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군의 공공건물이라고 하는데 듣고 잊었습니다
영국 여왕의 공식 거주지 버킹검 궁전
1993년 처음으로 대중에게 공개되었고
램브란트,루벤스,카나레또 등의 작품이 포함된 대규모의 왕실 소장품을
전시하는 픽쳐 갤러리를 관람할수있다
버킹검 궁전은 근위병 교대식으로 유명하다.
근위병 교대식은 격일로 행해지며 오전 11시경부터 시작되고
약 45분간 진행된다고 합니다
아쉽게도 제가 찾아간날은 휴일이라 굳게 닫힌 철문사이로 들여다 볼수밖에 없었네요
화려하지는 않지만 정확히 72cm의 보폭으로 걷는 근위병들의 모습은
여행자들에게 색다른 재미를 제공한다고 하네요
엘리자베스 여왕의 여름휴가 기간인 8월초부터 약 2달동안에는
특별히 버킹검 궁전을 개방하고 있다고 하니 참고 하시길요
버킹검궁
국왕의 왕실
영국 입헌군주 정치의 중심인 버킹검 궁전은 영국 여왕의
런던 공식 거주지이다. 1702년 버킹검 공작의 런던
사택으로 지어졌고, 1762년 조지 3세가 사들여 왕족들이
거주하는 여러 저택중의 하나로 지정하였다.
조시 4세가존 내쉬를 고용해 구저택 주위로 새로운 건물을 짓도록
명령했고, 내쉬는 대리석 아치 입구가 인상적인 건물을
완성했다. 나중에 이 대리석 아치는 하이드 파크로 옮겨졌다. 이곳은 1837년
빅토리아 여왕에 의해 처음으로 왕족의 런던 거주지로 지정되었다. 버킹검 궁전은
1993년 처음으로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램브란트, 루벤스, 카나레또등의 작품이
포함된 대규모의 왕실 소장품을 전시하는 픽쳐 갤러리를 관람할 수 있다. 버킹검
궁전은 왕실 근위병 교대식으로 유명하다.
격일로 행해지며 오전 11시경부터
시작되고 약 45분간 진행된다. 장대하고 화려하지는 않지만 정확히 72㎝의 보폭으로
걷는 근위병들의 모습은 색다른 재미를 제공한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여름 휴가
기간인 8월초부터 약 2달동안에는 특별히 버킹검 궁전을 개방하고 있으며, 입장료는
수년전 윈저성의 화재 복구비를 조달하는데 쓰여진다. 연간 50,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연회와 오찬, 만찬, 리셉션등에 초대되어 이곳 버킹검 궁전을 방문한다.
영국 국왕의 정전인 버킹엄 궁의 역사는 1702년 버킹엄 공작 존 셰필드가 뽕나무 밭을 구입해
버킹엄 하우스를 지으면서 시작된다. 처음에는 보잘것없는 벽돌로 지은 저택에 불과했다.
1762년 조지 3세가 18살인 자신의 젊은 부인 샤를로트를 위해 이 저택을 구입한 이후 왕궁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어 왕위에 오른 조지 4세는 건축가 존 내시John Nash의 충고에 따라, 벽돌집이었던 버킹엄 하우스를
바스 산 석재로 장식해 외관을 바꾸고 정문을 설치하면서 네오 클래식 양식의 궁으로 다시 태어난다.
궁의 서쪽 부분이 마련되는 것도 이때다.
버킹검 궁전 광장에 세워진 빅토리아 기념비
광장은 항상 오픈돼 있답니다
빅토리아 여왕(1819 ~ 1901. 재위 : 1837 ~ 1901)은 18세에 왕위를 계승 받아
64년간의 최장수 왕위에 있을 때가 '영국이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이다' 라고 하던
대영제국의 최전성기 시대였고 또한 그 시대를 재현하기 위해 만든 기념 동상이라고 합니다.
-. 눈이 부신 금빛 찬란한 여왕의 동상은
양쪽 날개를 달고 금방 하늘로(대영제국 전성기) 날아 오를듯한 기운이 서려있는듯 합니다.
유럽사에 있어 19세기는 영국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구가 돌아 영국에는 밤이 오더라도 세상 어딘가 영국의 식민지 중 한 곳은
낮이기 때문에 '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 ' 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얼핏 들으면 대단한거 같지만 그만큼 약속국을 무력으로 침략하여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착취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19세기 영국은 산업혁명을 일으켜 세계에서 가장 많은 부를 쓸어 담았고
오래동안 시행 착오를 겪어오던 의회 민주주의도 두 개의 당으로 정리해서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이 영국의 황금시기를 이끌었던 군주가
19세기의 2/3인 64년간 영국을 통치했던 빅토리아 여왕이다
18세에 영국의 왕이 된 빅토리아는 국왕이기 보다는 소녀에 불과했다
이런 여왕에게 제왕의 위엄을 갖추도록 도와준 사람이 당시 수상이었던
'멜번 경' 이었다. 수상은 여왕의 개인 비서를 겸임하면서 군주의 덕목과
위엄을 자세히 가르쳐 주었고 여왕 또한 그녀를 아버지처럼 잘 따랐다
여왕을 도와 대영제국을 이끌었던 인물이 한명 더 있다
바로 여왕의 남편 앨버트 공 이다
1837년 18살의 젊은 여왕, 빅토리아가 등극하자 바로 이 궁에 거처를 정했고 이때부터 내시가
설계한 대리석 궁륭인 마블 아치Marble Arche 위에 궁정 깃발이 펄럭이게 된다.
이후 공사가 계속되어 현재와 같은 궁의 모습이 갖추어진다. 동쪽 건물이 완공되면서 남, 북 건물과
이어져 사각형의 안마당이 형성되고, 1913년 더몰The Mall 가와 직선으로 연결된 건물과 발코니가 들어선다.
이 발코니가 바로 국경일이 되면 왕과 왕실 가족들이 나와 국민들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는 곳이다.
하지만 버킹엄 궁은 많은 왕궁 중 하나였을 뿐이며 1937년 빅토리아 여왕 즉위 이후에나
국왕들이 상주하는 궁이 된다. 2만m²의 호수를 포함해 약 17만m²에 이르는 대정원, 그리고 무도회장,
음악당, 미술품을 소장한 미술관, 접견실(녹색의 방)과 도서관 등이 들어서 있다.
현재 매일 거행되는 근위병 교대식은 버킹엄 궁의 명물이자 중요한 관광 이벤트이기도 하다.
약 300명의 인원이 버킹엄 궁의 업무를 맡아 처리하고 있다. 여왕이 궁에 있을 때에는 궁 정면에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잉글랜드를 상징하는 문양이 들어가 있는 왕실 기가 게양된다.
이렇게 근위병 교대식이 있는데 우리는 시간을 못 맞추었는지 보지를 못했다
세인트 제임스 파크가 아닌가싶다
남성정장을 이제 처음으로 대하게됩니다
버킹엄 궁은 여왕 엘리자베스 2세와 부군인 에드워드 공의 런던 궁정이며 앤 공주와 요크 공도
궁 안에 사저를 갖고 있다. 이들을 보필하는 시종 50명은 같은 궁에 머물며, 기타 다른 시종들은
왕실 마구간인 로열 뮤스에 기거한다.
궁 앞의 원형 광장에는 빅토리아 여왕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그 너머로는 세인트 제임스 파크와
트라팔가 광장으로 이어지는 더 몰 산책로가 우거진 플라타너스 가로수를 따라 자리잡고 있다.
광장 한 켠에는 1833년 왕실 근위대 막사로 건립된 웰링턴 막사가 있다. 현재는 근위대 박물관과
근위대 예배당이 들어서 있다. 현재의 건물들은 2차대전 당시 파괴된 것을 다시 복원한 것이다.
궁은 8, 9월에 입장이 가능하다. 약 15파운드가 넘는 비싼 입장료를 내야 하는데 이 비싼 입장료는
윈저성을 복원하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기금으로 사용된다.
코리안 위클리에서
런던의 하늘치고는 맑은 편이다
로얄 앨버트홀
‘로열 앨버트 홀’의 역사는 1851년 런던 하이드 파크(Hyde Park)에서 열린 만국
박람회(Great Exhibition of the Works of Industry of all Nations)로 부터 시작된다.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 앨버트 공(Prince Albert)이 주도한 박람회는
대성공을 거뒀다.
앨버트 공은 박람회의 정신을 후손 대대로 이어갈 수 있는 ‘과학과 문화를
위한 중앙 홀(The Central Hall of Arts and Sciences)’을 지을 것을 제안했다
건축비 20만 파운드를 마련하기 위해
헨리 콜은 객석을 100 파운드를 받고 팔 것을 제안했다,
객석 주인과는 매년 1실링(5 페니)의 사용료를 내고 999년간
임대하는 조건으로 계약을 맺었다.
아직도 명목상으로는 345명의 개인과 법인이
1,290석의 주인으로 되어 있다. 빅토리아 여왕은 가장 큰 박스석인 퀸즈 박스를
포함해 20석을 확보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예술의 전당과 같이 각종 예술 문화 공연이 이곳에서 열린다
빅토리아여왕의 남편 앨버트공기념비
켄싱턴 가든 남쪽에 있는 네오 고딕양식의 기념비(Memorial)로
빅토리아 여왕이 너무나도 사랑했던 남편인 앨버트(Albert) 공을 위해 세웠다
앨버트공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그를 기리기 위해 1883년에 세웠다
기념비 상단의 뾰죽탑은 십자가와 천사들로 조각되었다
탑의 안쪽에는 앨버트 공의 금동상이 자리하고 있다
기념비의 네 면에 하얀 동물의 등에 사람이 올라 앉은 조각상이 있는데
이는 빅토리아 여왕이 세계를 정복했던 네 개의 대륙을 상징한 것이다
유럽은 소, 아시아는 코끼리, 아프리카는 낙타, 아메리카는 버팔로를 나타낸다
유득히 프라타나스가 많은게 영국이다
빅토리아 여왕은 앨버트공을 처음본 순간 사랑에 빠젔다
물론 그들은 사촌이었지만 그당시에는 근친 결혼이 흔한일이었다
빅토리아는 1839년 10월 앨버트에게 청혼했고 둘은 1840년 2월에
결혼 했으나 20년후 앨버트가 장티프스로 세상을 떠난다
앨버트는 독일의 왕자였고, 둘 결혼식날 여왕이 흰색 옷을 입고 식을 올렸는데
그 이후 신부가 흰색 드레스를 입는게 전 세계의 트렌드가 되었다 한다
빅토리아야 말로 진정한 패션의 아이콘 이지 않을까
처음 둘 관계는 별로 였지만 앨버트의 사려 깊음과 진중함에 반해
나중에 사랑하게 되었다 한다.
여왕은 전폭적으로 그의 판단을 믿었고, 항상 국무회의 때 그를 대동했다
20년 결혼생활 동안 국왕은 빅토리아 였지만 실질 군주는 앨버트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왕실의 재산관리, 외교문제에도 관여해 분쟁을 막았고, 국제 박람회도 성공적으로 치뤄냈다
앨버트는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영국 국민에게 외면 받았지만 왕실 사람 답지 않은
청교도 적이고 성실한 삶의 태도가 왕실에 그대로 영향을 미쳤고 그로 인해 국민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다
앨버트는 여왕과 자녀들을 데리고 런던을 떠나 스코틀랜드로 자주 여행을 갔는데 이것이
결과적으로 정치와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영국적 군주제를 만드는데 기여를 했다고 평가를 받는다
국가적 중대사안은 여왕이 관여하고, 그 외 정치적 문제는 수상의 소관이 되었으니 말이다
여왕과 앨버트 사이엔 9명의 자녀가 있었고 이 자녀들은 모두 유럽 왕실과 정략 결혼을 했는데
그 결과 오늘날 남아있는 유럽 왕실 대부분이 빅토리아 여왕과 일정 관련을 맺고 있다
아빠미소님 글에서
하이드 파크(Hyde Park)
400 여년의 역사를 가진 하이드 파크는
당초에 웨스트 민스트 사원 소유지를 헨리 8세(1491 ~ 1547. 재위 : 1509 ~ 47)가 사냥터로
사용했던 곳으로 1637년부터 개장된 77만평 규모의 공원(여의도 광장은 89만평) 이
지금은 인공호수로부터 예술적인 가치가 있는 시설과 우람한 나무와 잔디로 어울려
시민의 휴식공간으로 만들어졌다
하이드 파크내의 호수
하이드 파크공원이 호수
벗꽃도 아니고 이겨울에 피는데 무슨 꽃일까요
하이드 파크 공원에도 어김없이 겨울이 찾아오나봅니다
이제 낙엽이 지기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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