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제가 가는길을 배웅하고 옆지기와 둘이서 영도대교 열리는 시간에 맞추어 영도대교 밑으로
갔는데 많은 인파가 몰려있다 부산에 살지만 다리가 열리는 것은 오늘 처음으로 보게된다
영도대교 밑에서 바라본 깡깡이마을 깡깡이 마을을 가기전에 우리는 14시에 열리는 영도대교
밑에서 잠시 머무른다
거리에는 무명의 악사가 보륨을 높인채 기타를치고 있는데 관심을 가지고 보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것 같다
충무동 어판장과 부민동 산동네 천마산 능선이 선명하게 펼처진다
부산은 어느곳을가나 언덕배기에는 피난민의 애환이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1985년 전기 누전으로 인한 대형 화재 발생으로 인해, 1986년 1월에 건물을 신축하여 재개장을 하였다.
2003년에 자갈치 시장 현대화 사업 추진 계획이 수립되고, 2006년 8월 30일에 자갈치 시장 현대화 사업
공사가 완료되었다. 준공된 자갈치 시장 건물에서 2006년 12월에 부산어패류처리조합이 입점하여
운영을 개시하였고, 2007년 11월에 일반 상가가 영업을 개시하였다
자갈치 시장은 지하 2층·지상 7층의 상가 건물로 이루어졌으며, 대지 면적은 4,841㎡, 건물 연면적은 2만 5910㎡이다.
1층은 수산물 시장으로 각종 어패류를 취급하는 상점이 입점해 있고, 2층은 회 센터, 3층은 노래방과 전시실,
4층은 다도해 한식당 및 골프 클럽, 5층은 씨푸드 뷔페, 6층은 컨벤션 센터, 7층은 게스트 하우스 및
하늘 공원이 있다. 고객 편의 시설은 주차장[129대], 화장실 외에도 3층에 쉼터, 5층과 6층에는 테라스가 있고,
7층에는 하늘 공원이 조성되어 있어 자갈치 앞바다와 하늘을 동시에 조망할 수 있다. 엘리베이터가 4대 운영
중이며, 에스컬레이터가 1층~3층에 4대, 3층~6층에 6대 설치되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자갈치 시장 뒤편에 있는 공간은 바다를 감상할 수 있는 것은 물론 가끔씩 펼쳐지는 공연으로
눈과 귀가 즐거워지는 곳이다
저건물뒤로는 건어물 상가가 자리하고 있다
어시장답게 어구상자가 가득하다
6.25때 헤어진 가족과 만나는 장소로 사용했던 영도다리 그시대의 모습이다
14시가되니 싸이렌소리와 함께 영도다리가 열리기 시작합니다
서서히 올라가는 모습입니다
완전히 열린(들여진)모습입니다
들리는 모습을보고 도로쪽으로 이동해 인증도 해봅니다
일제가 우리나라는 수탈하던 시기에 사람들의 수송을 위해 육지(남포동)와 섬(영도)을 잇는 부산 최초로
건설된 다리이다. 남항과 북항을 오가는 배들이 지날 수 있도록 도개교 형태를 띠고 있으며 적을 때는 2회
많을 때는 7회까지 다리를 들어올렸다. 당시 다리가 하늘로 치솟는 신기한 모습을 보기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였으며 점차 부산의 명물로 자리 잡았다. 이후 6.25동란 때에는 헤어진 가족들이 만나는 약속의 장소였으며
서로의 생사를 알기위한 답답한 심정을 다리 밑 난전의 점바치들에게 물어보던 피란민들의 애환이 서린 곳이다.
초기에는 부산대교라 이름 붙였으나 다리가 노후화됨에 따라 부산대교를 새로 설치하면서 영도대교로 이름이
바뀌었다. 사람들의 기억에는 영도다리라는 이름으로 더욱 친근하다
[Daum백과] 영도대교 –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다리가 열리는 것을보려고 많은 인파가 몰렸는데 이제 서서히 자리를 뜨기 시작합니다
영도 깡깡이 마을은 선박 수리하는 업체가 모여있는 곳인데 이곳에서 녹을 제거할때 망치 두드리는
소리가 깡깡 난다고 해서 깡깡이마을로 불렸답니다.
각종 어망과 로프를 판매하는 야적장입니다
고철장을 연상케하는 각종 배에서 떼어낸 부품들입니다
깡깡 깡깡’ 선박을 수리할 때 페인트칠을 하기 위해 배에 붙은 조개나 녹을 망치로 두들겨 떼어낼 때 나는 소리다.
이 소리가 이름이 되어버린 깡깡이마을은 선박수리소가 모여 있던 부산 영도구 대평동 일원이다.
자연 방파제인 대풍포가 있어 1930년대 연근해 어업전진기지와 근대조선산업의 발산지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피난민 공동거주지로 이후 많은 피난민이 정착했다. 한국 최초 근대식 목조 조선소인
‘다나카 조선소’ 등 조선소, 수리선박, 선박부품 업체들이 있어서 부산 조선 산업을 대표하는 지역 중 하나였다.
그러나 조선경기 불황과 원도심 쇠퇴 등으로 지금은 낙후한 지역이다
김성철 작가의 관계 어울림 .허수빈 작가의 파란구름
쌈지공원의 벽화
한성세탁소 옆골목으로 들어가는 쌈지공원은 시설이 낙후되고 관리 부재로 공원 기능을 하지 못했던
곳이 작은 공연이나 주민들이 소통할 수 있는 공간으로 재정비 되었다. 원래는 폐가로 방치되어
청결하지 못한 공간이었는데 집주인 동의를 구해 소박한 공원으로 조성했다. 앞으로 덩굴식물 등을
심어 녹지화 할 계획이라고 한다.
영도 대평동 깡깡이 마을 공공예술작품
부산의 관광명소 중에서 영도구 스토리 텔링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대평동 깡깡이 마을이 있다.
깡깡이는 철로 만들어진 배의 밑창이나 측면에 붙은 녹을 떨어내는 쇠망치질하는 소리다.
깡깡이 마을과 부산 조선업의 발상지라 알려진 대평동의 낡고 우중충했던 골목과 건물들이
문화 예술 마을로 거듭나고 있었다.
부산시는 예술 상상마을 조성사업 일환으로 문화예술형 도시재생 프로젝트가 시행되면서
2017년까지 총 37억을 들여 영도 도선(나룻배)을 복원하고 예술작품 설치 등으로
제2의 감천문화마을을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화사하게 변한 건 비단 마을 풍경만이 아닌데요.
오랜 세월을 함께한 주민들의 마음도 밝히는 깡깡이 마을의 변화
마을 곳곳에 칠해진 알록달록한 물감들은
어두웠던 대평동의 분위기를 화사하게 만들었습니다
미국의 스트리트 아티스트의 작품, 50년 넘게 대평동에 살며 식당을 운영하고 계신 한귀선 할머니라고 한다.
잊혀져가는 장소에서 기억되는 장소로 바뀐 깡깡이마을
이러한 변화의 바람 뒤에는 어머니들의 애환이 숨어있습니다
선박의 녹을 벗겨내는 깡깡이 일은 대부분 어머니들이 했습니다.
피난길에 영도로 흘러와 생활고 때문에 깡깡이 망치를 잡은
‘깡깡이 아지매’
작은 깡깡이망치 하나를 들고 매일 새벽마다
배 위에 올라 거친 바닷바람을 맞으며 아이들을 키웠습니다
격동의 시기, 젊은 나이에 홀로 자식들을 길러야 하는 상황에서
깡깡이 일은 고되지만 거의 유일하게 잡을 수 있는 지푸라기였습니다.
신혜미 작가(SEENAEME)의 작품이다. 작가의 홈페이지에 다른 많은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
배, 용접기술자, 깡깡이 아지매, 외국인선원, 강아지 등 깡깡이 마을의 풍경과 사람들의 모습을
만화 캐릭터로 표현한 작품이다.
주위 공장들은 대부분 문이 닫혀 있는데 이집만 문이 열려있고 사장님인지 혼자 일을하고 계십니다
정크하우스의 마지막 월아트 작품, 오래된 폐가를 철거한 후 생긴 3개의 벽면에 작업
대평시장 조금 외진 곳에 있어서 지도없이 찾아가기는 쉽지 않다
그시절 여인들이 이렇게 위험한 깡깡이 작업을 했었다 깡깡이 작업을 하는 공구와 기기들 억척스런 대평동 여인네들 깡깡이 작업하는 모습 문화센터 찻집
요즘 보기드문 다방 이름 그대로 전에내려오는 양지다방 들어가 차한잔 하고 마을에 얽힌 이야기도
들어보고 싶었지만 명절이라고 휴업을하고 주위도 너무나 조용합니다
영도에는 일제 강점기부터 많은 조선소와 철공소들이 들어와 있었으므로, 자연히 주민들의 자랑거리는
“다른 것은 몰라도 선박 수리에 있어서는 한국 최고”라는 자부심이었고, 지금도 많은 선박들이 수리를
위해 모여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심지어는 1980년대 정식으로 국교가 수립되지 않은 소련 배들도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입항 허가를 받고 들어와 수리를 받고 떠나곤 하였다.
일반적으로 선박은 5월 전후로 수리를 하는데, 이때 고친 배를 가지고 일 년 동안 계속 운항을 하는
것이 상례이다. 그래서 5월이면 항상 선박들이 배를 고치기 위해서 북새통을 이루곤 하였다.
특히 원양 어선처럼 먼 곳으로 바다를 나가는 배들은 이 기회에 최선을 다해 배를 고쳐 놔야 탈이
생기지 않기 때문에 더욱 신경을 써야 하였다. 선박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는 남항동에서 선박 수리
부품을 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에, “남항동에서 구할 수 없는 것은 전국 어디를 가도 구할 수 없을 것
”이라는 말은 그런 자부심의 다른 표현이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고단했던 그 때 그 시절의 삶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쌓인 이 마을의 모든 것이
문화로 재탄생 되고 예술로 피어납니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그려나가고 있는 깡깡이 마을
깡깡이 예술마을로 다시 태어난 만큼
오래도록 우리 곁에 머물러 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대평동, 남항동 앞바다 일대의 매축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기념비라고 한다.
영도 대풍포 매축지는 1926년까지는 포구였다가 일본인이 남항동 대평동 일대의
포구를 매축하여 시가지를 만든 곳이라고 적혀있다.
아래 사진들은 영도 경찰서 담벽에 붙어 있는 옛날 영도의 모습들입니다
영도는 예로부터 말 사육장으로 유명하여 목도(牧島)라 부르기도 하였다. 또 이곳에서 사육된 명마가
빨리 달려 그림자조차 볼 수 없다 하여 절영도(絶影島)라고 불렸다.
영도경찰서와 영도대교 중간에 있는 현인의 동상입니다
영도다리를 건너며 담아본 자갈치 공동어시장 갈매기의 형상을 강조한 건물입니다
부산은 언덕배기에 6.25후에 지어진 집들이 지금도 건재하고 있습니다
초량동 수정동 범천동 감천문화마을 아미동 비석마을 등등 그때 그시절 아픈상처가
지금도 남아있습니다
Roger Wagner Chorale - Home on the range (언덕 위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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