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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대전

서원리 소나무와 선병국 가옥

말티재로 가다가 선병국 가옥으로 방향을 돌렸는데 가다보니 의외로 서원리 소나무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보은 서원리 소나무 천연기념물352호

                                                                     소 재 지;충북 보은군 장안면 서원리 49-4외 1필

보은 서원리의 소나무는 속리산 남쪽의 서원리와 삼가천을 옆에 끼고 뻗은 도로 옆에 있으며,

 나이는 약 600살 정도로 추정된다. 높이 15.2m, 뿌리 근처의 둘레 5.0m, 줄기는 84㎝ 높이에서 2개로 갈라졌으며,

전체적으로 우산모양을 하고 있다. 법주사 입구의 정이품송과는 부부사이라 하여 ‘정부인송’이라고도 불리운다.

 정이품송의 외줄기로 곧게 자란 모습이 남성적이고, 이 나무의 우산모양으로 퍼진 아름다운 모습이 여성적으로

 비유되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들은 매년 이 소나무에게 마을의 평안을 비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 실제로 정이품송의

 꽃가루를 가루받이를 하여 후계목을 길러내는 사업을 시도하였다. 속리 서원리의 소나무는 민속적·생물학적

자료로서의 보존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소나무가 낙엽젔을 때의 모습

 

속리산 기슭인 충북 보은군 장안면 개안리에는 중요민속문화재 134호인 '선병국 가옥'이 있다.

하천 사이 삼각주 모양의 널찍한 터에 소나무 숲을 조성하고 그 안에 4천 평 규모로 지은 134칸의 대저택이다.

 

고흥 부자 선영홍은 유명한 지관으로 하여금 길지를 찾게 하여 마침내 우리나라 최고의 길지인 

충북 보은군 장안면 개안리 154번지를 찾았고,  이곳에 1909년부터 시작하여 1921년 99칸 집을 완공하였다.

 99칸 외에서당 30칸을 별도로 지었다고 한다. 방앗간까지 있었다고 하니 당대 나라에서 손꼽히는 부자 중

 한 사람이 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지금은 선영홍의 증손자인 선병국이 살고 있으며 이 가옥의 이름을

 선병국가옥이라고 한다

 

 

뒤 뜰에서 본 사랑채

수리하면서 옮겨 놓은듯한 기와들

 

사랑채 뒷면과 옆면

 

 

 

정면에서본 사랑채 전경

 

안채와 사랑채가 모두 "H" 모양을 하고 있는데

가운데에 대청마루를 두고 양쪽에 방을 배치한 구조입니다.

일반적인 한옥에서는 보기 힘든 파격적인 구조라고 합니다.

 

거주하는 사람들끼리의 원활한 소통을 위하여 독특한 건축 양식을 도입했다는데,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실용을 중시하는 집 주인의 성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爲善最樂(위선최락)사랑채와 안채에 이런 글이 있는데 주희의 말이다

주희는 남송 때의 유학자로 주자라고 부른다. 주희가 한 말로 위선최락은 "선을 하는 것이

최고의 즐거움이다".

집의 기둥이 모두 둥글거나 약간 변형을 줘서 팔각형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원래 원형기둥은 궁궐이나 절을 지을때만  가능했었다고 하니 이 역시 파격적입니다.

 

창과 문살의 형태도 다양하고 볼거리가 많다

 

보은 선병국 가옥은 그의 부친 남헌 선정훈이 전남 고흥에서 많은 부를 쌓은 후에 멀리 타향땅인 충북 보은에 지은 집으로

구례의 99칸 고택 운조루를 벤치마킹하고 경복궁을 중수했던 당대 최고 목수들을 뽑아 지었다고 합니다.

 이 가옥은 속리산에서 발원한 삼가천과 아홉폭의 병풍 같다는 구병산 등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잘 어울리며 99칸집이라고

 하지만 실제는 134칸짜리 집이며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의 어수선한 시기였기에 건축이 가능했을 것으로 추측한답니다.   

 1919∼1921년 사이에 지은 이 집은 개화의 물결을 타고 개량식 한옥구조로 새로운 한옥의 완성을 시도한 것이어서

 학술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고 중요민속문화재 134호로 지정됐습니다. 

 

 

 

 

 

 

 

 

 

 

 

 

 

 

아당골 장 체험장

 

남헌의 도움을 받은 학생들은 훗날 선정훈 송덕비(頌德碑)와 관선정 기적비(紀蹟碑)를 세워 그에 대한 고마움을 전했다.

저택 대문 앞 송림 숲에 세워진 송덕비에는 "오직 교육만이 구국의 길이라고 결심해 관선정을 세우고 보은향교에서

대향회를 열어 훈학했다"고 남헌의 공적을 소개하고 있다. 학생들은 선생의 기일이면 이 집에 모여 함께 제사를

이 집을 지은 이는 선병국의 부친인 남헌 선정훈(宣政薰·1888∼1963) 선생이다.

그는 전남 고흥에서 무역으로 큰돈을 번 부친 선영홍과 함께 1905년 이곳에 건너와 무려 16년에 걸쳐

집을 짓고, '관선정'(觀善亭)이라는 서당을 세웠다.

서당은 무료로 운영됐다. 당대 명망 높은 스승을 모셔다 놓고 전국 각지에서 찾아온 학생에게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하며 배움의 길을 열어줬다. 저택 일부는 이들을 위한 숙소 역할을 했다.

관선정에는 '착한 사람끼리 모여 좋은 본을 받는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저택 남쪽 300여m 지점에 자리 잡았는데, 1944년 일제 탄압으로 철거될 때까지 수백 명이 수학했다고 기록돼 있다.

 짧게는 수개월에서 최장 10년간 이곳에 머물면서 공부한 사람도 있다고 전해진다.

이곳은 일본의 식민교육에 맞서 전통 한학을 가르치면서 민족정신을 이은 배움터로도 유명하다.

이곳 출신 학생 중에는 훗날 광복된 이후 구성된 정부에서 일한 사람도 수두룩하다. 유명한 한학자이며

 서예가였던 임창순·변시연·나준 등도 이곳 출신이다.

 


남헌은 서울에 '대동상사'라는 무역회사를 설립, 여기서 나온 이익으로 서당을 운영했다.

학교와 면사무소를 지을 터를 내놓고 낡은 보은향교 중수에도 참여하는 등 언제나 더불어 사는 삶을 살았다.

이 집안은 조상 때부터 나눔을 미덕으로 삼았다.

남헌의 부친은 소작농에게 논밭을 무료로 나눠주고, 일정 기간 세금까지 대납하면서 가난 극복을 도왔다고 전해진다.

당시 혜택을 본 소작농들은 1922년 전남 고흥에 은혜에 감사하는 시혜비(施惠碑)를 세웠는데,

이 비는 2004년 충북 보은으로 옮겨져 아들 송덕비 옆에 나란히 서 있다.

 

 

孝子 (효자)

贈朝散大夫 童蒙敎官 宣處欽之門 (증조산대부 동몽교관 선처흠지문)

증직 조산대부 동몽 교관인 선처흠의 문 : 조산대부는 벼슬의 품계로 고종 때눈 문관을 조산대부라고 불렀다. 

실제 벼슬은 못하였으나 예를 갖춰 준 가장 낮은 계급의 품계라고 본다. 증은 실제 벼슬은 하지 못하였으나 

사후에 명예로 주었다는 것이다. 동몽교관은 서당의 선생님이고, 선처흠지문은 선처흠의 문이라는 뜻이다.

참고로 선처흠은 아버지가 안질로 어려울 때 매고기를 드려 치료하였다고 한다.  

 

 

 

 

烈女 (열녀)

宣處欽妻 令人 慶州金氏之門 (선처흠처 영인 경주김씨지문)

영인은 선처흠처의 품계이다. 경주김씨의 문이라는 뜻이다.  

高宗2910月 日 고종29년(서기 1892년) 10월에 세웠다.

命旌 戊辰12月 日立 정려를 명한 것은 무진년 (서기 1868년) 12월이다.  

참고로 선처흠의 처는 남편이 위독할 때 자신의 넙적다리를 베었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여러 날을 연명하게 하였다고 한다.

전설같은 얘기지만 그만끔 효와열을 다했다고 칭송하는 것이니

좋게 생각하는게 예가 아닐까요

이 가옥은 99칸의 큰 가옥으로 유명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효자와 열녀가 같이 있는 효열문이 있다는 것이다.

  남편 선처흠은 효자이고, 선처흠 처는 열녀이니 이런 부부는 조선팔도에 전후무후 할 것 같다.

효열문도 대단한 것이지만 거기에 선처흠의 아들 선영홍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풀었다는 시혜비가 있고,

  선영홍의 아들 선정훈도 송덕비까지 있으니 최고의 부를 누리면서 가질 수 있는 모든 명예를 누렸다고 하겠다. 

 

 

밖에서본 안채

 

  

수리하기전에 안채모습

수리하기전의 안채모습

 

수리 들어가기전 안채의 모습

 

위아래는 행랑채다 

 

 

여러각도로 찍어본 행랑채와 뜰

밖에서본 안채

 

 

사당인데 솟을 대문과 화려하게 크게 지었으며 조상의 제사에 정성을 쏟았다고 합니다.

 

안채 후문 

문화해설사는 옆으로는 상당히 큰 계곡이 흐르고 있는데

남헌과 그의 부친이 수해 위험을 무릅쓰면서 굳이 지금의 집터로 잡은 점도 연구해야 한다"며

 "이곳이 1893년 동학군의 집회지였고, 그 뒤 일제에 의해 마을이 송두리째 사라진 점에

 비춰볼 때 항일의 의지를 담은 선택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덧붙였다.

개안리 앞의 냇가

 

 

 선병국의 동생집이다

 

복해가든은 선병국 고가의 작은 댁이다.

 넓은 들녘에 아름들이 소나무숲에 가린 본가와 조금 떨어진 농가마을 입구에 감나무 울타리로

가려져 있는 기와집무리가 바로 작은집의 후손인 선병오(47세)씨의 복해가든이다. 안채와 사랑채로

 나누어진 39간 기와집은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시원한 대청마루와 감나무 아래 펴놓은

 평상에 올라앉으면 그 자체만으로도 고가에서나 맛볼 수 있는 흐뭇한 감회를 느끼게 해준다.


개업 7년째를 맞고 있는 음식은 장어구이를 중심으로 불고기와 삼계탕, 버섯찌개, 순두부가 이미 보은군내

알려진 별미로 꼽히고 있고, 옛 반가집 가풍이 상차림에 배어나 어딘가 음식규모가 다르다는 것이

고객들의 평이다. 특히 직접 콩을 갈아 앉히는 순두부와 손두부는 마을 안에서도 큰 인기를 얻고 있다.

평일인데도 많은 차량들이 들어서고 있다

선병우가의 장독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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