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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울산

울산 학성공원과 충의사

학성공원이 조성된 것은 학성공원에 있는 추전 김홍조의 비석에서 그 유래를 알 수 있다. 옛날에는 바닷물이 학성공원밑에까지 들어왔다하는데
학성(鶴城)은 신라의 계변성(戒邊城)이라 하던 성에 정유재란 때 왜장 가또 기요마사에 의해 새로 축성되었고 후에 도산성(島山城)이라 불러왔다.
이 성을 학성이라함은 신라말에 천신(天神)이 학을 타고 이 신두산에 내려와 고을 사람들의 수록(壽綠)을 주장하였다 하여 신학성(神鶴城) 이라
하다가 뒤에 학성(鶴城) 이라 한데서 유래하였다.

학성공원은 1913년 추전 김홍조가 이 곳의 개인 소유지 23,140.6m²(7,000여평)을 사들여 흑송, 벚나무, 매화나무 등을 심으며
공원으로 만들어 이것을 개인소유로 하지 않고 당시 울산면에 기증하면서 오늘날의 학성공원이 되었다한다. 공원내에는

 봄 편지 노래비, 충혼비가 있다.

[Daum백과] 학성공원 – 대한민국 구석구석,

 

 

 

 

 

 

 

 

 

조금오르니 넓은 광장이 나오고 그앞에는 충의비도 있고 봄편지 시비도 있다

봄에 벚꽃이 필때면 무척 아름다울것 같다

 

 

 

 

 

 

 

 

 

 

학성공원 동백숲

 

태화강 하구쪽 풍경

무룡산 방향 시가지

 

요산대

무너저내린 왜성 성벽

 

왜성

정유재란(1597)때 가등청정이 별성으로 쌓은 성곽이다.

1597. 12. 23~ 1598. 1. 4. 조선군과 명군의 공격을 받아 성밖에서 싸우던 왜병이 패하여 성내에 들어갔으나

식량과 물이 없어 말을 잡아 먹으면서 버티다가 왜의 원군이 와서 함락을 면하였다.

1598. 8. 왜군은 조선군과 명군의 공격을 받아 동남쪽 성문길이 있는 선입지(船入趾)에서 배를 타고

후퇴하였다. 산을 깍아 만든 정상의 본성 자리는 이젠 빈 터만 존재 한다.

 

 

아직도 견고히 남아 있는 왜성

 

 

 

 

새로 축조한 왜성

이단성벽

 

 

선조 30년(1597) 12월 23일부터 이듬해 1월 4일까지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왜군은 우리군과 명나라 연합군에 밀려 성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식량이 없어 소변을 마시고 말을

 잡아먹으면서도 성을 지킨 왜군은 구원병이 오자 성벽을 3중으로 쌓아 수비를 강화하였다. 하지만

이듬해(1598) 2차 전투에서 패한 왜군은 밤에 성을 불태우고 후퇴하였다.

이 성은 산정상을 중심으로 본성을 두고, 북쪽과 서북쪽에 2∼3겹으로 성벽을 쌓았는데,

성벽의 길이는 1.300m이고 높이는 10∼15m이다. 여기에 망을 보기 위해 높이 지은 망루 12개를

만들었으며, 남쪽을 제외한 3면에 흙으로 제방을 쌓고 다시 그 위에 나무 울타리를 설치하였다.

 남쪽은 바다를 접하고 있어 배가 성 아래까지 들어와 정박할 수 있었다.

 

군데군데 왜성의 흔적이 남아있다

초롱꽃이 환한 모습으로 반겨주네

학성공원의 왜성을 돌아보고 여기 충의사로 왔다

부산에 충렬사가 있다면 울산에는 충의사가 있다

홍살문을 지나 충의사로 들어간다

창의

울산 임란 의사 사적비를 살펴보고

 

 

 

 

 

7년에 걸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은 조선의 국가와 민중에게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울산지역도 이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오히려 동남해안에 주둔한 가또오군과 최전선에서 맞서야 했던

 지리적 여건때문에 그 피해는 더 막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울산지역의 농·어민 등 백성들은

 이런 어려움을 굳건히 이겨내며 왜군에 항전하였다.
유생 등 지도층 인사들은 의병을 조직하여 지역의 요새지에서 유격전을 펼치면서 왜적과 맞서 싸워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정유재란 때에는 도산성에서 농성하는 가또오군을 공격하는 관군에 협력하여

 적의 북상을 저지하였고, 마침내 적이 물러가게 하였다.
고난을 극복한 울산지역의 군민(郡民)은 국왕으로부터 각별한 칭송을 받았고 많은 인사들이

선무원종공신에 책훈되었다. 울산은 도호부로 승격되어 조선후기 내내 그 읍격(邑格)이 높아진 영광을

 안았다. 향토와 조국을 지키다 산화한 선조들의 영령은 충의사에 위패가 봉안되어 오늘날에도

후손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관군이 일거에 무너진 울산에서는 선조 25년 4월 23일에 처음으로 기박산성(旗朴山城)에서 의병에 결집하였다. 이들은 박봉수(朴鳳壽)를 대장으로 삼고, 좌익장에 박응정(朴應禎), 우익장에 장희춘(蔣希春), 좌위장에 고처겸(高處謙), 우위장에 이봉춘(李逢春), 찬획에 심환(沈渙), 종사관에 이한남(李翰南), 운량호군에 이경연(李景淵) 등으로 대오를 편성하였다. 그 후 5월 5일에는 경주에서 유정(柳汀), 유백춘(柳伯春)등이 500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합류하여 군세가 크게 늘어났다.
이들은 5월 7일 밤에 왜적이 점령하고 있는 병영성을 공격하여 수백 명을 참수하고 군기 군량을 노획하거나
 불지르고 산성으로 개선하였다.
이로써 울산 의병의 군세가 크게 떨쳐졌다. 이외에도 인근 각지에서 울산 의병에 의한 소규모 전투가 벌어졌고,
 그 중에서도 울산의 공암(孔巖), 달현(達峴), 사자평(獅子坪), 관문성(關門城), 이견대(利見臺)와 경주의 문천(汶川), 소등(所等)과 대천제(大川堤) 전투 등은 후세에 이르도록 각종 문집과 실기 등에 남아 전해져오고 있다

이 전투들은 대체로 익숙한 지형을 이용한 유격전으로 치러졌고, 울산 의병의 용맹을 떨친 것이었다.
울산지역 의병장으로서 전술이 뛰어나 관군에 편입된 인물 중 특히 수전에서 많은 공을 세운 서인충은

 어모장군(禦侮將軍) 훈련원정(訓練院正)에 임명되었고, 장희춘은 울산군수의 군관으로, 이겸수(李謙受)는

 좌병사 군관 북부주부(北部主簿)로, 김언복(金彦福)은 경상방어사 군관 주부로 제수되었다. 특이하게

울산의 백정(白丁) 장오석(張五石)같은 천인에게도 반드시 관직을 주라 한 기록이 있다.

왜군들은 정유재침시에도 왜란초기인 선조 25년과 26년에 후퇴한 후 동남해안에서 축성하여 농성하던 방식 그대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다시 동남해안으로 후퇴하여 수성(守城) 작전에 들어갔다.

가또오는 결국 선조 31년 11월 18일에 울산성을 불태워 버리고 퇴각하였다. 서생포성까지 모두 빈 성으로

 남겨 둔 채로 철군해 버린 것이었다. 전란에서 큰 공을 세운 자들을 엄격히 심사하여 세 종류의 공신들을 선정 포상하게 된 것은 선조 37년(1604) 10월에 이르러서였다.
경상도체찰사 이덕형(李德馨)의 ‘울산읍민들이 왜적 토벌의 공이 가장 많다’는 보고를 받은 조정에서는
 선조 31년 12월 21일에 울산군을 울산도호부로 승격시키고 부사(府使)를 임명하였다.

 

 

 

 

 

 

 

 

 

 

 

 

 

 

 

 

 

임난때 참전하여 공을 세우신 의사 214분의 위패와 무명제공신위를 봉안하고 매년 춘추로 제향을 올린다.

전사청 제사에 필요한 모든 것을 보관하는곳

 

 

묵념을 올리고 나왔다

마을의 어느집 터밭에는 탐스런 가지와 오이가 매달려있다 농사를 아주 잘 지으시는 분인가보다

 

태화강변을 걸으며 다시 학성공원을 담아본다

강가에는 벌써 갈대 종류의 꽃이피고 있다

누드배키아 천인국도 담으며

무성하게 자라는 억새와 개망초도 담으며 오늘의 여행을 마친다

부산에 우리동네에 오니 하늘이 너무 깨끗해 카메라를 꺼내 사진으로 담아본다

정말 얼마만에 이렇게 맑은 하늘을 보는가 감개가 무량하다면 무리한 표현일까?

이렇게 맑은  하늘을 보면서 매일 미세먼지에 찌드른 하늘이 원망스럽기만하다

언제나 예전 우리 어렸을 때처럼 살수 있을런지?


Ein Kleines Gluck (하나의 작은 행운)/ Monika Mart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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