌동에는 표본실의 개구리 염상섭씨와 우리나라 최초의여기자

최은희 씨집등이 있는데 도시개발로 흔적도 없다고 한다

 

             권율장군의 집터를 뒤로하고 다시 올라왔던길로 내려가며 월암공원을 경유 서대문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세트장이 있던 다세대 건물과 옛 풍경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계단길 

월암공원앞에 다세대주택이 쎄트장인데 그걸 못찾고 저주택이 쎄트장일줄은 꿈에도

모르고 그렇게 해메었다니 내가 생각해도 한심하다 결국 대한민국 구석구석에서

빌려왔다

                월암공원 전경 이로써 봄에 인왕산 성곽을 못돌아본 구간을 둘러보게 됐다


Annie's Wonderland - Banda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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