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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광주.제주

담양 창평 슬로시티 삼지천마을

 

삼지내 마을은 500여년 전 고경명 장군의 후손들이 모여 살던 곳이었다.

   아시아 최초의 슬로시티마을이다.

월봉천, 운암천, 유천의 물길이 마을 아래에 모인다 하여 삼지천(三支川) 이라고 불리는 마을

우리의 전통가옥과 돌과 흙으로 쌓아올린 돌담길이 마을 전체를 굽이굽이 감싸고 있어서

마을을 걷다보면 옛 선조들이 살았던 옛 정취를 물씬 느낄 수 있다

3.6km에 달하는 돌담길은 대한민국 등록문화재로도 등재가 되어 있다.

   슬로시티의 시작점은 느리게 먹고 느리게 사는 삶을 지향하는 것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에서 시작된 슬로시티 운동은 전세계 각 국으로 퍼져 2013년 6월 기준, 

   27개국 174개 도시가 슬로시티에 가입되어 있다. 슬로시티 국제연맹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지역 고유의 전통 문화가 보존되고 있는지, 주변 환경을 고려한 환경 정책을 유지하고 있는지 등의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2007년, 삼지내마을은 까다로운 심사 끝에 슬로시티 연맹에 합류하게 되었다.

 

              창평슬로시티로 지정된 마을로 쌀엿과 한과가 널리 알려진 마을이기도 합니다.

 이집은 쌀엿을 만들어 파는 집입니다

창평쌀엿은 조선시대 궁녀들에 의해 알려지게 됐다. 바삭하며 이에 붙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이 마을은 명절마다 전통쌀엿과 한과를 찾기 위해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창평쌀엿을

 만드는 가장 큰 비법은 바로 오랜 기다림과 인내, 그리고 정성. 

쌀엿이 완성되기까지, 끝없는 기다림과 고단한 과정의 연속이다. 식혜에서 조청,

그리고 갱엿을 만드는 작업은 꼬박 하루를 쏟아 부어도 모자라다.

그 가운데 ‘바람 넣는 작업’은 쌀엿을 만들 때 가장 중요한 과정이다.

갱엿을 늘려 화롯불 위로 두 명이 잡아당기며 바람(수증기)을 넣는 작업이다.

 무려 80번~100번 정도의 늘림이 필요하다. 수증기가 들어간 엿가락은 결이

 예쁘게 만들어지며 바삭한 창평쌀엿이 완성된다.

 

정원이 아름다운 갑을원 민박하기에 딱 좋은집입니다 

들어가 보지는 않았지만 음식점입니다

 

 

 

                  한옥체험을 할 수 있는 한옥들도 종종 있습니다

 

플록스가 아닌지요 

참깨 

마을길은 마치 미로처럼 연결되어 있습니다.

돌담길을 걷고 싶다면 담양 창평슬로시티 삼지내마을로 가보길요.

건물들은 옛 가옥이고 마을길은 온통 돌담장 길입니다

창평 남극루는 담양군 향토유형문화유산제3호로 담양군창평면 삼천리에 위치해있으며

삼천리 하삼천 마을논가운데세워진 남극루는 1830년대 장흥인 고광일을 비롯한

30여 인에의해 지어졌으며 원래 현 창평면사무소앞인 옛창평동헌자리에 있었으나

1919년지금의자리로옮겨세운것이라한다

마을사람들은 양로정이라 부르고 있다

현제 정자에는 남극루라는 현판은 물론 문기.중수기등 아무런현판도 걸려있지않으나

걸려있던 흔적을 여기저기서볼수있다

특히2층 난간에새겨져있는 문양이 아름답다

정면3칸 측면2칸의 2층형건물로 담양지방의다른정자보다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고있다

 

 남극루

남극루로가는 길가에는 탐스런 포도가 주렁주렁

이집도 한옥민박집으로 사용하는가보다

                   대문사이로 살짝 담아본 안채 깨끗하고 정리가 잘되어있는 주거공간이다

 

 

                           담장에는 능소화와 배롱나무 꽃이 만발하였다

 

 

 

 

 

 

 

어찌보면 당나귀도 같고 솟대도 같고 각도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돌담에는 담쟁이 넝쿨도 자라고 있어 더욱 고풍스러운 느낌을 줍니다.

 

슬로시티 답게 관공서 건물도 한옥으로 지었습니다.

창평면사무도 입니다.

 

 

 

 

형령 이후화우영세불망비, 도순찰사이상공서구영세불망비,

현령홍후익필청간불망비

 

 

 

 

 

 

 

 

         창평5일장

1960년대 본격적으로 형성된 창평장은 5일과 10일, 15일 등 닷새에 한 번 열리는 5일장.

장날이 되면 자리를 맡기 위해 가까이는 광주, 멀리는 보성에서부터 상인들이 모여든다.

 장날이 되면 경운기 가득 직접 지은 농산물을 싣고 좌판을 펼치는 할머니들과 뻥튀기장수까지..

 시골 5일장 특유의 이색적인 난전이 펼쳐진다.

창평장에서 빼놓을 수 없는 두 가지는 바로 한과와 국밥이다. 설 대목을 앞둔 전통시장은

 한과를 찾으러온 주민들과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창평은 순대와 돼지고기를 가득 넣은 국밥으로 유명하다. 국밥거리가 형성될 정도로

이 지역의 명물! 값싸고 푸짐한 국밥 한 그릇은 창평 5일장을 본 마을 사람들의 허기진 배를

든든하게 채워주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창평전통시장

창평초등학교

 

창평초등학교는 1906년 4월 규장각 직각이었던 춘강 고정주(春崗 高鼎柱)가

국제적인 개와추세와 신학문에 대한 젊은이들의 학구열을 충족시키기

위해 창흥의숙(昌興義塾)으로 설립하였다.

 

수남학구당(창평향교)의 재산 일부를 기부받아 학교재원으로 하고 둘째아들 광준(光俊),

사위 김성수(김성수:2대 부통령), 외척 김병로(金炳魯:초대대법원장),

친지 송진우(宋鎭禹:3대 동아일보 사장)를 불러 외가 이씨의 정자인

상월정에서 영어를 가르친 것이 그 시작이라고 한다.

 

순천대 홍영기 교수의 연구(‘고정주. 근대교육의 선구자’)에 의하면 고재천(전 전남대 농대학장)과

 재필(전 보사부 장관) 형제, 고재기(전 서강전문대 학장)·고재종(전 전남교육감)·

고정석(전 산업은행장)·고윤석(전 서울대 부총장)· 고광표(대창주식회사 회장),

 해방후 국회의원을 지낸 김홍용·문용·성용 3형제, 우리나라에 최초로 야구를 소개한 박석윤(東京제대 졸업)

·석기(일제에 맞선 국악인) 형제 등이 창평학교 출신이라고 한다. 3형제 모두 국회의원을

지낸 김홍용·문용·성용은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였던 이회창의 외숙들이다. 이회창의 외가가

바로 창평이었기 때문이다. 동네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회창의 어머니인 김사순도

 경기여고를 나와 친정 동네인 창평초등학교에서 몇 년 동안 교편을 잡았다고 한다.

창평 출신의 70대 초반 원로들은 김사순 선생에게 배운 기억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이회창도 외가 동네인 창평학교에서 2~3년간 재학한 바 있다고 알려져 있다.

  아쉽게도 그 학적부가 6·25 때 불타버리는 바람에 이회창의 기록은 확인할 수 없다.

 

 

 

 

               이곳 담양 창평슬로시티 삼지내마을처럼 돌담이 많고 잘 보존된 곳도 흔치는 않을 것입니다.

 

 

보기드문 옛 2층집 가옥이다 설명이 없으니 궁금증이 더한다

 

 

우물뚜껑을 소달구지 바퀴로 덥은게 특이하다

 

 

전에는 이소달구지로 타고 마을을 한바퀴 돌았나보다

이곳 담양 창평슬로시티는 아시아는 물론 우리나라 최초의 슬로시티 입니다.

하동, 장흥, 예산과 함께 최초로 슬로시가 되었으며 현재는 전국적으로 12곳이 슬로시티로 지정되어 있고요

 

 

 

 

 

이 마을 담장의 구조는 전반적으로 돌과 흙을 사용한 토석담으로 비교적 모나지 않은 화강석 계통의 둥근

돌을 사용하였고, 돌과 흙을 번갈아 쌓아 줄눈이 생긴 담장과 막쌓기 형식의 담장이 혼재되어 있다.

 대체로 담 하부에는 큰 돌, 상부로 갈수록 작은 돌과 중간 정도의 돌이 사용되었다.

‘S'자형으로 자연스럽게 굽어진 마을 안길은 고즈넉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으며 고가들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돌탑집 마치 첨성대의 모습같다

 

고재환 가옥은 돌담을 따라 걸어가면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아쉽게도 대문이 굳게 잠겨있어서 볼 수 없었다.

 

 

고재환가옥의 대문

창평 춘강 고정주 고택

창평춘강고정주고택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 가옥은 한국의 전통적인 양반집으로 안채와 2동의 사랑채, 곡간채, 사당, 내외의 문간채등으로

 구성되어 나름대로 격식을 잘 갖춘 주택임. 남서측에서 솟을3문을 통과하여 출입하면 안사랑채와

 바깥사랑채가 나란히 위치하고 그 뒤로 안채와 곡간채가 직교하여 위치하고 있으며, 안사랑채

 사당이 경역을 달리하여 동편에 자리하고 있다.

안채는 남향으로 자리하는데 전라도지방에서는 보기드믄 ㄷ자형 평면의 건물로 뼈대가 굵고

 간살이가 넓은 건실한 한옥이며, 낮은 두벌대의 기단위에 상부를 다듬은 돌 덤벙주초를 놓고

 네모기둥인 방주를 세웠으며 가구형식은 2고주 5량가로 구성하였고 안채 상량기록은

 <崇禎紀元後五癸丑二月十六日癸卯亥時竪柱>로 확인되어 1913년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육효당이라는 당호가 있는 바깥사랑채는 4칸집인데 전후엔 퇴가 있다. 좌우에는 퇴칸이 없고

 전면에 툇마루만 설치되어 있으며 두벌대의 기단위에 사다리꼴로 다듬은 초석을 놓고 네모진

 방주를 세웠으며 가구구조는 2고주 5량집이고, 안사랑채는 4칸의 전후좌우 퇴집으로 팔작지붕집이다.


춘강 고정주 고택은 전남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ㄷ자형평면으로 부농형 양반가이며 특히

 양반가가 갖추어야 할 구성요소인 문간채, 사랑채, 중문간채, 안채, 곡간 등을 두루 잘 갖추고

 있고 건물의 뼈대가 굵고 간살이도 넓으며 구조형식도 우수함. 춘강 고정주(1863-1933)의

 고택이며, 창평지역 근대교육의 효시인 영학숙과 창흥의숙의 모태가 되기도 한 한말 민족운동의

 근원지라는 점으로 보아도 현대사적 의미가 있다.

 

 

고정주(1863~1933)는 한말의 애국계몽운동가로 자는 보현(寶鉉), 호는 춘강(春崗)이며 전남 담양 창평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참봉 고제두(高濟斗)이고 모친은 전주이씨로 돈녕부 도정(都正) 이태영(李泰榮)의 딸이며, 5세 때 큰아버지인

선공감 감역(監役) 고제승(高濟升)의 양자로 들어갔다. 6세 때 양부에게서 학문을 배웠으며 13세 때부터 창평읍에서

 5리쯤 떨어진 월정(月亭, 현 상월정)에서 학문 연구에 정진하였다. 19세인 1881년(고종 18) 한장석(韓章錫)을

 찾아가 학문을 배웠으며, 1883년에는 성대영(成大泳)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다. 이미 이때 그의 학문이 높은

수준에 이르러 성대영이 크게 칭찬했다고 한다. 1885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891년 문과에 합격하였다.

 

그 해 동생인 고하주(高廈柱)도 진사시에 합격하여 같이 금의환향하였다.1893년 승문원 부정자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으며 이어 승정원 주서로 입직당호(入直堂戶)하였다. 1895년 고종이 관심을 보이며 “고경명이

몇 대 선조인가 ” 하고 묻고 선물을 하사하기도 하였다. 1897년(광무 1) 장남 고광일(高光馹)이 효릉참봉에

임명되었다. 1898년 종묘축관(宗廟祝官)에 선출되었으며 1899년 홍문관 시독을 역임하고 품계가

정6품 승훈랑(承訓郞)에 올랐다.

 

이 때 나라는 풍전등화와 같은데도 오히려 조정 대신들이 외세를 등에 업고

개인의 야욕을 채우기에 혈안이 되자 고정주는 내수외양(內修外攘)을 강조하는 상소를 올렸다. 상소에서

 그는 상벌을 명백히 하여 부패한 관리를 추방하고 산택(山澤)의 이익을 개발하고 재원을 모아 군사력을

증대하여 국가의 근본을 굳건하게 함으로써 외세의 침입을 물리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00년과 1901년에 모친상과 부친상을 연달아 당하였으며 1903년에는 차남 고광준(高光駿)을 중국에

 유학을 보내기도 하였다. 1905년 홍문관 시독, 비서감랑, 예식원 상례 등을 역임하고 규장각 직각 겸

 황자전독(皇子典讀)에 임명되었으며 이어 비서감승(秘書監丞)이 되었다. 이 해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이를 반대하는 복궐상소(伏闕上疏)를 올렸는데 내용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조약을 맺은 부신(部臣)들은

매국적(賣國賊)입니다. 나라사람들이 모두 죽이라고 말하는데 죽일 수 없다면 어디 나라에 형정(刑政)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폐하께서 종사를 위해서 죽겠다는 뜻을 견고히 지켜 강제로 조인된 조약을 인준하지 않고

 조인한 적들을 엄한 규율로 다스리고 그들에게 붙은 놈들을 모두 배척하고 시무를 알고 절의가 높은 자들은

 관직에 임명하기 바랍니다. 그러나 이 상소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자 크게 탄식하며 분노의 눈물을 흘리고

이듬해 고향 창평으로 낙향하여 인산(仁山) 터에 정자를 짓고 녹천정(綠泉亭)이라 이름 붙이고 거처하면서

 애국계몽운동, 특히 신교육운동에 투신하였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 해 월정을 수리하여 영학숙(英學塾)을

세우고 영어를 가르쳤는데 이곳에서는 중국에서 돌아온 둘째 아들 고광준, 그의 사위인 김성수(金性洙),

그리고 송진우(宋鎭禹), 현준호(玄俊鎬), 김시중(金時中) 등이 수학하였다.1907년에는 사돈인 김경중

(김성수의 부친)과 함께 호남학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초대 회장에 선출되어 활약하기도 하였다

.

1908년 호남학회장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창흥의숙(昌興義塾)을 세우고 신교육운동에 전념하였다.

 창흥의숙에서는 영학숙에서 공부했던 사람들과 김병로(金炳魯) 등 50여 명의 학생들이 한문,국사,영어,산술

등 신학문을 배웠다. 창흥의숙은 얼마 뒤 지역 유지들을 중심으로 창흥학교라는 공식교육기관으로 변화하였으며

 고정주는 초대 교장에 선출되었다. 그는 항상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고금(古今)에 박식하고 시의(時宜)에

통달하여 큰 변화를 놓치지 않고, 시대의 변화에 함께 하면서 도(道)를 따르는 뜻에 맞출 것을 강조하고

 만약 옛 것에 집착하여 시대의 변화를 알지 못하면 바로 구차한 선비가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창흥학교는

 다시 창평보통학교로 바뀌어 호남지역의 수많은 인재들을 배출하였다. 1910년 한국이 일본에 병합되자

고정주는 두문불출하였으며 이듬해 육휴당(六休堂)을 세워 모든 가사를 그곳에 처리하고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나라 잃은 설움을 시와 글 속에 남겼다. 그의 스승인 한장석은 유신환(兪莘煥)의 문인이었다.

 

유신환과 그의 문인들은 정치적 실천을 중요시하여 정계 진출에 적극적이었으며 실제로 상당수의 인물이

중앙정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사상적으로는 경세학(經世學)을 강조하고 시무(時務)를 매우

중요시하여 전정(田政),군정(軍政 )등 삼정의 개혁, 청과의 공동운명론에 입각한 국방강화론을 주장하였다.

 고정주의 상소문을 보면 재정 확충과 군사력 증대를 주장하는 등 유신환의 학문적 영향이 적지 않게 보인다.

또한 관직을 그만두고 인재를 키우는 데 힘쓴 1900년대에는 유학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신문물을 도입하여

 나라를 부강하게 할 것을 주장하는 동도서기론적인 입장으로 발전하였으며 특히 청을 통한 신문물의

도입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전체적으로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에 바탕을 둔 온건개화노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적 특성이 그로 하여금 의병활동보다는 신교육운동 등 애국계몽운동에

투신하게 했던 것이다

창평 춘강 고정주 고택(春崗 高鼎柱 古宅, 전라남도 민속자료 제42호) 

춘강 고정주 고택은 한국의 전통적인 양반집으로 안채와 2동의 사랑채, 곡간채,

 사당, 내외의 문간채 등으로 구성되어나름대로 격식을 잘 갖춘 주택이다.

 

마당 한쪽에는 소나무 한그루가 멋진 자태를 뽐내고 서 있다.

 

 

 

이렇게 잘지어진 집이 이제 쓰러지기 일보직전이다

지붕부터 보수를 했으면 좋겠다

사랑채 우측으로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이 있다.

안채는 전라도 지방에서는 보기드문 ㄷ자형의 남향건물로 우측은 누마루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상량기록을 보면 1913년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춘강 고정주(1863~1933)는 창평 지역 근대교육의 효시인 영학숙(英學塾)과

 창흥의숙(昌興義塾, 현 창평초등학교)을 설립한 근대 교육 운동가로서

이 고택은 한말 민족운동의 근원지라는 점에서 현대사적 의미가 있다.

 

밖에서본 춘강고택은 쓰러지기 일보직전 기와도 너덜너덜 보는것도 안타깝다

점심을 먹기위해 안두부집으로 향하는데 여기도 메타스퀘어길이 잘조성돼있다

 

 

 

전골이 얼마나 풍부하게 많이 주는지 4인이 먹고도 많이 남는다

점심을 맛있게먹고 이제는 명옥헌 원림으로 출발한다

비가 올것 같지만 구름이끼고 습도만 높고 비는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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