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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부산 이바구 길 1

 

 

자성대
자성대는 원래 부산진성의 한 부분으로 공식적인 이름은 부산진지성(釜山鎭支城)인데, 지금 남아
있는 성터는 임진왜란 때인 1593년에 왜군이 주둔하면서 다시 쌓은 일본식 성이다.

임진왜란 때 왜군의 지휘소로 이용되기도 하여, 왜군 장수의 이름을 따서 고니시 성이라고도

 불리기도 했다.현재 남아있는 성터는 2단이며, 성벽의 높이는 최고 10m, 최저 1.5m이다.

 성벽은 비스듬히 경사져있고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올라가며 나선형을 이룬다.

 이 성은 일본식 성의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어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7호로
지정되었다. 주변에 시끌벅적한 큰 시장이 있어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조용한 산책로와 체육 시설이  있다.

서문(금루관) 

 

 

 

 

둘레길에는  지압장도 만들어놔 맨발로 한번 걸어봤으면 좋겠는데 날씨가춥다

 

영가대의 이정표를 보고 먼저 영가대부터 들려본다

조선 통신사란

조선후기에 일본의 애도 막부의 요청에 의해 1607년부터 1811년까지 12회에 걸처 통신사가

파견되었다 통신이란 신의를 교환한다는 뜻으로 통신사는 조선국왕이 일본 막부 장군에게

파견하였던  조선국왕의 공식적 외교 사절이다

 

통신사의 경로

 

 

 

 

 

 

 

 

 

통신사 정사선

통신사 정사가 타고간 기선의 복원모현으로 조선시대

대표적인 전함인 판옥선의 형태로 만들어 젔다

 

영정이라도 담을까 가까이 접근했는데 저렇게 촘촘히 역은 창살이라서 담지를 못했다

 

진남대 앞뜰 굉장히 넓다

 

 

 

 

 

진남대

진남대란 장군의 지휘소였던 진남대  진남이란 부산진 지성 남문의 이름이다

1974년 부산진 지성을 정비하면서 정면6칸 측면 4칸 2층규모의 팔짝지붕으로

증층 누대를 설치하였다

진남대를 뒤로하고 동문으로 내려간다

 

동문을 건춘문이라 한다

진시장 구름다리에서 본 자성대공원

주위가 모두 주택지로 둘러쌓여 있어 위에만 살짝 보인다  진시장 골목시장을 뒤로하고

보림극장 쪽으로 전진한다

 

범일역에서 범일동시장으로 가는 길에는 철길 위 구름다리가 있다. 2003년 개봉한 영화 <친구>에서

장동건과 유오성이 뜀박질하던 육교다. 이 다리를 건너면 지금은 사라진 삼일극장 자리로 이어진다.

 길을 건너려고 횡단보도에 서면 건너편에 보림극장이 보인다.

부산 이바구길을 따라오다보니 여기를 들리지를 못하고 우회로 해서 보림극장으로 왔다

 

영화 이야기 광장

교통부 로타리의 옛 보림극장 뒷 담장에 당시의 추억을 그려 놓고 있다.

주위에서 촬영하였던 ‘친구’ 라는 영화를 비롯하여 부산에서 촬영된 영화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이 건물 보림극장은 한 시절을 보여 준다. 영화 상영과 자주 열렸던 쑈무대-

하춘화의 포스터도 보인다. 60~70년대 한 시절 전성기였다.

 

교통부 주위는 국제고무와 삼화고무 공장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생활했다.

 신발산업은 노동집약산업으로 공정에 따른 많은 인력이 필요했다. 

세월의 변천에 따라 당시의 신발공장들도 극장들도 전부 없어졌다.

 모든 건물이 없어졌는데 이 보림극장의 건물은 아직 남아 대형 슈퍼마켓으로

 운영이 되고 있으니 옛 향수라도 볼수 있어 위안이 된다. ‘보림극장’이란 극장

이름과 옛 영화 광고판도 진짜같이 걸어 놓아서 마치 옛날을 재현하는 듯하다.

‘저 하늘에도 슬픔이’ ‘미워도 다시한번’의 영화 그림이 멀지않은 세월인양 느껴진다.

1944년 문을 연 범일동 삼일극장, 1955년 개관한 보림극장과 함께 

'범일동 극장 트리오'로 불리며 한때 잘나갔지만, 남포동 극장가 중심의

 영화 배급 탓에 영화관으로서의 입지가 좁아졌다.

그러다가 영화 '친구'의 촬영지였던 삼일극장은 2006년, 보림극장은

 2007년, 삼성극장은 2011년에 문을 닫았다.지금은 마트로 사용중

 

부산 동구는 영화와 뗄 수 없는 곳이다. 동구에 극장이 18개나 있었고 여러 영화가 촬영된 곳이기도 하다

. 범일동에는 삼성, 삼일, 보림극장이 있었다. 이들은 서로 이웃해 있었고 극장 뒤로 고무공장이 밀집돼

그 시절 ‘공순이’들 중 여기 한번 와 보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극장은 지친 생활인에게

고마운 오락거리였다.

지금은 멀티플렉스 영화관이라 다양한 영화를 골라 볼 수 있지만 예전에는 극장 하나에 상영관도 하나였다

. 바꿔 말하면 규모에 있어서는 그 시절 극장이 더 크고 웅장했다. 1·2·3층을 한 관으로 쓰고 스크린 또한

 대형이었으니 오히려 영화 보는 맛은 옛날 극장이 제대로였다. 필름이 긁혀서 죽죽 비가 내리던 스크린,

 목소리와 그림이 잘 맞지 않던 장면, 쉬는 시간에 오징어를 팔던 행상, 어른 분장(?)을 하고

몰래 들어왔던 고등학생들, 시험 후 단체관람… 모두가 극장의 추억이다. 

극장이 하나둘씩 문 닫은 것은 고무공장의 성쇠와 관계가 깊다. 1970년대 후반부터 공장들이

하나씩 문을 닫자 인구가 빠져나갔고 TV가 대중화되면서 극장 손님도 줄어들었다.

 세 극장 모두 재개봉관으로 범일동 사람들과 애환을 나누다 이제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보림극장은 처음에 영화극장으로 문을 열었다가 무대극장으로 재개관했다.

영화 배급에 문제가 있어 궁여지책으로 기능을 바꾼 것인데 그것이 신의 한 수였다.

지금도 남아있는 포스터처럼 남진, 나훈아 등 톱스타들의 공연으로 전성기를 누렸고,

1980년 조용필 쇼를 끝으로 다시 영화극장으로 돌아온다. 현재는 폐관돼 전면의

간판과 뒷편의 영화이야기 담장으로 옛 시절을 추억한다. 

이제는 누나도 극장도 사라졌다. 조그만 흔적들만 남아 옛 골목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물론 들을 귀 있는 자들만 들을 수 있는 속삭임이다. 누구에게는 ‘누나’들의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들릴지도 모르겠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고 실망할 건 없다. 여전히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시장 사람들의 소리가 있으니 말이다. 송세진님의 글에서

 

 

 

 

 

 

우리 민요의 후렴구로 널리 알려져 있는 ‘쾌지나 칭칭 나네’는 임진왜란 이후에 나온 노랫말로서

‘쾌재라, 가등청정이 쫓겨 나가네’가 줄어든 말이다. ‘쾌재라(快哉-)’는 ‘좋구나’, ‘시원하구나’란

 뜻을 가진 옛말 감탄사이다. 가등청정(加藤淸正)이라 불리는 가토
기요마사(1562~1611년)가 쫓겨 달아나는 모양을 노래에 붙인 것인데, 운율을 맞추자니

 자연히 부르기 편하게 줄어든 것이다.

우리말 1000가지, 이재운 외, 예담

부근에 사시는 아주머니께서 유명한 사람의 집이라는데 듣고 잊어버렸다

일제강점기 3·1 운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 이후 울분을 토할 길 없었던

부산 시민들은 1922년 정월대보름, 매축지마을에서 줄다리기를 했다.
그때 선창자의 노래가 마중물이 되어 그곳에 모인 시민들이 일제히

“쾌지나 칭칭나네”의 후렴구를 외치며 항일 의지를 표출했다고 한다.
‘쾌지나칭칭나네’라는 노래로 유명한 가수 김상국 역시 동구 범일동

 출신이다.
  

 

 

 

 

 

 

초량 부두와 객사,
 범일동 매축지 등이 소설 속에서 공간적 배경으로 나오는
이호철의 '탈향', 이인직의 '혈의 누', 유익서의 '우리들의 축제' 같은
소설 작품을 주제로 꾸민 소공원인데
벤치의 받침도 '소설'을 풀은 자,모음의 형상이다

여기서부터 부산 이바구 길과 이중섭거리가 갈라진다 

연필모양의 조각작픔 글쓰는 사람들의 연필을 형상화 한것 같은데

얼마나 큰지 마치 울타리 같은 느낌을준다  

범일동 골목 시장 끝에 ‘누나의 길’이 있다. 고무공장 전성기를 이끈 곳이다.

지금은 모퉁이 대폿집이 인상적인 좁은 골목길일 뿐이지만 이때는 출퇴근시간에 

몸이 부딪힐 정도로 많은 사람이 왕래했다고 한다. 골목에는 그 시절 ‘누나’의

사연이 담긴 액자가 걸려 여행자에게 옛이야기를 들려준다.부근에 이중섭 거리가

있다 이중섭거리를 둘러보고 누나의 길로 내려와도 된다

피난민의 애환이서린 범일 골목시장 지금은 쇠락의 길을 걷고 있지만 한때는 내노라하는 시장 이었다

   몇발자국 들어가면 호천석교비가 보이는데 1711년(숙종 3년) 범내 나무다리를 돌다리로 바꾸며 세운 기념비라고~

      비(碑) 실물은 박물관에 가가있고 이거는 복제판이다!~ 호천은 한문이고 범내는 우리말이다

 별을보고 출근하여 14시간씩 일을하고 별을보고 퇴근하며 휴일도 없이 일한 우리의 경제 발전의 역군들

부산의 대표적인 방직공장과 신발공장에서 일하는 여공이라고 불리우던 우리의 누나들과 재매들

지금은 그래도 이정도라도 정비가 되었지만 그때는 부럭담에 스레이트나 루핑 지붕 좁은 골목 이었다

공장 아가씨들은 방 하나를 얻어 여럿이 생활했다. 알뜰살뜰 돈을 모아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촌에서 온 ‘누나’들이었기 때문이다. 집은 대부분 무허가 판잣집이었고, 태풍이 불면 날아가기

일쑤였지만 그나마도 비는 방이 없었다고 한다. 

여는 한때 삼화고무 국제고무 신발공장 여공들이 별을 보고 출근하고 별을 보고 퇴근했던 곳이라고~

        오빠, 남동생 뒷바라지 하느라 청춘을 바친 그때의 누나들은 이제 쪼글 할머니들이 됐다

 

부산을 대표한 근대산업 중 하나는 신발이었다. 특히 부산 동구는 고무산업이 발전하기

 좋은 천혜의 입지였다. 고무의 원료인 생고무가 들어오는 항구가 바로 앞에 있고

근처에 좌자천, 동천 등이 있어 고무 생산품을 식히는데 필요한 물이 많았기 때문이다.

 

때마침 신발에도 변화가 있었다. 근대화가 일어났던 이 시기에 사람들은 짚신을 고무신으로

 바꿔 신기 시작했고 한국전쟁 이후엔 수요가 급증했다. 고무공장이 많았던 동구 지역에

고무신공장이 생겨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누나의길

이길은 안창마을에서부터 이부근에 걸처 살았던 여공들이 조선방직과 삼화고무에

 별을보고 출근해 일하고 별을보고 퇴근해 살았던 곳이다 여공들은 14시간의 고된

 노동과 적은 임금의 열악한 노동 환경속에서도 억척스럽게 살아왔고 누군가의 딸로

 누군가의 누나로 소임을 다하며 집안의 생계를 꾸려간 동시에 동생들의 학비를

대가며 우리나라의 경제발전을 이루게 한 장본인이며 진정한 주인들이다

 

휴일은 한달에 두번, 밀린 집안일을 하려면 제대로 쉬지도 못했겠지만 멋을 내고 영화를

보러 나갔다. 낮에는 일을 하고 저녁에 야학을 다니는 늦깎이 여학생들도 있었다.

 청춘의 에너지는 힘들던 시간에도 추억을 만드는 묘수를 선사했다

송세진님 글에서

다 올리지를 못해서 다음장으로 계속이어집니다

Vier Letzte Lieder
(Four Last Song, R.Strauss)

제1곡 Fruhling(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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