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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말라카 네덜란드거리 세인트폴성당


        

말레이 반도 중남부의 말라카는 오랫동안 한적한 어촌이었으나, 14세기 인근 수마트라 섬에서

 온 파라메스바라가 이슬람 왕국을 세운 후, 인도양과
남중국해를 잇는 지리적 이점 덕분에 해상 실크 로드의 거점 도시로 성장하였다.

1511년 포르투갈이 말라카를 정복하여 아시아 최초의 유럽
식민지로 삼고 향신료 무역을 독점했으며 기독교 전파를 위한 기지로 만들었다.

 이 무렵 명나라의 정화가 이끄는 함대도 말라카를 방문하였는데,
이때부터 중국인들이 말라카로 이주해 살기 시작했으며 현지인과 결혼하여 중국과 말레이

 문화가 섞인 페라나칸 문화를 만들었다. 이후 1641년에는
네덜란드, 1824년에는 영국이 차례로 말라카를 정복해 식민지로 삼았다.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에 말라카에는 서양 식민지풍 건물과 중국풍의
건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어 2008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Daum백과] 말라카 – ENJOY 말레이시아, 강석균,


19세기 말레이반도를 지배한 영국은 말레이시아의 주석을 캐기 위해 중국인 광산 노동자들을

끌어들였습니다. 말라카에도 중국인이 대거 유입됩니다.

또 20세기 초 고무가 백금이라고 불릴 정도로 가격이 높을 당시 남(南)인도의 고무 농장

 노동자들이 대거 이주해 와 말라카의 인도인 비율도 높아지죠.

이렇게 복잡한 역사를 가진 말라카는 아시아의 대표적인 다문화 도시로 다양한 민족, 종교,

 언어가 공존하는 장소입니다. 말라카를 여행하면 무슬림을 위한 모스크, 불교 신도를 위한 사찰,

힌두교도를 위한 힌두 사원, 기독교의 성당과 교회까지 쉽게 찾아볼 수 있어요.

 

먼저 살펴 볼 곳은 바로 네덜란드 광장입니다. 말라카의 중심지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이곳을 중심

으로 많은 유적지들과 시가지들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이고 활기가 넘치는 곳입니다.

 보시다시피 건물들이 모두 붉은색을 띄고 있는데 바로 네덜란드의 영향으로 건물양식과 색이 특이

하답니다.

 

겔러리 건물인데 들어가 보지 못했다

크라이스트 처치(Christ Church)

크라이스트 처치는 말라카의 18세기 성공회 교회로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개신교 교회이다.

1741년 포르투갈의 말라카 점령 100주년을 기념하여 새로운 교회를 세우기로 결정했고,

12년후인 1753년에 완공되었다.

원래는 흰색으로 칠해졌으나, 크라이스트 처치 교회와 이웃한 스타더이스 건물이 1911년에

 빨간색으로 칠해졌고, 이 독특한 색체 구성은 이후 말라카의 네덜란드 시대 건물의 특징이 되었다.

교회는 네덜란드 식민지풍 건축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25m × 13m의 단순한 직사각형으로 배치되었다.

천장은 12m까지 올라가고 각각 하나의 나무로 조각된 나무 기둥으로 되어있다.

지붕은 네덜란드 타일로 덮여 있으며, 현지 라테라이트(laterite, 석회암) 블록위에 지어진 네덜란드

벽돌을 사용하여 벽을 높이고 중국 석고로 코팅했다.

교회의 바닥에는 원래는 상선의 밸러스트였던 화강암 블록이 깔려있다.

영국의 말라카 인수 후 본래의 네덜란드 창문은 축소 장식되었으며 베란다와 현관은 19세기

 중반에 지어졌다.

 

스타더이스(Stadthuys)

스타더이스는 말라카의 구시가지 중심부에 위치한 건물로 붉은 광장(Red Square) 이라는 별명을 갖고있다.

1650년 네덜란드의 정복자가 사무실로 세운 것이다.

말라카가 19세기 영국에 인도되면서 1826년 12월 7일에 이 땅에 살았던 선교사에 의해 스타더이스에

 인접한 장소에 영어 교육 기관이 세워졌다.

영국인 거주자에게 무상 교육을 제공하던 학교는 1871년에 말라카 고등학교로 개명 영국 정부에

인계되었고, 1931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스타더이스 내부 모습

 

식민지풍의 고풍스러운 시계탑(Red Clock Tower) : 좌측 붉은 시계탑 -


더치 광장에 있는 시계탑으로

1886년 중국계 거상 탄벵스위(Tan Beng Swee)가 세워,

탄벵스위 시계탑이라고도 한다.

시계탑은 적갈색이고 1층 각 면에는 아치가 있는 문 1개,

2층 각 면에 아치가 있는 창문 2개,

3층 각 면에는 탑에 비해 작아 보이는 시계가 있으며

지붕에 주황색 기와가 올려져 있다.

<인터넷 백과사전 자료 참고함 >

 

 

- 빅토리아 여왕 분수(Queen Victoria Fountain) -  


1901년 ‘다이아몬드 주빌리(Diamond Jubilee)’라 불리는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 60주년을 기념하여 세워진 분수이다.

분수 중앙의 1단에 4개의 작은 수조, 2단 3면에 빅토리아 여왕의 부조,

3단 기둥 아래 영국 왕실 문장, 기둥 위 4면에 여신의 얼굴로 장식되어 있고

기둥 주위의 4곳에서 기둥 쪽으로 물을 쏘는 구조이다.

시계탑과 함께 더치 광장의 상징 중 하나이다.

 

시간이 있으면 여기 겔러리도 들어가 보았으면 좋으련만 다음 행선지로 이동을 한다

 

 

 

여기도 무슨 박물관이라는데 ......;

 

새로 단장한 박물관 민주주의 정부 박물관이라고 해야하나

초라한 거리의 악사

 

네덜란드 광장을 따라 걸으면 포르투칼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답니다. 바로 세인트 폴 성당! 이 건물은 포르

투칼시대에 지어진 건물로 1521년 완공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 포르투칼 사람들의 예배당으로 사용

되다가 네덜란드와 영국의 카톨릭 박해로 곳곳이 파괴되고 후에 네덜란드 귀족들의 묘지로 사용되어 졌

습니다. 건물이 심하게 훼손되어 앙상한 외벽만이 겨우 자리를 잡고 있는데요. 실제로 처음 세인트 폴

성당을 둘러 보았을 때 네덜란드 광장과는 다르게 적막함과 웅장함, 가슴 아픈 역사의 흔적 등을 볼 수

있었답니다.

손으로 잎을건드리면 잎이 오므러 들었다가 조금있으면 펴지는 미모사

 뒤에 있는 것이 세인트폴 교회이고, 앞의 동상은 성 프란시스 사비에르의 동상이다.

 이 인물은 중국과 인도, 일본 등에 가톨릭을 전파한 신부로서, 그의 말라카 선교

 400주년을 맞이하여 1952년 세인트폴 교회의 입구 쪽에 동상을 세웠다고 한다.

 하지만 이 동상에는 슬픈 해프닝이 하나 엮여있는데, 동상을 세운 다음 날 동상이

 세워진 방향으로 큰 나무가 쓰러지면서 동상의 오른손이 잘려나갔다고 한다.

 

교회 앞에 성인 프란시스코 사비에르의 동상이 말라카를 굽어 내려 보고 있다.

이 교회에는 실제로 프란시스코 사비에르의 유해가 안치되었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동양에 가톨릭을 전파하여 성인으로 추대된 프란시스코 사비에르는 얽힌 이야기가 많은 성인이다.

 

프란시스코 사비에르는 1506년 태어나 1552년 숨을 거둘 때 까지 파란만장한 동남아 복음 전파의 삶을 살았다.

현재 스페인령에 속하는 Kingdom of Navarre에서 태어난 그는 아시아에 와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

당시 포르투갈의 힘이 강성했던 때로, 그는 인도, 일본, 보르네오, 말라카 등지에서 활동을 했다.

 

1545년 말라카, 다시 Moluccan 섬으로 갔다가 1547년 다시 말라카로 왔고 이후 중국 등을 갔다.

그는 사후 1553년 말라카 세인트 폴 교회에 잠시 안치되었다. 지금은 Goa의 바실리카에 안치되었다.

 

동방에 처음 도착한 개척자이기도 한 그는 예수회(Society of Jesus)를 만든 장본인이다.

예수회는 1540년 성 이그나티우스 데 로욜라(Ignatius de Loyola)와 파리에 설립한 수도회로,

기도와 봉사, 교육을 중심으로 하는 삶을 삶으로써 자신의 인격 완성과 이웃에 봉사를 목적으로 한다.

예수회는 이웃에 대한 봉사, 후대를 위한 교육을 중시하는 단체로, 우리나라에서 서강대학교를 설립했다고 한다.

 

 

내부를 살펴보니 벽만 남아있는 교회의 폐허를 볼 수 있었다.

 빨간 철제 기둥은 더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설치한 것이라고.

 여기저기 비석 같은 것들도 심심찮게 보인다. 성당의 제일 안쪽에는

 사비에르의 유해가 안장되어있었던 개방 무덤이 있다. 현재는 그의 유해를

이장 후, 철조망으로 막아두고 관람하게 되어있다. 안에는 사람들이 소원을

빌면서 던져둔 동전들로 가득하다. 세인트폴 교회의 역사를 조금 더 짚어보자면,

 1521년 포르투갈이 가톨릭의 포교를 위해 세웠는데, 당시 개신교였던

 영국과 네덜란드가 이를 파괴했다고 한다. 교회와 요새의 역할을 동시에

 하던 이 건물은 네덜란드의 지배 시기에는 귀족들의 무덤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한때 프란시스 사비에르도 이곳에 묻혀있었던 적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세인트폴 교회 주변의 언덕에는 적지 않은 수의 무덤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무덤들은 대부분 네덜란드 통치 시대에 안장된 귀족의 무덤일 가능성이 크다.

 

 

 

 

사비애르 신부 시신을 안치 했던곳

사비에르 신부는 중국에서 열병으로 타계하여 인도로 운구중 여기에 6개월간 안치되었었는데

6개월동안 부폐하지 않았다고 한다

묘비들을 보아 놓은 풍경

 

 

 

 

세인트폴 언덕에서 바라본 말라카 해협

타밍 사리 타워(Taming Sari Tower)세인트 폴 언덕에서 바라본 모습

타밍 사리 타워는 말라카의 회전하는 자이로 타워이다.

2008년 4월 18일에 일반인에게 공개되었으며, 탑 높이는 110m이다.

캐리지의 수용 인원은 80명이며 승차 시간은 7분이다

 

세인트폴 언덕에서 바라본 시가지 옛날 집들 같은데 집이 모두 다닥다닥 붙어 있다

말라카 술탄 왕궁 박물관(Malacca Sultanate Palace Museum)

히비스커스(무궁화)

펜타스

흰색 부켄베리아 같은데 가이드 말로는 종이꽃이라고 한다

예전에는 여기가 바다였다고 합니다

 

에이 파모사(A' Famosa)

포르투갈어로 유명한(The Famous) 이라는 뜻의 에이 파모사는 말레이시아 말라카에 위치한

포르투갈 요새로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유럽 건축물 중 하나이다.

작은 게이트 인 포르타 드 산티아고(Porta de Santiago, 산티아고 요새)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요새의 유일한 부분이다.

 

1511년 포르투갈 함대가 아퐁소 드 알부케르케(Afonso de Albuquerque)의 지휘하에 도착했다.

그의 부대는 말라카 술탄국 군대를 공격하고 패배시켰다. 알부케르케는 바다 근처의 자연 언덕을

중심으로 요새를 건설했다.

알부케르케는 말라카가 포르투갈과 중국의 향신료 루트를 연결하는 중요한 항구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 당시, 포르투갈은 마카오, 중국, 고아, 인도와 같은 장소에 전초 기지를 설립하여 중국(명)으로

 향했고, 포르투갈로 귀국하는 배들을 위한 항구를 만들었다.

 

요새는 한때 긴 성벽과 4개의 주요 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나는 4층 건물이었고 다른 건물은

 탄약보관실, 선장의 거주지 및 장교 숙소가 있었다.

대부분의 마을은 요새 성벽 안의 타운하우스(town house)에 밀집했다.

말라카의 인구가 확장됨에 따라 원래 요새의 규모를 능가했고 1586년경에 확장되었다.

 

요새는 1641년 네덜란드 인이 말라카에서 포르투갈 인을 몰아내면서 주인이 바뀌었다.

네델란드 인은 1670년에 성문을 개조했으며, 게이트 아치에 새겨진 로고 "ANNO 1670"이 이러한

 사실을 설명한다. 아치 위의 로고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로고이다.

 

요새는 18세기 후반에 네덜란드가 프랑스의 나폴레옹 팽창주의자에 넘어가지 않도록

영국군에게 넘겨주었다. 영국은 요새화를 유지하는 것을 경계했고 1806년에 파괴 명령을 내렸다.

요새는 거의 완전히 파괴되었지만, 1807년에 말라카에 파견된 현대 싱가포르의 창시자 인

토머스 스탬퍼드 빙글리 래플스 경(Sir Thomas Stamford Bingley Raffles)의 역사에 대한

 열정으로 인해 그의 요구로 이 작은 문은 파괴되지 않았다.

 

 

 

교포가 운영하는 수라간에서 저녁을 먹고 우리는 말라카강 야간 크루스투어를 할 것이다

 

When a Child Is Born / Michael Hol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