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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알함브라궁과 알카사바성

헤네랄리페 궁전과 정원을거처 알파사바성과 카를로스5세 궁전으로 이동한다

 

 

시에라 네바다 산맥에서 물을 끌어와 궁전의 샘으로 이송하는 수로다

 

 

 

병사들의 병영이 있던자리

산프란시스코 관광호텔인 것 같다

 

스페인이 이곳을 점령하고 지은 듯한 산타마리아 교회.

비밀의 입인줄 알았는데 우체통이라고

와인게이트

 

 

이름하여 알바이신 지구라고 하는 산동네같은 풍경이다.

알함브라궁전 맞은편 언덕에 위치한 알바이신 지역에는

이슬람 지배 당시의 그라나다 모습이 많이 남아 있다.

알람브라궁전과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주택들이 아직도 남아 있으며,

이슬람풍의 장식과 정원, 높은 벽들이 보인다.

미로처럼 복잡하게 얽힌 꾸불꾸불한 길도 그대로이다.

알바이신은 이슬람교도들이 그라나다에 왕국을 세우면서 제일 먼저 성채를 건설했던 곳이며,

1492년 그라나다 함락 때 거센 항쟁을 펼쳤던 역사의 현장이기도

 

아몬드 나무 꽃이라는 사람도 있고 내가 보기는 아닌것 같은데

 

 

 

 

그시대 사용하였던 대포알

병사들의 병영이 있던곳

알카사바는 로마시대의 성채를 이슬람식으로 개조했다고 하며 높은 탑들이 상징이다

알함브라 궁전을 방어하는 알카사바 요새중에 제일높은 망루

 

 

알함브라 궁전은 그라나다 시내 어디에서나 보이는 언덕에 지어진 요새다.

언덕 사이에 난 계단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알카사바 정상에 다다른다.

알카사바는 알함브라 궁전에서도 가장 오래된 성채로, 30여 개의 망루가 설치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높은 벨라 탑에 오르면 그라나다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성에서 바라본 알바이신 지구

앞에보이는 건물

그라나다 중심에 있는 대사원(까테드랄)이며 르네상스기인 1523년에 시작하여

1703년에 완공했다 . 그 옆에 이사벨라, 페르디난도 두 왕의 묘소가 있는

왕실예배당이 있는데 1521년 그곳에 안치했다 .

'알카사바 요새'알함브라 궁전을 방어하는 요새이다. 이곳에는 군인들이 머물던 시설과 집터 등의

 유적이 발굴 형태로 노출되어 있었고, 성벽과 망루 위의 벨라 탑이 남아 있어 관람객들이 가는

필수코스가 되었다. 이슬람이 항복으로 물러났기에 이곳은 격전을 치르지 않고 온전하게 보전된

채 넘겨졌기에 이렇게 남아있다고 한다.

 

 

벨라의 탑

 

벨라의 탑에서 바라본 그라나다 시내

그라나다 시내풍경 

병사들의 병영이 있던곳

 

오전내내 내 눈을 현혹시켰던 저 시에라 네바다 산맥의 설경

 

아르마스 타워에서는 온 세상이 내눈앞에 펼쳐지는듯한 조망이 정말 좋아서

그라나다 시내와 알바이신지구를 마음껏 감상한다.

그라나다는 유럽에서 이슬람 세력의 마지막 거점이 되었던 도시다.

8세기부터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해왔던 이슬람교도들은 15세기 말 그라나다를

  잃음으로써 유럽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이슬람교도들은 떠났지만 그라나다 곳곳에는 그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세계인이 그 아름다움에 감동하는 알람브라궁전과 오래된 주거지역인

알바이신(Albaicin)이 대표적인 곳이다. 

카를로스 5세 궁전은 밖에서 보면 정사각형, 안에서 보면 32개의 기둥으로 둘러싸인 원형광장펼쳐진다.

저기 둥근 큰고리는 왕실과 귀족들의 말을메는 고리라고 하네요

 

카를로스5세

세계를 한 손에!

1516년에 페르난도 왕이 죽고 난 뒤, 스페인의 왕위 계승권은 가톨릭 왕들의 딸인 후아나와 오스트리아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아들 펠리페 사이에서 낳은 카를로스에게로 넘어갔다.

그가 바로 스페인에서는 카를로스 1, 신성 로마 제국에서는 카를로스 5세였다.
1519
, 막시밀리안 1세가 서거했다. 카를로스 5세는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합스부르크 왕조의 모든

 영토를 물려받았다. 그리고 할머니 마리아 데 보르고냐로부터는 플랑드르와 프랑크 공국 및 보르고냐

 백작령을, 외할아버지인 페르난도 왕으로부터는 카스티야-아라곤 연합 왕국과 나폴리, 시칠리아

 및 세르데냐 등의 이탈리아 영토를, 외할머니인 이사벨라 여왕으로부터는 카스티야 왕국과 신대륙

 및 아프리카 등의 해외 영토를 물려받았다.
즉 카를로스 5세는 스페인과 유럽의 주도권은 물론이고, 신대륙의 통치권과 함께 멕시코와 볼리비아,

 페루에서 금광과 은광 채굴권까지 장악했던 것이다. 더 나아가 발보아가 1513년에 발견한 태평양과

필리핀까지도 그의 영토가 되었다. 이처럼 카를로스 5세는 근대에 존재했던 모든 제국들 중에서

가장 거대한 제국을 지배했는데, 이전의 그 누구도, 심지어 로마의 황제들조차도 그렇게 거대한 영토와

 다양한 민족, 그리고 풍부한 재화를 한 손에 거머쥐지는 못했을 것이다.

 

스페인어를 모르는 국왕

이렇게 거대한 제국을 물려받은 카를로스 5세는 스페인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교육도 플랑드르(지금의 네덜란드 지역)에서 받았다. 카를로스 5세는 여섯 살에 플랑드르를

 물려받았는데, 그때까지 정치 경험이 하나도 없는 것은 그렇다 쳐도, 더욱 기가 막힌 일은

스페인어를 하나도 몰랐다는 사실이다.
수염도 채 돋지 않은 이 소년은 합스부르크 왕조의 일족에게 유전되어 내려오는 결점을 세상에

보여주었다. 앞으로 삐죽 튀어나온 긴 턱이 바로 그것인데, 이 때문에 그는 음식을 제대로

씹을 수 없었으며, 입을 다물 수도 없었다. 카를로스 5세의 벌어진 입술 사이로 파리가 아무 때고

 쉽게 입 안으로 날아들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 젊은 왕은 수염을 기르기 시작했다.
이처럼 호감을 주지 못하는 외모는 차치하고라도, 스페인어를 모른다는 사실이 스페인 사람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모욕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스페인의 사정에 대해서도 전혀 몰랐고

탐욕스러운 플랑드르인 측근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모든 것을 감싸 안은' 제국의 통치

스페인의 왕위를 물려받은 카를로스 5세는 프랑스나 영국이 했던 것처럼 스페인을 중앙 집권 체제로 변모시켰다.

 그는 스페인을 이베리아 반도만의 폐쇄된 지역에서 대륙의 제국, '모든 것을 감싸 안은' 제국으로

변모시키려고 했다. 카를로스 5세는 방대한 영토에 일단 가톨릭이란 종교를 앞세워 초국가적 통일체를

형성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가톨릭 왕들이 스페인과 신대륙의 종교적 통일을 위해 투쟁했다면 카를로스 5세는

 유럽의 종교적 통일을 위해 투쟁했다. 그런데 그가 우선 합스부르크 왕조 지역인 독일에 먼저 초점을 두고,

그 다음 플랑드르, 스페인 순으로 관심을 갖다 보니 스페인은 단지 유럽 제국의 보조적인 관심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부작용이 생겼다. 신대륙에서 들어오는 모든 부가 스페인을 위해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카를로스 5세가 유럽의 패권을 잡는 데 사용되었다.
집정 기간 동안, 그는 방대한 영토의 통합을 위하여 끊임없이 전쟁을 치러야만 했다.

오스만튀르크 족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오스만 제국을 침공해야 했으며 프랑스와도 여러 번 전쟁을 치러야 했다.

 이렇게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와 전쟁을 하다 보니, 전쟁을 위해 수많은 군인을 무장시키고 먹여 살리기

위해서 막대한 돈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서는 신대륙으로부터 들어오는 모든 금은보화를 외국 은행에 담보로

 제공하고 돈을 빌려올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국내에는 인플레 현상이 가중되어 물가가 올랐고

그에 따라 세금도 올랐다. 특히 귀족들은 그들이 최근에 획득한 모든 부를 산업이나 농업이 아닌 땅이나

보석, 장식물에 투자했기 때문에 스페인의 경제 기반은 경쟁력이 없어지고 약해지기만 했다.

시간이 갈수록 스페인은 빚더미에 올라앉을 수밖에 없었다.

반란에 휩싸인 스페인 제국

막대한 세금 부과로 인한 경제의 침체뿐만 아니라, 정부 일에 외국인들이 참여하는 빈도가 높아지자

스페인 국민들 사이에는 불만이 고조됐다. 1517년 카를로스 5세가 플랑드르 출신의 민간인 및 성직자들을

 데리고 스페인에 온 데다, 중요 사안들을 스페인 귀족이 아닌 그들과 결정함으로써 스페인 국민들의 불만은

 더욱 높아졌다. 뿐만 아니라 그는 교회와 귀족들에게 새로운 세금을 부과했고 물건 매매에도 세금을 매겼다.
더욱이 카를로스 5세는 할아버지 막시밀리안 1세에 이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기 위해 막대한

액수의 돈을 썼다. 결국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에 피선되었지만 스페인에게는 큰 이득이 없었다.

오랜 기간 국왕이 스페인에 머무르지도 않았고 국왕의 통치 비용 증대에 따른 스페인 국민들의 과세 부담이

 증가되었기 때문이었다.
1520
년에 카를로스 5세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취임하기 위하여 스페인을 떠났다.

 그러나 그가 떠나고 난 후, 스페인은 반란에 휩싸였다. 이는 스페인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외국인 카를로스 5세와

 플랑드르 귀족들에 대한 뿌리 깊은 불만의 표출이었다. 반란이 전국으로 확산되며 1년 여 동안 지속되자,

플랑드르에 머물고 있던 카를로스 5세는 세금의 징수를 연기하고, 더 이상 외국인들을 관직에 임명하지

 않겠다고 스페인 국민들에게 약속했다. 1521년에 반란군들은 모두 진압되었고 카를로스 5세가 귀국했던

1522년에는 스페인에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1층은 도리아식이고, 2층은 이오니아식으로 건축되었으며 음향효과가

좋아 매년 여름이면 그라나다 음악제의 무대가 되기도 한단다.

1층은 스페인 미술관, 2층은 이슬람 공예품을 전시한 미술관도 있다

거대한 원형 중정이 펼쳐지는데 너무 거대해서 카메라에는 한꺼번에 잡히지를 않는곳이다.

이곳의 사진에 담아진 저 회랑에서 옛날에 우리의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 선생의

 유족들이 유품전시회를 가졌었다고 한다.

이곳에는 사용중인 미술관도 있는데, 2층에 올라가서 내려다보면 정말 거대함을 느낀다

 

바로 카를로스 5세 궁전으로 이곳은 이슬람의 건축물이 아닌 알함브라를 점령한

카를로스 5세가 스페인 제국의 위상을 보여주기 위해 지은 건물이라 한다.

 

아담한 연못과 야자수가 진짜 오아시스처럼 보이는 파르탈 정원(Patio de Partal)’성벽 방향에

귀부인의 탑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아름다운 건물이 지어져 있다

'알함브라(Alhambra) 파르탈 정원'의 풍경

 알함브라의 여러곳을 돌아보고 이제 떠나야할 시간 저건너

여름궁전을 다시한번 담아본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테레가
테레가는 근대기타의 아버지로서 현대기타 발전의 터전을 닦아놓은 은인이었다

그는 필연성에 의한 작곡만을 했으므로 모든 작품이 기타의 명곡으로 꼽히고 있다

알함부라 궁전의 회상은 타레가가 그라나다 교외에 있는 알함브라 궁전을 구경한 후

작곡했다 제자인 코치부인과 같이 갔던 그날밤 그는 깊은 감명을 받았던 모양인지 궁전의

 아름다움을 트레몰로 주법으로 그려놓았다

 곡은 전반 가단조와 후반 가장조로 반복된다 코다에서는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인상깊게 새기며 끝난다 이곡은 원래 알함브라 풍으로 라고 이름짓고 기도라는

부제를 출판사에서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라고 고첬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