론다에서 그라나다로 이동
말라가 미하스를거처 그라나다로 가는 곳의 풍경들은 그래도 평지도 많고 초지와 올리브농장
밀밭들이 계속이어지는데 모로코에비해 비옥한 땅이구나 생각이된다
올리브농장
밀밭
타리파에서 여기까지 오는동안 풍력 발전기를 수백대는 본것 같다
이제 서서히 해가 저물기 시작합니다
굽은길이 많아 일몰을 잡으려니 참으로 어렵다 겨우겨우 잡은 게 이사진 두장이다
아침부터 이동거리가 꽤나 많다 늦은시간에 호텔에 도착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든다
야간이라서 어디가 어덴지 모르지만 그라나다에서 가까운 근교가 아닐까 짐작해본다
빌라 블랑카 호텔
아침에 일어나 바쁜 하루를 준비를한다 오늘도 날씨가 좋을거라 기대를하며
하루를 차질없게 넘기기를 기원해 본다
그라나다는 이베리아 반도의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에 위치한 도시다. 내륙에 위치하여 한여름에는 매우 덥지만,
스페인에서 가장 높은 산맥인 시에라 네바다 산맥을 끼고 있어 겨울에는 수많은 스키어들이 방문하기도 한다.
8세기 초반부터 이슬람 왕조의 지배 아래 크게 번영을 누렸으며 1492년 기독교 세력에 의해 점령되기까지
이슬람교도의 마지막 거점 도시였던 그라나다는 서유럽에서 이슬람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도시이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중 하나로 꼽히는 알암브라 성과 이슬람의 영향을 받은 아름다운 건축물이 남아 있는
구시가지의 거리는 다른 유럽 도시에서 만나기 힘든 이국적인 풍경을 선사한다.
[Daum백과] 그라나다 –
그라나다 왕국은 지금의 그라나다·말라가·알메리아 주로 이루어져 있었다. 왕국의 무하마드 1세가
나스르 왕조를 열었고 1246년 카스티야 왕 페르난도 3세에게 승인을 받았다. 군부 지지에 바탕을
둔 절대주의 정부형태를 발전시켰고 견직물 산업과 교역에 의존한 경제체제였고 교역이 번창했다.
통치자들은 지브롤터 해협에 관심을 쏟아 1세기 동안 해협을 손에 넣기 위해 애썼지만 리오살라도
전투(1340)에서 해협 문제가 카스티야에 유리하도록 해결된 뒤 그라나다는 고립정책을 폈고,
유리한 지형을 모두 이용하여 국경을 강화했다. 이 무렵 유수프 1세(1333~54 재위)와 무하마드 5세는
알람브라 궁전을 세웠다
[Daum백과] 그라나다 –
이 도시의 이름은 '석류'를 의미하는 스페인어인 '그라나다'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지방에는 석류가 무척 많고 이 시의 문장에도 석류가 그려져 있다. 또한 이 도시가
무어인에게 정복당했을 때의 이름인 카르나타(가르나타)에서 유래했을 가능성도 있는데,
그 뜻은 '이방인들의 언덕'일 것으로 여겨진다.인구는 약23만명
시에라 네바다산맥
시에라 네바다 산맥은 안달루시아 지방에 있는데 눈덥인 산자락이란 뜻으로 유럽에서
가장 남쪽에 위치한 스키시설로 아름다운 지중해를 끼고 있어 관광객들의 각광을 받는다고한다
그라나다는 에스파냐(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자치지방(autonomous community)의 그라나다주(州)의 주도(州都)이다.
스페인어로 눈덮힌 산맥이라는 의미를 가진 험준한 산악지역인 시에라 네바다(Sierra Navada) 산맥 북쪽에 위치한다.
과달키비르 강(江)의 지류인 베이로(Beiro) 강, 제닐(Genil) 강, 다로(Darro) 강이 합류하는 지점이며
해발 738m의 고지대에 위치하는 고대도시이다
이베리아 반도의 마지막 이슬람 왕국으로 남아있던 그라나다는 왕족과 귀족들 간 내분이 심화되어 쇠퇴하기 시작하였고 기독교
왕국인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이 결혼하면서 더욱 강한 기독교 왕국으로 합병되었다.
마침내 1492년 그라나다는 아라곤 왕국에 의해 점령되면서 이베리아 반도에서 마지막 남은 이슬람문명은 사라지게 되었다.
현재 그라나다에는 이슬람 왕국의 요새와 궁전, 사원, 대학 등 많은 유적들이 남아있다.
북동부의 다로 강 좌측의 언덕 위에는 이슬람 왕조의 왕궁이자 요새였던 알람브라(Alhambra) 궁전 요새가 있다.
13~14세기의 왕족의 별궁(別宮)으로 사용되었던 곳이며 세계적인 관광지로 명성이 높다.
알함브라 궁전은 그라나다를 한눈으로 바라 보는 구릉 위에 세운 주위 3.5 km의 이슬람시대의 성보(城堡) 가운데
130×182 m의 좁은 부지에 세워졌다. 에스파냐의 마지막 이슬람왕조인 나스르왕조의 무하마드 1세 알 갈리브가
13세기 후반에 창립하기 시작하여 역대의 증축과 개수를 거쳐 완성되었으며 현재 이 궁전의 대부분은
14세기 때의 것이다. 대리석 ·타일 ·채색옻칠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장식의 방이 2개의 커다란 파티오[中庭]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하나는 유수프 1세(재위 1331~59)가 건조한 것인데 ‘미루트[泉]의 파티오’의 1곽으로
사각형의 연못을 따라 한쪽은 공식적인 알현 장소인 ‘대사(大使)의 집’으로 연결된다.
알함브라궁전은 크게 왕궁, 카를로스5세궁전, 알카사바, 헤네랄리페정원 등 4개의 구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공연장
헤네랄리페 정원
왕의 여름 별궁인 헤네랄리페에서는 아치형으로 물을 뿜는 분수와 아담하지만 아름다운 정원을 볼 수 있다.
헤네랄리페의 대표 스팟인 아세키아 중정인데,
아세키아 중정의 볼 거리는 50m 길이의 긴 분수와 회랑이 있다
아세키아 중정(中庭)(정원)의 모습입니다. 수로(水路)라는 뜻의 아세키아는 중앙에 긴 수로를 설치하고
양 옆에 작은 분수들을 만들어 놓았는데 각종 꽃과 어우러져 매우 아름답습니다. 좁고 긴 수로들은
건물을 연결하는 수단이었고 사람들의 동선을 따라 적절히 놓여졌는데 당시 이슬람 사람들은 높은 곳에서
끌어온 물을 낮은 곳으로 보낼 때 물을 관으로 보내고 낮은 쪽 출수구의 입구를 좁게 만드는 방식,
즉 자연유압을 이용해 물을 분출 시키는 효과도 낼줄 알았는데 이 방법이 오늘날의 분수의
효시가 되었다고 합니다.
알람브라궁전에서 가장 뛰어난 중정(中庭)으로 손꼽히는 왕궁의 아라야네스의 안뜰은 정확한 대칭구조를 이루는 건물 중앙에 사각형의 연못이 있다.
이곳 직사각형의 연못이 나스르궁의 대표 장소 중 하나인 코마레스궁인데,
코마레스 궁의 대표 중정인 아라야네스 정원이다..
코마레스궁의 중정인 아라야네스 중정을 둘러싼 대사들의 방을 관람하고 나오면 또 다른 중정이 펼쳐지는데,
정말 궁전 하나하나가 미로 같기도 하고 너무 비밀처럼 숨어있는것 같기도 하고,
엄청난 세공이 들어간 기둥들로 둘러 쌓인 이 중정은 총 124개의 기둥으로 둘러쌓여 있다고 한다.
이 중정의 이름은 사자의 중정(레오네스)인데 사자 열두마리가 떠 받치고 있으면서
사자입에서 물이 나오면서 시간대를 맞추는 시계라고 한다.
그중 몇마리가 입이 막혀서 수리를 하여도 옛모습은 찾을길이 없다고 한다.
또 한쪽은 무하마드 5세가 건조한 ‘사자(獅子)의 파티오’의 1곽으로 8두의 사자가 받치고 있는 분수반(噴水盤)을
중앙에 두고 촘촘히 선 문주(門柱)의 회랑(廻廊)으로 둘러싸이고, 천장과 벽면은 아라베스의 아름다움으로 알려진
‘두 자매의 방’을 비롯해 주위의 각실(各室)과 함께 매력이 넘친다. 변화가 많은 아치, 섬세한 기둥, 벽면 장식 등
모두가 정교하고 치밀하여 이슬람 미술의 정점을 형성하고 있다. 이 궁전은 에스파냐가 그리스도교도의 손으로
빼앗은 뒤에도 정중하게 보존되었고, 18세기에 한때 황폐되기도 하였으나 19세기 이후에 복원, 완전하게 보전하여
이슬람 생활문화의 높이와 탐미적인 매력을 오늘날에 전하고 있다
워싱톤 어빙은 학부시절 영문학에서 미국소설 과목에 나오던 유명한 소설가인데,
알함브라이야기 라는 소설로 이곳을 더욱 널리 알렸기에 방 하나의 이름판을 걸어준것 같다
워싱턴 어빙, 알함브라를 구하다
알함브라의 낭만적 이미지를 만드는 데 워싱턴 어빙이 기여한 공로는 크다.
스페인 전역에서 아랍의 유적들이 소리소문 없이 파괴되고 있는 와중에 쓰여진 이 책 '알함브라'는
영어권 사람들에게 알함브라 궁전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었다.
그후 알함브라는 전설적인 존재로 자리잡게 되었으며, 수많은 관광객을 불러모았다.
그 덕분에 알함브라는 더이상 파괴되지 않고 보존되고 새로 건축될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의 알함브라는 알함브라의 환상을 만들고, 환상의 알함브라는 실제의 알함브라를 구했다.
그 한가운데 소박한 표정을 한 작가가 있었으니, 알함브라의 영광 한 가운데
그의 이름을 새기는 것이 어찌 기껍지 않겠는가.
왕의 집무실이자 사적인 주거공간이었다는 이곳은
왕의 숙소와 그의 여자들(?)의 방으로 둘러쌓인 하렘입니다
이곳 방들의 천정은 모카라베 기법이라 불리는 이슬람 장식기법으로 치장이 되어 있는데,
종유석 동굴이 아닌 이 모든 세공이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점에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여러 방들을 둘러보다 보니 사진찍다가 지쳐서 ~~어느 방을 봤는지도 기억하기 어려워진다
왕의 방과 대사들의 방이 한곳에 건축되어 있어설 접견하기는 좋았겠다는 생각이
내부 문양(질리즈문양)이 정교하고 섬세하고 뭐라 표현하기도 어려운 놀라운 문양이다
이 샘물이 알함브라궁전의 모든곳에 수로를 통하여 돌고 돌아서 흐르는데~~
이 물의 근원을 찾아서 따라가보니 오늘 하루 종일 감상하던 시에라네바다산맥의
만년설에 연결이 되었더라고 한다.
그 옛날에 이슬람의 건축기술이란 하나에서 열까지 놀랍기만 하다.
나스리궁 가면 '비극의 방'이라고 귀족인 아벤세라헤스가 죽임을 당한 방이 있는데~
그 귀족과 후궁이 밀회를 나눴던 곳이 이 나무 아래라고 해요.
왕은 이들을 다 죽이고도 분노가 가라앉지 않아 이 나무마저 물길을 끊어 고사시켰다는 이야기
헤네랄리페에서 바라보니 바로 보이는 저 나사리궁은 이슬람왕조를 몰아낸후 궁을 파괴하여 성당을 건축하였는데
이사벨 여왕이 그대로 보존하라고 하여서 이슬람 사원안에 성당이 있게되었다고 한다.
궁전의 화려한 내부장식들은 유수프1세(1354 죽음) 때 만들어졌다고 추정되는데, 1492년
무어인들이 축출된 뒤 대부분의 내부장식이 없어졌으며 가구들은 파괴되거나 철거되었다.
현재 알함브라 궁전은 크게 나스로궁전, 카를로스 5세 궁전, 헤네랄리페 정원, 알카사바 등
4개의 지역으로 나뉘어지며 또한 나스로궁전은 총 7개의 궁으로 이루어졌으나,
현재는 메수아르궁, 코마레스궁, 라이온궁 3개만 남아 있을뿐이다.
성곽 뒤로 알바이신 지구의 풍경이 펼쳐진다
나스르왕조의 마지막 왕인 보압딜(Boabdil)이 두 왕(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5세)에게
도시를 넘겨주는 조약을 맺은 후 아프리카로 떠나면서,
알람브라궁전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는 곳은 '한탄의 언덕'이라고 부르고 있다
헤네랄리페 궁전에서 헤네랄리페 정원으로
헤네랄리페 궁전에서 헤네랄리페 정원을 거처 알카사바성과 카롤로스5세궁전으로이동
이곳 알함브라궁전 입구 앞에는 키가 아주 큰 표족하게 솟은 사이프러스나무가 가로수처럼 서 있는데,
고흐의 그림에서 많이 나오는 나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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