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경남.울산

함안조씨 무진정과 악양 뚝방길

무진정


함안 군청소재지인 가야읍에서 서쪽으로 3㎞ 떨어진 곳에 있으며, 1547년(명종 2) 후손들이 그를
기리기 위하여 정자를 세워 그의 호를 따서 무진정이라고 하였다.
앞뒤의 퇴를 길게 빼고 중앙 한칸을 온돌방으로 꾸며놓은 현재의 건물은 1929년에 중건한 것인데,
조선 초기의 정자형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으며, 아무런 장식 없이 단순하고 소박하게 꾸며져 있다.

 ‘無盡亭’이라고 쓴 편액과 정기(亭記)는 주세붕(周世鵬)의 글씨로 추정된다.

[Daum백과] 무진정

 

함안조씨 제실

마을 집집마다 이렇게 꽃을 가꾸어 놓아 참 보기 좋다

 

함안조씨 제실

저위에 보이는게 무진정이다

무진은 조선 성종 14년(1483) 진사시에 합격하고 중종 2년(1507) 문과에 급제하여

함양·창원·대구·성주·상주의 목사를 지냈고,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 겸 춘추관(春秋館)

 편수관(編修官)을 지냈다. 

함안 이수정(무진정이 있는 이곳은 함안의 3곳 수정 중 하나이다. 1수정과 3수정은 없어졌고 2수정만 남았다)

이곳은 매년 사월초파일에 거행되는 낙화놀이로 유명한 곳이다.

 

 

 

 

 

* 무진정의 형태와 구조 *
앞면 3칸·옆면 2칸의 건물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자 모양과 비슷한 팔작지붕이다.

앞면의 가운데 칸에는 온돌방이 아닌 마루방으로 꾸며져 있고, 정자 바닥은 모두 바닥에서

 띄워 올린 누마루 형식이다. 기둥 위에 아무런 장식이나 조각물이 없어 전체적으로

단순하고 소박한 건물로 조선 전기의 정자 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현재의 건물은 1929년 4월에 중건한 것으로 기둥 위에 아무런 장식이나 조각물이 없이

단순 소박하게 꾸민 팔작지붕의 건물로 조선 초기의 정자형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앞뒤의 퇴를 길게 빼고 중앙의 한 칸을 온돌방으로 꾸며놓았다.

무진정은 인근 검암천 물을 끌어들여 물이 항상 넘처 흐르도록 만들어졌으며 무진정

연목(이수정)에는 연못 전체가 개구리밥과 노랑 아리연 잎이 덥여 연초록 색인데

이번에 낙화축제 때 모두제거했나보다 원래는 1.2.3수정이 있었는데 신작로를 만든다고

 1.3수정은 없어젔다고 한다  이수정 바로위에는 무진정이 자리하고 있는데 연목 가운데

작은섬을 만들어 세운 정자를 송영루라하며 다시교각을 세워 무진정으로 오를 수 있도록

 조성하였다

 

이수정 중앙에 있는 송영루 손님을 맞이하고 보냄의 뜻으로 송영루라 했다고함

현재 둥근 모습을 하고 있는 못은 원래 반달 모양이었다고 한다 .

더욱 재미있는 것은 현재 우리나라의 국도 노선체계는 일제시대에 닦여진 것인데 무진정 앞을

 지나는 국도 79호선도 원래는 무진정 뒤편으로 날 예정이었다고 한다. 일제는 직선 도로를

명분으로 하고 있지만 그렇게 될 경우 풍수학적으로 혈이 끊어져서 타고난 명당 지세가 훼손이

 되고 만다. 이에 문중 어른들이 육탄으로 막아내 오늘날의 모습을 지켜 냈다고 한다 .

지금은 한국식 전통 정원의 양식을 지켜온 우수한 문화재라 평가받고 있으며 조삼 선생의

 15대손인 조영제(73)님이 지키고 있다

무진정 옆의 부자쌍절각 (父子雙節閣)은 충효의 귀감으로 삼고 있는 조영재님의 11대조와 12대조를

기리기 위해 조선 숙종 때 건립되었다. 12대 조부(조준남)는 정유재란 때 왜인들이 선조들의 무덤을

 파헤치려 하자 몸으로 이를 막아낸 후 무진정에서 자결을 하였으며 11대 조부(조계선)는 정묘호란 때

이완 장군의 휘하에서 오랑캐를 무찌르는데 큰 공을 세웠다고 한다. 더 재미있는 것은 이때 전사한

11대 조부는 그 시신을 찾지 못하였으나 조부를 따르던 종이 유품을 챙겨서 돌아왔다고 한다.

은 주인을 제대로 섬기지 못한 것을 한탄하여 주인을 뒤따라 목숨을 끊었으니 조(趙) 문중에서는

그 뜻을 기려 정성으로 묘를 써주고 충노비(忠奴碑)를 세웠으며 지금도 제를 올려 그 넋을 기리고

 있다고 한다

 

 

 

여기에서 4월8일 부처님오신날이 되면 이렇게 낙화놀이가 진행되는데 한지에

참숯 가루를  싸서 새끼를 꼬아 줄에 매달고 불을 붙이면 이렇게 타들어

가면서 불꽃이 튄다고 한다

 

 

 

 

송영루에 버티고 서있는 왕버드나무

무진정은 함안 기차역에서 약 1km떨어저있어 기차타고 들려봐도 편리하다

우리는 이곳을 떠나 악양 뚝방길로 이동을한다

저 앞에 보이는 산이 아라가야 고분군이 있는 말이산이다

악양 뚝방길 풍차도 보이고 각종 꽃이 피어있다 얼마전 까지만 해도 꽃양귀비와 수레국화가

만발했었다

경남 함안군 법수면 윤외리 87-6 

분홍 낮 달맞이꽃

 

 

 

 

 

 

 위에 뚝방길을 따라가면 아래와 같은 악양루가 나오는데 아직 점심을 못먹어 3시반에

식당이 예약이 돼있어 가보지를 못한다

악양루

 중국의 악양의 이름을 따서 지은, 악양루 *
함안군 대산면 서촌리 산 122번지 내에 위치하며 악양마을 북쪽 절벽에 있는 정자로, 조선 철종 8년(1857)에

세운 것이라  한다.

악양루(岳陽樓)는 전망이 아주 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데, 정자 아래로는 남강이 흐르고, 앞으로는 넓은

들판과 법수면의 제방이 한눈에 들어온다.

정자의 이름은 중국의 명승지인 "악양"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전한다. 옛날에는 "기두헌"(倚斗軒)이라는

 현판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청남 오재봉(菁南 吳齋峯)이 쓴 "악양루"라는 현판만 남아 있으며,

1992년 10월 21일 문화재자료 제190호로 지정되었다. 악양루 입구에 처녀뱃사공 노래비가 있다.

한국 전쟁 이후에 복원하였으며, 1963년에 고쳐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처녀뱃사공비 뒤에는 처녀뱃사공 노래의 역사(?)를 말하고 있었다.

<남강이 흐르는 법수면과 대산면을 잇는 악양나루터에는 처녀뱃사공이 노를 저었다.

6.25전쟁이 막 끝난 1953년 9월 유랑극단 단장인 윤부길(가수 윤복희의 부친)이 그 모습이 궁금해 사연을 듣게 된다.

당시 23세였던 박말순과 18세 박정숙 두 아가씨가 교대로, 군에 갔다 소식이 끊긴 오빠  박기준을 대신해 노를 젓게 된 것이다. 
그 애절한 사연을 가사로 쓰고, 1959년 한복남의 작곡으로 민요가수 황정자의 입을 통해 노래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천인국이해야하아 기생초라 해야하나 헤갈려

한련화

인디안국화

바늘꽃

 

 

 

악양 뚝방길은 낙동강의 지류의 뚝방길로 봄 여름 가을 끈임 없이 꽃이 피고진다

부산과 창원쪽에서 많은 인파가 몰리는곳이며 특히나 가을에 코스모스 필때

강주의 해바라기 축제와 연계해서 둘러보면 멋진 꽃구경을 할 수가 있다

 

왼쪽에 조그만하게 보이는게 악양루이다

 

막걸리병으로만든 바람개비

이렇게 조금 굴러가고  6만오천원 이라고  사실인지 물어보고 싶었는데~~

 

 

패랭이꽃

끈끈이 대나물

수레국화와 양귀비의 동거

자주달개비

황금달맞이꽃

 

 

 

늦은 점심겸 저녁을 먹고 우리는 부산으로 출발을하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일기예보에는 비소식이 없었는데 그래도 일정 맞추고 내려주니 고마울 따름이다



 

'경남.울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울산 십리 대숲과 대왕암  (0) 2018.10.01
울산 선암호수공원  (0) 2018.07.01
함안 입곡 군립 공원 트래킹  (0) 2018.06.24
울산 학성공원과 충의사  (0) 2018.06.23
울산 태화강 금계국  (0) 2018.0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