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송현리 20-1
창녕 송현동고분군은 북서쪽으로 인접한 교동고분군과 함께 목마산(牧馬山) 남쪽 기슭에 직경 20m 이상의
대형고분을 비롯해서 중·소형 고분 30여 기가 분포하고 있다. 1963년 1월 21일에 사적 제81호로 지정되었다가
2011년 7월 28일에 지정 해제되고 사적 제514호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으로 재지정되었다. 면적은
216,360㎡이다.
이 고분군은 1917년 일본인 학자 이마니시〔今西龍〕에 의해 처음으로 수십여 기가 분포하는 것이 보고되었다.
본격적인 조사는 2001년 경남문화재연구소에 의해 지표조사가 실시되어 21기의 고분이 분포하고 있는 것이
확인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확인된 고분 가운데 제2∼7호분에 대해서는 정비복원을 위한 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 그 과정에서 제6·7호분은 유구의 중요성이 인정되어 학술적인 정밀발굴조사로 전환되었고 조사도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가 담당하게 되었다. 발굴조사는 2004년 4월 20일부터 2006년 3월 24일까지 3차에
걸쳐서 330일간 실시되었다
송현동고분군 제6·7호분은 남북으로 연접한 표형분(瓢形墳)으로서 남쪽의 제6호분이 북쪽의 제7호분보다
먼저 축조되었다.
그중 제6호분은 원모양에 가까운 상태로 외형이 잔존하고 있었는데 구획 성토한 봉토는 높이 8.5m,
직경 22m의 원분이었다. 경사면을 반지하식으로 굴착해서 축조한 돌방〔石室〕은 북쪽에 입구를 둔 앞트기식
〔橫口式〕으로 길이 8.5m, 폭 1.4∼1.6m, 높이 2.2∼2.6m, 장축 N-13°C-W의 규모였다. 앞트기부〔橫口部〕
북쪽 단벽을 제외한 나머지 세 벽을 깬돌〔割石〕으로 상부가 내경하도록 쌓고 그 위에 8매의 장대석을 걸쳐
평천장을 이루었다. 바닥에는 널〔木棺〕을 안치했던 깬돌으로 축조한 널받침〔棺臺〕이 있고 내벽 곳곳에 점토
또는 벽석 위에 산화제이철과 망강을 혼합해서 만든 흑갈색 안료가 도장되어 있었다.
유물은 중간의 널받침을 중심으로 그 양단에는 짧은목항아리〔短頸壺〕, 긴목항아리〔長頸壺〕, 뚜껑굽다리접시
〔有蓋高杯〕, 적갈색토기 등이 놓여 있었고 널받침에는 칠기류와 철제 농·공구류, 말갖춤〔馬具〕류 등이 있었다.
북쪽에 있는 제7호분은 경작지 개간으로 인하여 봉토 상부가 깎여나가 잔존 높이 5.6m, 직경 20m의 장타원형
원분으로 남아 있는데, 봉토는 역시 구획 성토되었다. 경사면을 절개해서 묘역을 정지하고 돌방을 배치한 후
밀봉하고 봉토를 완성하는 순서는 전자와 동일하였다. 돌방은 북쪽에 입구를 둔 앞트기식으로 길이 8.4m,
폭 1.8m, 높이 2.3∼2.6m 규모이며 앞트기부가 있는 북쪽 단벽을 제외한 나머지 세 벽을 깬돌으로 상부가
내경하도록 먼저 쌓았다. 그리고 그 위에 9매의 장대석을 걸쳐 평천장을 이루도록 하고 바닥에는 녹나무
〔樟腦木〕로 만든 원통모양널〔圓筒形木棺〕을 안치한 널받침이 중앙에 있었다. 이 널받침과 앞트기부 사이의
공간 바닥에는 각재 12매를 깔아두었고 앞트기부 바깥에는 길이 2.4m 무덤길이 있었다.
유물은 중간의 널받침을 중심으로 양단벽 아래 공간부와 널 그리고 널 동서 양쪽에서 확인되었다. 초본류 또는
초본류를 가공한 유기물질로 깔거나 덮어 중첩되게 또는 소쿠리와 같은 용기에 담아서 부장하였다. 그중 널은
길이 3.3m, 너비 80∼90㎝의 세장방형으로 단면은 초승달과 같은 형태이며 두께는 9㎝ 정도이다. 널을 포함해서
토기류, 금속류, 목제류 등 모두 600여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남벽 아래 공간에서는 주로 긴목항아리
〔長頸壺〕, 연질유개발(軟質有蓋鉢), 뚜껑굽다리접시〔有蓋高杯〕, 뚜껑접시〔蓋杯〕, 굽다리접시〔高杯〕
세트 등의 토기류와 쇠도끼〔鐵斧〕, 쇠손칼〔鐵刀子〕, 목제 절판세트, 국자모양칠기, 봉상칠기 등이 놓여 있고
뚜껑접시 안에서는 복숭아·참외씨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널 동쪽에서는 봉상칠기, 컵모양목기, 큰입작은항아리
〔廣口小壺〕, 화살, 짧은목항아리 등이 놓여 있었고 서쪽에서는 말갖춤류와 무기류, 봉상칠기, 부채손잡이와
순장(殉葬)한 20대 여성의 치아가 발견되었다. 또한 앞트기부 아래 공간에서는 둥근바닥짧은목항아리〔圓底短頸壺〕
, 굽다리긴목항아리〔臺附長頸壺〕, 참다랑어 뼈가 담긴 뚜껑굽다리접시〔有蓋高杯〕, 금제가는고리귀걸이
〔金製細環耳飾〕, 쇠도끼〔鐵斧〕, 각재, 사람뼈 등이 있었다. 그밖에도 봉토 조사과정에서 대형토기조각과
말〔馬〕치아 등 제사유물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2006∼2008년 사이에도 인접한 제15∼17호분이 조사되었다. 그 중에서 길이 8.56m, 폭 1.7m, 높이 2.25m
규모의 앞트기식돌방을 가진 제15호분에서 순장된 사람뼈 4구가 발견되어 양호한 1구를 복원하였다. 그 결과,
복원된 1구의 사람뼈는 16세 여성〔송현아이〕의 것으로 추정되는 등 송현동고분군에 대한 다양한 방면에서 심도
있는 연구가 진행 중에 있다.
문화해설사가 열심히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교리고분군이 보인다
개방된 무덤의 석실
송현동고분군은 지금까지 소개된 고분의 구조와 축조기법 그리고 돌방 내부에서 출토된 유물의 특징을
참고하면, 5세기 중반에서 6세기 전반 사이에 축조된 창녕지역의 유력한 지배자의 무덤으로 판단된다.
이 고분군은 창녕지역과 신라와의 관계, 일본열도와의 교류관계를 해명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3D 스캔으로 복원한 1500년전 가야인 (서울=연합뉴스) 지난해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가 조사한 창녕 송현동
15호분 출토 순장 인골 4구 중 중 금귀고리를 한 무덤 입구쪽 여성을 3D 스캔으로 복원한 매장자세. 연구소가
이들 순장 인골에 대한 분석을 통해 순장자 중 남성 2명은 같은 모계혈족에 속하며, 아울러 그들의 식생활
양태도 밝혀냈다. << 문화부 기사참조,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제공 >>
송현동 고분 순장자 (창녕=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가 발굴한 경남 창녕 송현동 고분군 제15호
석실분 내부 북벽에서 발견된 순장자. 이곳에서는 모두 4구에 이르는 순장자 인골이 발견됐다. 이 중 북쪽 벽면과
나란히 누운 인골은 20-30대 성인 여성으로 신장은 135cm 가량으로 밝혀졌다. << 문화부 기사참조 >>
일제강점기때인 1910년세키노 다다시(關野貞)가 방문하여 목마산성을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던 고분을
처음 소개하였다. 이후 1917년 9월이마니시 류(今西龍)가 고분의 분포 및 수습조사를 하였고,
하마다 고사쿠(濱田耕作)과 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의 21호분과 31호분 발굴, 다니이 사이이치(谷井濟一)의
5호분, 6호분, 7호분, 8호분, 89호, 10호분, 11호분, 12호분, 91호분의 조사가 이루어졌다. 해방 후 경작과
도굴 등으로 파괴되다 1963년 1월 21일에 창녕교동고분군은 사적 제80호로, 창녕 송현동고분군은 사적 제81호로
각각 지정되었다. 교동과 송현동고분군은 1980년대 후반부터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조사되어 2011년 7월 28일
두 고분군의 역사성과 특성을 고려하여 사적 제514호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으로 재지정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백과사전에서
송현동 고분군을 뒤로하고 양파시배지와 창녕성씨고택으로
마을앞 논에도 양파를 재배하고있다
창녕성씨고택:창녕군 대지면 석동1길 11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전처 성혜림이
유년시절을 보낸 것으로 알려진(살지 않았다는말이 더 신빙성이 있는것 같다)
창녕지역에 처음으로 양파를 보급한 성씨 문중의 주택으로 안채, 사랑채, 곳간채 2동
대문채, 변소 등 모두 6동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성씨 고가는 현재 큰집 日新堂(일신당), 둘째 我石軒(아석헌)
셋째 石雲堂(석운당), 넷째 慶勤堂(경근당)의 집으로, 본채와 별당으로 1만 평 남짓하다.
이 집들도 6.25때 미군 24사단이 사령부로 사용하다 북한군에 밀려 후퇴를 하면서 문서를
태우다 건물까지 상당부분 소실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방치되다가 1998년 성기학 회장의
노(영원무역회장)모가 창녕 옛집에 가고 싶다고 하여 왔는데 집이 너무 낡아서 복원을 하기 시작하여
지금도 공사 중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집은 현재 성원무역에서 귀한 손님을 접대하는 장소로 이용하기도 하고 인문학
강좌를 개최하기도 하여 현재도 아주 유용하게 활용되고 있습니다
안에서본 출입구 소슬대문 지금은 굳게 잠겨있고 뒷 동문쪽으로 들어간다
흔히 우리가 하는 말로 3대 부자 없고 3대 거지 없다고들 합니다. 우리의 근대사를 보면 일제시대와
6.25동란이라는 엄청난 난리와 세계 최고속의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왕조가 무너지고,
양반사회가 무너지고, 농경사회가 무너지면서 모든 것이 뒤죽박죽되었습니다.
일제시대와 6.25동란을 거치는 과정에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했다는 이유로 또는 부르주아라는
이유로 대창에 찔려 죽기도 하고 총살을 당하기도 하여 멸문지화를 당한 명문가들이 수두룩합니다.
그리고 전쟁 후에는 6.25때 빨갱이 노릇을 한 사람이 있는 집안사람들은 함께 빨갱이로 몰려
공직에 나아갈 수 없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여권 발급, 취업, 등등에서 연좌제 그물망에 걸려
임의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성유경은 일본 외국어전문학교를 다녔지만 뜻한 바 있어 학교를 중퇴하고 신간회 등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일제 말부터는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들과 교유하며 고향에 첫째 부인과
세 딸이 있었지만, 뜻을 같이하던 김원주를 맞아 아들 일기와 딸 혜랑과 혜림을 두었습니다.
유경은 남로당 재정부장을 지내다 1948년 월북하였고 그 아내 김원주도 같은 해 남북정치협상
당시 여맹 대표 자격으로 방북했다가 월북하였고, 아들 성일기는 유격대원이 되어 남도부 빨치산
참모장으로 활약하다 전쟁이 끝난 뒤 창녕 당숙집에 숨어 지내다 1953년 국군 특무대에 체포
되었습니다. 그리고 막내 딸 혜림은 김정일의 장남 김정남을 낳았으니 창녕성씨 집안은
그야말로 빨갱이 중에서도 빨갱이집안이라 할 것입니다.
이런 연유로 60~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창녕성씨 집에 발을 내딛는 자체가 빨갱이임을
자처하는 셈이니 감히 뉘라서 고향집을 찾을 수 있었겠습니까?
성기학 회장이 1998년 노모의 뜻에 따라 창녕고향집을 뒤늦게 찾을 수밖에 없었던 배경에는
이 같은 성씨 집안 저간의 사정 때문이었을 것입니다.선비님의 글에서
창녕성씨 계보.
구연정은 찬영의 장남 낙문 장손 윤경에 이어지고
아석헌은 낙교가 자식이 없어 낙문의 차남 유경을 입양함으로서 유경에게 이어짐.
성기학 회장과 김정일을 촌수로 따지자면 6촌 처남남매지간임.
성혜림은 김정일에게 첫사랑이라 할 수 있고 그의 장남 김정남을 낳았지만
김정일은 권력승계과정에 책 잡힐까 봐 아버지 김일성과 주변에 비밀에 부쳤음.
선비님의 글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1855년 성규호가 이 집을 최초로 지은 이후 위와 같은 역사의 격랑을 넘으면서도
오늘에 이렇게 건재할 수 있음은 이 집안 특유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성규호는 스스로를 돌로 낮추어 아호를 아석(我石)이라 하였고 1863년 병자년 기근 때에는 곡간을
열어 이웃에 양식을 나누어 주었고, 그의 손자 낙안과 낙성, 증손 재경도 조부의 뜻을 좇아 호를 석민,
석운, 우석이라 하여 같은 길을 걸었는데, 손자 낙안과 낙성은 지양강습소(池陽講習所)를 개설
후학을 가르치고 부녀자까지 교육하다가 일제 때 철거되었는데 그 자리가 지금의 대지초등학교입니다.
그리고 그는 1953년 우리나라 최초로 양파씨를 가져와 농가에 보급하였습니다.
증손 재경은 양파 채종과 재배기술을 확보하여 새마을 운동의 모델이라 할 수 있는 경화회라는
농민회를 조직 양파를 특작물로 농가소득을 올렸으며, 1942년 춘궁기에는 면민에게 곡식을 나눠주기도
하였고, 1981년 그가 사망 시에는 그가 운영하던 협성농산 주식을 경화회 조합원들에게 대부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현재 성기학 회장은 경화회 회관을 새로 지어 군민에게 기부하였으며, 창녕성씨 고택을
학회나 세미나 장소로 빌려주기도 하고 창녕군민을 위하여 유명 강사를 초빙하여 강좌를 여는 등으로
창녕성씨 고택이 한 문중의 집이 아닌 창녕의 문화센터 역할을 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선비님의 글에서
뒤쪽으로 대나무 숲이 있는 건 은은함을 좋아한
선조들이 직접적인 햇빛보다는 대나무 숲을 통과하는
그 은은한 빛을 특별히 좋아했기 때문이라한다.
뒤뜰로 연결된 대나무밭길
일신당
비교적 늦게지은 경근당 안채 마루는 사방에 유리문을 달았고 실내 목욕탕 까지
갖춰져 당시의 서양건축의 편리함을 도입 한것같고, 집 사이의 담장도 전통담장과
달리 낮게 한것은 일본 유학을 다녀온 집안 어른들이 꾸민것 이라한다.
문화해설사분의 해설을 열심히 듣는다
석운재는 1863년 대원군이
서원을 철퍠하자 아석선생이 관산서원의 안채를
그대로 옮겨다 지었다고 한다.성정겸님글
성대경교수와 임국희 씨의 아버지가 살았고 성대경 교수도 여기서 낳았다고함
이 아석헌은 이곳에 자리한 서른채의元宅이다.
참고로 이집을 관리하고 있는 영원무역 성기학 회장이 자기의 고조부이신
성규호(成圭鎬)선생이1885년 노모를 모시고 이곳에 와서 터를 딱고 지은집이며,
그 이후 분가한 손자들이 집을 잇대 지어면서 4개
동 30채 규모의 한옥촌이 생겼다고 한다.
이 아석헌에 이어 지은집이 1860년데 에
석운재(石雲齋) 이고
1920 년대에는 경근당(慶勤當)이며,
1930년 대에는 일신당(日新堂)을
지엇다고한다.
석동마을 큰길에서본 출입 솟을대문
성씨고택을 뒤로하고 영산으로 저녁을 먹기위해 이동한다
만년교(홍교)
영산군수를 했다는걸로 장군칭호를하고 비를세우고 공원을 조성하고 전두환이 선조라고
여기도 미화 했다는 말들이 많은 비석이다 지금도 시시비비가 끝이지 않는다
여기저기 흟어저있는 유허비들을 한군데에 모아놨나보다
영산읍내의 모습
서산으로 기우는 해 일몰이 가까워진다
반영으로비친 홍교
2016년 12월1일
'경남.울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동 북천 코스모스 축제 (0) | 2017.10.02 |
---|---|
울산 태화강 역에서 십리대밭길 트래킹 (0) | 2017.05.15 |
통영 장사도 (0) | 2017.04.13 |
창녕 우포늪 (0) | 2017.04.10 |
경남 양산 원동 순매원 (0) | 2017.03.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