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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광주.제주

구례 운조루

 전남 구레군 토지면오미리103(운조루길 59)

운조루는 대구 출신이며 당시 낙안 부사였던 류이주가 건축했다 1776년 상량식을가지고

6년만인 1782년 그가 용천 부사로 있을 때 완성했다 설계는 본인이하고 조카 덕호에게

털끝만큼의 차이가 없도록 짓게했다 류이주는 운조루 터를 닦으면서 하늘이 이땅을

아껴두었던 것으로 비밀스럽게 나를 기다린것 이라고 기뻐했다

 

류이주는 그가 처음 이사와 살았던 구만들의 지명을 따 호를 귀만이라 했으며 그의집을

귀만와라고 불렀다 여러채가 연결되어 品 자 모양을 갖춘 이집은 안채 사랑채 행랑채

누마루채 및 방마다에 당호와 방의 별칭이 붙어 있으나 전체를 일러 운조루라한다

      

      집앞에는 이러한 거대한 연못이 있다.

천원지방(天圓地方)-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원칙대로 네모 난 연못 가운데에 둥글게 섬을 만들었다

      논산 명재고택에서도 이와 비슷한 연못이 집앞에 있던데 화(火)를 다스리는

      의미에서 그랬을까?

기차 몇 량은 족히 되어 보이는 긴 행랑채는 운조루가 한때 거대한 장원의 중심지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집 앞을 차지한 연못이 운조루의 분위기를 활달하고 풍요롭게 만들어 행랑채와 연못 사이로 난 고샅을

 걸어 솟을대문으로 향하는 기분도 유쾌하다. 운조루 솟을대문에는 호랑이 뼈가 걸려 있다. 이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운조루를 지은 유이주(柳爾胄, 1726~1797)는 맨손으로 호랑이를 잡을 정도로

힘이 넘치는 무신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집 솟을대문에 그가 잡은 호랑이 뼈를 줄줄이 걸어 놓았다.

 

호랑이 뼈의 주인공 유이주가 바로 이곳의 문화 유씨 입향조다. 그는 경상북도 출신이지만, 구례에 인접한

 낙안에 수령으로 왔다가 아예 운조루를 지어 눌러앉았다. 이때가 1776년이다. 운조루는 처음 100여 칸 정도의

 규모였으나, 현재는 63칸 정도가 남아 있다. 넓은 대지에 충분한 공간을 확보하여 개방적으로 짓는 전라도

 한옥과 높이를 강조한 경상도 한옥이 잘 조화를 이룬 건축이다. 영남 사람으로 호남에 뿌리내린 유이주의 삶이

 녹아 있는 셈이다.

   운조루 솟을대문에는 호랑이 뼈가 걸려 있다. 이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운조루를 지은 유이주(柳爾胄, 1726~1797)는

   맨손으로 호랑이를 잡을 정도로 힘이 넘치는 무신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집 솟을대문에 그가 잡은 호랑이 뼈를 줄줄이 걸어

   놓았다. 그런데 호랑이 뼈가 워낙 귀하다 보니 누군가 하나둘 집어 가고 이제는 엉뚱한 짐승의 뼈를 대신 걸어 두었다.

   이 부분에서 호랑이 뼈다 아니다라며 종부인 할머니와 그 아들의 이야기가 엇갈린다.왼쪽것이 호랑이 뼈라는 할머니말씀                 

 

 

 

       행랑채의 이문은 하인들이 오가는 사람들의 신원을 확인하는 문지기 역할을 했으리라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은 종가집 할머니다 오가는사람들의 입장료를 받는 창구로 이용하고 있다

                     안에서 바라본 행랑채

           기나긴 행랑채는 농사 짓는 농부들과 하인들의 생활공간이다 지금 이쪽은 한옥체험장으로 밖에서는

            별도의 가옥으로 사용하고 있다

 

 

                           가빈터 옆에는 화장실이 있다

                   사랑채의 공부하는 학습장소

사랑채 가운데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에 어둠이 들어차 있다. 안채를 벗어날 수 없던 여인들의 까맣게 탄 가슴을 보는 듯하다.

                       사랑채 사랑채앞마당은 투호놀이 터로 자리하고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 사랑채가 나타난다. 하지만 잠깐 만에 집을 받친 기단이 보기보다

 매우 높다는 것을 눈치채고 만다. 그렇다면 사랑채가 꽤 높은 건물인데, 사람을 압도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아마도 마당의 넉넉함에 기인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을 윽박지르지 않는 사랑채의 관대함은 일정 부분 넓은

 기단의 공으로 돌려도 좋을 것 같다. 기단 위에 늘어선 키 작은 나무들이 사랑채가 주는 수직적인 긴장감을

 누그러뜨려 마당과 건물의 조화를 이끌어 낸다.백과사전에서

 

                  240년전에 지어진 집 많이 낡아 오래된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체험장으로 사용하는듯 옛날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다

 

                   마루와 디딤돌도 세월 앞에는 장사가 없는 모양이다 사람이나 물건이나 오래되면 이렇게 되는것

                           사랑채거실 오래된 그릇들도 보이고

                                    운조루내의 운조루 루각

 

                  운조루의 기둥 무늬도 범상치 않고 저밑에 진열된 수레바퀴는 상상을 초월한다

사랑채 누마루 난간의 연꽃

사랑채 누마루 난간의 연꽃 위사진 청색원안에

 

                                       운조루 기둥모양

조선 사대부의 로망이 담긴 누마루

<전라구례오미동가도>, 1800년대 (추정)

 

<전라구례오미동가도>는 1800년 전후의 운조루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다. 원색으로 사랑마당 가득 그려 놓은

 화초의 화려함 때문에 사랑마당에 통째로 정원을 들인 것은 아닐까 하는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마당 없는

 정원이 한옥에서는 매우 이례적이기 때문이다. 사랑마당에 그린 화초는 자연을 집 안으로 들인 과장된

 표현으로 보인다. 누마루에 오르면 이 그림에 나타나는 정취를 직접 느낄 수 있다. 실제로 누마루에서는

 마당에서 느꼈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정서에 빠져들게 된다.백과사전에서

                            세월이 말해주는 운조루의 석가래와 기둥들

 

 

 

 

헛간에 네모 난 뒤주와 함께 그 보다 조금 작은 둥근 나무통이 있는데

그 밑으로 글씨가 쓰여 있어 읽어보니 타인능해(他人能解)다.

 

타인능해(他人能解)란 다른 사람도 열 수 있다,

(끼니가 떨어진 사람이면) 누구나 퍼 갈 수 있다는 뜻이다.

 

배고프면 와서 먹을 만큼 쌀을 가져가게 한 것이다.

직접 쌀을 퍼 주면 자존심 상하지 않을까 하는 배려와 함께.

 

옛 조선조가 곧 망할 듯 하면서도 500 년을 버티어 온 뒤에는 이런 면이 있었다.

어른들 이야기 들으면 옛날 부자는 혼자 잘 먹고 잘 산 것이 아니었다.

 

우리나라 사람은 부자라면 괜히 질투들 하고 그래 라는 소리가 가끔 들린다.

()를 정당히 이루고, 세금 꼬박꼬박 내면 누가 뭐라고 할 것인가?

또 옛 사람은 청부(淸富)라도 주변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았다.

 

지리산 자락은 공비활동과 그 토벌작전이 심했던 곳이다.

그 험한 세월을 지나며 운조루가 온전했던 것은 인심을 잃지 않은 탓이리라.

 

금환낙지, 금귀몰니 따위보다 이 집을 명당으로 만든 것은

타인능해 라고 쌀 뒤주에 써 붙인 그 정신 일 것이다.

 

 

                               장독대

        둥근 두리기둥에서 안방마님의 권위가 느껴진다. 작은 부엌이지만 보기와는 달리 집 안 어디로든 통하는 생활의 중심이다

 

        건축적으로 사랑채의 누마루가 운조루의 중심이라면, 생활에서는 안채, 특히 '큰 부엌'이 운조루의 중심이 된다.

        운조루에서 풍수는 매우 중요한 건축 요소다. 때문에 이 집의 부엌에도 풍수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유이주가 집을

        짓기 위해서 땅을 파다 보니 지금의 부엌 자리에서 거북 모양의 돌이 나왔다고 하는데, 그 돌이 최근까지 전해 내려오다

        누군가의 손을 타 사라졌다는 이야기다. 수명을 뜻하는 거북이 나온 자리에 부엌을 들인 것도 매우 의미심장하다. 부엌은

        사람 생명을 건사하는 중심으로 집의 어느 곳과도 끊어지지 않아야 한다.

              안채의 좌우 채를 2층으로 나눈 모습에서 영남 한옥의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

 

       실제로 큰 부엌은 다른 공간으로의 접근성이 뛰어나 생명의 중심점 구실을 충실히 해낸다. 여러 개의 마당과 연결되어

,      사랑채는 물론이고 작은 부엌을 통해 사당으로도 연결된다. 이런 접근성은 외부에 여인을 노출시킬 수밖에 없는데,

       이를 막기 위해 부엌 주위에 T자 모양으로 아담하게 담장을 쌓았다. 당시 여인들은 그렇게 바깥 세계와 격리된

       채 집의 생명을 키워 내야 하는 운명을 짊어지고 있었다.

                    이 2층 다락문으로 바같세상을 구경했으리라

                         안채 아래층 창고를 열어보니 이런 아주옛날 물지게 똥지게로 사용하던 것이 지금도 그대로있다

                 한쪽칸을 열어보니 이렇게 소금창고로 쓰이고 있다 혼자 사시는분이 무슨 소금이 이렇게 필요할까?

                               부엌에 진열된 생활용구들

                          사용하지 않은게 오래된듯한 부엌의 솥들

                                         부엌방 출입문

                          부엌물을 열고 나가니 이렇게 멋진 우물이있다 위에 돌로 우물정자를 ~~

                                         뒤뜰 화단

        마당에는 돌을 파서 만든 물확(가운데가 움푹 팬 물건으로 돌절구 등 생활에 쓰이기도 했고, 물을 가두어 두기도 했다)이

        여러 개 있다. 작은 공간에 답답하게 갇혀 있던 여인들에게 물확은 단순한 물건 이상이었을 것이다. 때로는 생활에

        이용되기도 했지만, 물을 담아 물고기를 풀어 놓으면 훌륭한 어항이 되기도 했다.

      이곳에는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물확이 하나 있다. 대청 앞에 놓인 물확은 안주인이 세수를 하거나 손을 씻을 때

      쓰던 것이다. 그 정도 호사를 누리기는 했지만 안주인이라고 해서 여인의 삶이 그리 녹록한 것은 아니었다.

        안채왼쪽 벽면에는 단순한 듯하지만 가만히 보면 미묘하게 움직인다. 안채의 벽면은 정중동의 은근한

        우리 문화를 담고 있다.

 

                 행랑채에서 입장료를 받는 할머니(85세)가 기거하고 잇는 안채에 생활용품들

                   소죽도 끓이고 군불도 지피는 작으마한 부엌

 

                    뒤뜰에있는 방들 살림을 도맡아하는 여성들의 방이었을것 같다

                               2층 다락으로 오르는 계단

                   지금은 사용을 안해 이렇게 생겼지만 옛날에는 살림하는 여성들이 밖깟출임이 어려우니 여기 다락방에서

                   외부의 풍광을 살펴보라고 배려한 공간이 아니었을까

 

바로 이 지점이 높이를 강조하는 영남 한옥과 개방감을 강조하는 호남 한옥이 운조루에서 만나는 부분이다.

기단에 꽃과 나무를 심은 아이디어가 기발하다. 건축을 모른다면 생각하기 어려운 구상이다. 여기에서 이 집을

 경영한 유이주가 풍부한 건축 경험을 가진 건축가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실제로 남한산성 같은 성곽이나

 공공건물의 정원 공사에 참여한 이력이 있다. 기단 위에 만든 화단의 회양목, 밥티꽃, 싸리꽃, 동백꽃,

자목련으로 사랑마당을 풍요롭게 만든 건축적 접근이 가능했던 배경이다.백과사전에서

    아랫사랑채 선생님을 모시고 공부하는 공부방과 그옆에 여름철을 시원하게 보낼수있는 귀래정과

    마을 노인들이 모여 환담을 나누거나 식객들이 잠시 유숙하는 곳

 

 

                   굴뚝들을 낮게하여 연기가 위로 나가지 않게 서민들을 배려하고 있다

 

    기단에 구멍을 내어 연기를 빼내는 가렛굴은 굴뚝 역할을 하는데, 뒤쪽의 창호와 잘 어우러진다.

                                       사당

 

                          밖에서본 행랑채의 한옥체험 숙박 시설

       나오면서 다시한번 담아본다(좌측이 서행랑채 우측이 동행랑채) 후손들이 다 잘되어있는데

       할머니의 아들만 병고에 시달리며 근근히 생활한다고 한다 며느리도 무슨사연인지 없는것

       같고 손자들도 할머니가 거두신다고 아마 입장료 받아서 생활하시는것 같아서 안타깝다

                

                      오미리 앞에 팔처지는 넓은 들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