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부산진구 양정동 477-29
얼핏 생각이나 배롱나무 꽃을 보기 위해 화지공원으로 간다
앞에 많은 땅을 현대건설에 팔아서인지 동래정씨 종중은 돈이 많은가보다
이렇게 큰 청소년회관도 지어놓고
화지공원으로 들어가는 현경문
묘와 사당으로 오르는 길에는 멋진 향나무가 도열해있다
오른쪽 한그루의 넓이와 높이입니다 한발 늦었네 조금 일찍올 걸
꽃은 거의 지고 끝물만
워낙 오래됐고 가지가 무거워서 지지대로 고여놓은 상태
보이는 것처럼 본래의 나무속에서 다시자란 나무가 이렇게 우람하게 컸다
정묘(鄭墓)는 고려시대 묘다. 묻힌 이는 정문도 공. 동래정씨 2세조로 현종(재위 1009~1031) 때 사람이다.
증손자 정서는 유일하게 지은이가 알려진 국보급 고려가요 '정과정곡'을 썼다.
인종(재위 1122~1146)과 처남매부 사이인 정서는 유배지 수영강변에 정과정이란 정자를 짓고 지냈다.
이정자 터는 옛날 내가 처음집을 지었을때 바로 뒷편에 있었으나 지금 그자리는 개발이되어
여러 공공건물들이 들어서는 바람에 지금은 망미동 쪽에 더가깝게 옮겨지었다
지금도 70년대에 길을 내면서 도로이름을 정서의 호를따 과정로라고 지어부르고 있다
고려사〉 열전에 따르면 성격이 경박하나 재주가 있다고 했다.
1151년(의종 5) 의종의 동생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음모에 가담하고 있다는
폐신 정함(鄭?)·김존중(金存中)의 참소로
동래 및 거제로 유배되었다가 1170년(명종 1)에 풀려났다.
의종이 "오늘 일은 조정 의론에 핍박되었으나 가서 있으면 마땅히 소환하겠다"고
했으나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없었다.
귀양에서 풀려난 것은 1170년(명종 1) 무신란이 일어나 의종이 쫓겨나고 명종이 즉위한 뒤였다.
귀양지에서 지었다는 〈정과정곡〉은 임금이 부르지 않는 것을 괴로워하며,
버림받았으나 님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변함 없음을 강조했다.
글해석
내 님(의종)을 그리워하여 울며 지내니
산 접동새(와) 난 비슷하오이다
(제가 역모에 가담했단 말이)옳지 않으며 거짓인 줄을 아으
잔월효성(천지신명)이 알고 있을 겁니다.
넋이라도 님과 함께 살고 싶어라 아으
우기시던(나를 헐뜯은) 이 누구였습니까
잘못도 허물도 천만 없소이다
뭇사람들이 참소하는 말입니다
슬프구나 아으
님이 나를 벌써 잊으셨습니까
아소 님하, 돌이켜 들으시어 사랑해주소서
정서(鄭敍)가 역모(逆謀)에 가담했다는 죄명으로 동래로 귀양을 갈 때, 의종으로부터
'머지 않아 조정으로 다시 부른다'는 다짐을 들었다.그러나 유배지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없기에, 정서는 임금에게 자신의 억울함과
결백을 밝히고자 이 작품을 지었다고 한다.
따라서 이 노래는 충신연주지사로 사람들에게 널리 애송되었으며, 궁중에서도
이를 전악(典樂)으로 보존하여 모두 익히도록 하였다고 한다.
화지공원 정묘비. 명칭은 '유명조선국 동래정씨 시조 고려 안일호장 부군 묘갈'이다.
묘소 앞에 세우는 비석이 묘갈이다. 어렵다면 어렵다. 묘비와 묘갈은 엄연히 달랐다.
묘비는 고위직이 쓰던 비석이고 묘갈은 하위직이 쓰던 비석. 5품 이상이 쓰던 귀부이수 비석이 묘비고
6품 이하가 쓰던 방부원수 비석이 묘갈이다. 귀부이수는 받침대가 거북, 머리가 용이다.
방부원수는 네모 받침대, 반달꼴 상단이다. 후대에 와선 비와 갈을 구별하지 않았다.
정문도는 동래정씨 시조인가, 2세조인가. 애초 시조로 모셨다.
그러다 조선 효종(재위 1649∼1659) 때 오래된 무덤에서 묘지문이 발견되면서 2세조가 되었다.
예부상서를 지낸 정항의 묘소였고 묘지문이었다. 묘지문 해당 구절이다.
'그(정항)의 아버지 정목은 태부경에 올랐고 할아버지 정문도와 증조부 정지원은 동래군 호장을 지냈다
.' 이로써 시조는 정지원이 되었고 정문도는 2세조로 내려앉았다. 그럼에도 시조로 표기한 것은 하루아침
2세조라 칭하기가 머쓱했으리라.이수원님 글에서
먼저 안일호장(安逸戶長).
호장은 고려시대 지방향리 최고위직. 일흔이 넘어 정년하면 그동안 수고했으니
안일하게 지내시라고 내리는 명예직이 안일호장이었다
묘지 좌 우로 800년된 배롱나무가 우람하게 버티고 있다
진즉왔으면 붉게물듬 꽃을 보았을텐데...아쉽다
동래정씨 2세조 정문도 공이 묻힌 정묘는 조선 8대 명당으로 꼽힌다.
정묘 맞은편은 신선이 산다는 영도 봉래산. 1년 365일 신선과 마주하니 명당은 명당이다.
명당 덕분인지 동래정씨는 고려와 조선 양조에 걸쳐 발복했다. 비문은 1732년 동래부사 정언섭이 썼다.
부산진구 양정동 화지공원에 있다. 시내버스 33, 44, 63, 179번을 타고 정묘사에서 내리면 된다.
정묘비(사진 오른쪽)가 800살 넘는 천연기념물 배롱나무 두 그루와 함께 묘소를 지킨다.
이수원님글에서
아직 지지않고 있는 가지의 꽃을 담아본다
사당뒷편에 있는 묘는 출입금지라 써놨다 궂이 들어갈 필요성을 느끼지않아 돌아섰다
뒷편에서 바라본 사당
정면에서본 사당 추원사 전경 문이잠겨 들어갈 수가 없다
정묘를 흔히들 연화도수형(蓮花倒水形, 물위에 핀 연꽃이 고개를 숙인 모양)이나
야자형(也字形) 명당으로 분류한다. 야자형이란 한자(漢字)의 야자를 닮았단 얘기다.
이런 지세에선 가운데 획의 끝머리에 혈(穴)이 맺힌다. 첫 획이 좌청룡이 되고,
마지막 획이 백호가 된다. 굳이 야자를 들먹일 필요도 없다. 좌우의 산들이 혈을
감싸는 지세, 즉 풍수이론 그 자체인 것이다.
무뢰한인 내가봐도 명당같은 생각이든다
에코브릿지
에코부릿지는 부산시민공원과 화지산을 연결하는 육교형태로 만들어진 생태통로로
야간에는 주로 동물의 이동통로 주간에는 공원 이용객의 통로확보를위해 만든
현수교 형식의 다리입니다 규모는 폭 8m 길이 56m로 교량 양쪽에 저연 친화적인
식생을 조성 함으로서 야생동물의 서식지 단절및 생태계파괴를 최소화 하기위하여
조성헌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생태적 공간이다
모야모에 올렸더니 금불초라합니다
우리가 들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강아지풀
꽃댕강 부산에서는 가로수로 많이 심는다
높은곳에서 바라본 시민공원 아직 제대로 숲이 되려면 10여년은 더 가야될듯
자리공 (미국자리공인것 같음) 뿌리는 사약으로 사용할만끔 독성이 강하다
미군주둔기의 역사(1945~2006)
-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선언과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식민통치는 막을 내렸음.
- 이체 조선을 통치하던 식민권력은 물론 조선에 거주하던 일본인도 본국으로 돌아가고 그 대신에
- 제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인 연합국 미국과 소련의 군대가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였음. 즉, 38선을 경계로
- 북은 소련군에 의해서 남은 미군에 의해서 군정이 실시됨
- 해방 이후 군정 통치를 위해서 남한에 들어선 미98군정단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 이후 본국으로 철수하였으나,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한국으로 되돌아 왔음.
- 이처럼 미군의 한국 주둔 역사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잠시 공백기가 있었을 뿐으로 오늘날까지
- 약 67년간 지속되고 있음
- 부산 서면 미군부대가 주둔해 있었던 하야리아 캠프도 2006년 폐쇄이후 기지의 역할을 옮기기까지
- 그러한 주한미군 역사의 일부인 동시에 한국현대사의 한 마디를 이루면서 부산시민과 애환을 함께
- 해온 우리의 역사이기도 함
- 미군의 부산 주둔은 남북한 긴장 관계 속에 군사적 안정이라는 국가차원의 목적 이외에도 하야리아라는
- 소규모 독립 사회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 속에서 그들의 새로운 문화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하게 하는
- 역할을 하였으며, 서면과 남포동 등 지역경제에 미치는 파급효과도 상당하였음
- 한편 또 다른 관점에서 미군의 철수와 공여지의 반환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요구도 점차 높아져
- 시민운동의 한 형태로 자리 잡았음. 1995년에 즈음하여 캠프 하야리아 이전 및 부지 반환을 위한 각종
- 시민사회단체가 결성되면서 시민공원 조성 운동이 본격화 됨. 아울러 한·미간 관련 협정을 상호 타결하여
- 2006년 부지를 폐쇄하고 이후 환경조사와 공원설계를 마무리하여 2011년 8월, 드디어 역사적인
- 부산시민공원 조성 기공식을 개최하게 되었음
숲속북카페:구명칭 사령관관사
이건물은 부산의 미군기지를 총괄하는 캠프 하야리아 사령관이 거주하던 숙소였다
초기에 대령이 사령관을 맡았을 때는 건물 전체를 사용하다가 이후 지위가 낮아저
중령 재직시에는 동급의 항만부대 사령관과 건물을 나누어 사용하였고 부대 폐쇄 직전에는
소령이 사령관직을 맡아 이건물을 사용하였다 지금은 숲속 북카페로 리모델링 하였다
우리동네 뒷산 지상파 3사의 송신소가있는 황령산이다 오른쪽 봉우리는 봉수대
이처럼 많은 나무들이 시민들의 참여로 가꾸어지고 있다
메리골드라고 합니다
일일초라고 하네요
기억의 숲
역사의 아픈 흔적과 기억들을 안고 자란 하야리아부대 안의 푸라타나스 90여 그루로
숲길을 조성해 이용객들에게 최고의 녹음과 쉼터를 제공하고 있다
- 해방 이후 군정 통치를 위해서 남한에 들어선 미98군정단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 본국으로 철수하였으나,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한국으로 되돌아 왔음.
- 이처럼 미군의 한국 주둔 역사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잠시 공백기가 있었을 뿐으로 오늘날까지 약 67년간 지속되고 있음
- 부산 서면 미군부대가 주둔해 있었던 하야리아 캠프도 2006년 폐쇄이후 기지의 역할을 옮기기까지 그러한
- 주한미군 역사의 일부인 동시에 한국현대사의 한 마디를 이루면서 부산시민과 애환을 함께 해온 우리의 역사이기도 함
- 미군의 부산 주둔은 남북한 긴장 관계 속에 군사적 안정이라는 국가차원의 목적 이외에도 하야리아라는 소규모 독립
- 사회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 속에서 그들의 새로운 문화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하게 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 , 서면과 남포동 등 지역경제에 미치는 파급효과도 상당하였음
- 한편 또 다른 관점에서 미군의 철수와 공여지의 반환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요구도 점차 높아져 시민운동의
- 한 형태로 자리 잡았음. 1995년에 즈음하여 캠프 하야리아 이전 및 부지 반환을 위한 각종 시민사회단체가 결성되면서
- 시민공원 조성 운동이 본격화 됨. 아울러 한·미간 관련 협정을 상호 타결하여 2006년 부지를 폐쇄하고
- 이후 환경조사와 공원설계를 마무리하여 2011년 8월, 드디어 역사적인 부산시민공원 조성 기공식을 개최하게 되었음
의자가있고 그늘이 있는 나만의 천국 상상에 맏깁니다
분수대에서 놀고있는 어린이들을 담으려고 다가가니 때맞추어 분수쇼가 끝나버렸다
우리 어렸을때는 이렇게 흙을 접하고 살았는데 그래도 건강했는데
요즘은 그렇지를 못해서 그런지 면역력이 떨어지는 것같다
아이들의 놀고 있는 모습을 지텨보는 부모님들
물칸나(타알리아)
호수가를 한바퀴돌아본다 아마 이호수의물은 성지곡 수원지에서 공급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비단잉어들 시민들이 얼마나 먹이를 많이 주었는지 돌맹이만 던저도 우르르 몰려온다
딱두송이 남아있는 백련 줌으로 땡겨보았다
시민들이 가장 많이 몰려있는 분수대와 인공백사장 어린이들의 천국이다
남미의 어느마을을 연상케하는 나무위의집 볼리비아에서 이런집에서 휴식을 취한적도 있다
아주 넓고 멋진 잔디광장 한 만평되지 않을까?
어린이들은 덥지도 안나봐요 오르고 뛰고 신바람이 났습니다
잔디광장 그늘에서 한가로이 휴식을 취하는 시민들
흔적극장:구명칭 영화관
이건물은 미군들의 위락과 사병교육을 위해 한국전쟁 시기에 세워진 영화관이었다
초기에는 할리데이 영화관 이라 불리다가 1980년대에는 경마장 영화관 이라불렀다
미국 현지 개봉영화들을 직수입해 상영하였다 영화관 출입이 가능했던 부산 사람들에게는
미국 문화를 접하는 또하나의 문화 통로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지금은 영화관 입구만
남아 있으며 야외 공연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모처럼공기가 맑고 하늘은 높고 산도가까이 저밑에 우리동네가 있는데
공원한가운대로 흐르는 시냇가 수초가 알맞게 자리하고 있다
시민사랑채:구명친 학교
이건물은 1960년대후반 미군부대에 거주하던 미군 가족과 미국인 들을위해 설치한
영내학교로 한국 최초로 건립한 미국인 학교다.초 중등 과장을 기본으로 설치하였으며
80년대에는 별도 건물에 분리되어 있던 고등학교를 합처서 운영했다 유치원은 별도의
콘셋막사에 별관 형태로 운영하였다 지금은 학교와 체육관을 포함한 전체건물의 강의
세미나 전시등을위한 시민 사랑채로 운용하고 있다
얼마나 넓은지 한바퀴 돌으려면 천천히 2시간은 족히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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