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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망성 나바위 성당

나바위 성당


나바위성당(羅岩聖堂)이라고도 한다. 전라도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이 성당은 1845년(헌종 11) 중국
상해(上海)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귀국한 김대건(金大建)신부가 강경포(江景浦) 부근에 상륙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초대주임이었던 베르모렐(Vermorel, J.)신부에 의하여 1906년에 건축되었다.


한양절충식(韓洋折衷式)의 이 성당은 당초에는 순수한 목조건축이었는데, 정면 5칸, 측면 13칸의 크기에,
정면과 양측면의 툇간이 마루로 되었고, 정면 중앙에 목조종탑(木造鐘塔)과 십자가가 있었다.

 

1916년에 증축하면서 목조종탑을 없애고 고딕식 벽돌조 종각(鐘閣)을 툇간에 덧붙여 증축하였으며, 이 때
목조로 된 벽을 헐고 벽돌로 쌓았고, 양 측면 툇간의 마루를 없애고 회랑(回廊)으로 만들었다.


그 뒤 두 차례의 개수를 거쳐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었는데, 얼핏 보아 19세기 중엽부터 보이기 시작한
한양절충식의 2층 상가건물과 비슷하고, 정면 종각의 입면은 순수한 고딕식은 아니다.


그러나 전혀 상이한 양식의 한식 건물의 합각머리에 붙여 지은 것이 본건물과 조화를 이루어 서양식 성당의
장중함이나 이질감보다는 인간적인 친근감을 느끼게 한다.


이 성당에는 1954년에 건립된 베르모렐 신부의 공훈기념비와 1955년에 건립된 김대건신부의

순교기념비가 있어 전라도지방의 천주교사적지로 많은 신자들이 찾는 곳이다.[Daum백과] 화산천주교회

전북 익산시 망성면 나바위1길 146

 

한옥기와와 고딕식 첨탑이 어우러진 독특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는 오늘날의 모습은 그때 갖춰진 것이다.

특이한 점은 기와지붕 아래 ‘팔괘’를 상징하는 팔각 채광창이 사방으로 나있는점이다.

이것은 당시 건축을 담당하던 중국인들이 중국에서 선호하던 중국건축방식이 일부 도입되었던것으로 보인다.

 

성당의 양 측면에는 전통 사찰에서나 볼 수 있을법한 회랑이 있어 특이했다.

회랑은 기와를 얹은 날개지붕을 이고 있는데, 안에서 보면 서까래가 그대로

 드러난 연등천장을 이루고 있어 한국 전통 분위기가 물씬난다.

옛날에는 이 곳이 회랑이 아니라 툇마루였다고 한다.

예비신자들이 성당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툇마루에서 미사를 봤었다고 한다.

세례를 받지 못한 사람은 '하느님 아버지'라는 말도 입에 담지못했던

옛 천주교의 엄격했던 분위기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곳이다.

 

 

 

 

 

 

 

사제관

나바위 성당 앞면은 수직종탑과 아치형 출입구와 함께 지붕과 벽면이 한옥 형태를 유지하여 인상적이다.

성당 앞면은 고딕양식의 3층 수직종탑과 아치형 출입구로 꾸며져 있고,

지붕과 벽면은 전통 목조 한옥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전북 익산시 망성면 화산리에는 화산(華山)이 있는데, 산이 너무 아름다워 우암 송시열이 붙여 준 이름이다.

이 산의 줄기가 끝나는 지점에 넓은 바위가 있는데 이를 ‘나바위’라고 한다. 오늘날 화산 위에 자리 잡고 있어

화산 성당이라고도 불리는 나바위 성당은 이 너른 바위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완주군 화산면이 있는데

혼돈돼서 나바위성당으로 개명했다고 한다

 1897년 전북 익산시 망성면 화산리(華山里) 나바위[羅岩] 부락에 주임으로 부임한 베르모렐 신부가 나바위에

 있는 동학 농민 운동 때 망해 버린 김여산(金如山)의 집을 1,000냥에 사들여 개조하고 성당으로 사용하였다.

 나바위는 옛날 선착장으로 이용하던 곳이다.

 

 

 

 

 

 

 

1907년 계명학교를 세워 1947년 폐교될 때 까지 일제의 탄압 속에서 애국 계몽 운동을 통한 구국에

앞장섰고 신사 참배에 저항하던 사제와 신자들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한국 전쟁 당시에는 죽음을

무릅쓰고 성당을 지킨 사제 덕분에 단 며칠을 제외하고는 매일 미사가 계속 봉헌된 기록을 갖고 있기도 하다.

성당의 내부로 들어서면 초기 성당의 모습이 고스란하다.

예수의 성심상과 촛대, 감실과 낡은 목조 성수대, 반들거리는 마룻바닥 모두가 처음의 것 그대로다. 공간을

가르는 8개의 목조 기둥은 남녀유별의 관습을 지금도 지키고 있다고 한다. 제대 역시 초대 주임이었던

 베르모렐 신부가 프랑스와 중국에서 몰래 들여와 직접 조립했다는 옛것이다. 오른쪽 소 제대의 감실에는

 김대건 신부의 유해 일부(목뼈)가 봉안되어 있다고 한다. 제대 앞에는 커다란 아치가 천장에 가로놓여 있다.

그 무지개 너머에 두 팔을 둥글린 예수의 성심상이 서있다.

 

 

예수상은 별도의 덮개를 가진 감실에 고상과 함께 모셨는데,

제단주위의 이들 성상은 중국 난징의 라자로수도원에서 제작된 것으로,

처음 성당이 지어졌을 때 들여와 옛모습을 그대로 보존돼 있는 것이라고 한다.

 

 

 

 

성당 내부는 남녀 칠세 부동석이라는 한국 풍속을 따른 듯 남녀 교우가 서로 구별하여 앉을 수 있도록

남녀 입구가 다르고 앉는 곳도 칸막이로 막았는데,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지금도 남녀가 드나드는 문이 따로 있다

 

 

 

 

망금정 아래까지 금강 강물이 넘실거렸지만 1925년 일본인들이 이 일대를 간척하면서

금강 줄기가 바뀌어 지금은 비닐하우스로 뒤덮은 평야로 변했다고 한다.

이 곳에서 보면  강경읍 황산대교도 볼 수 있다.

 

 

 

 

 

 

 

김대건신부 일행은 상해를 떠나 42일 동안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고 제주 차귀도 인근에 표류해 배를 수리한 후

다시 북상해 천신만고 끝에 금강으로 들어와 배를 정박할 곳을 찾았다. 1845년 10월 12일 밤, 수로를 따라 땅을

 크게 휘감아 돈 라파엘호는 화산 언저리에 닻을 내리게 된다. 한국인 최초의 신부가 이 땅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이다.

이곳 용두포에서 둑길을 내려와 들녘을 가로지르면 나바위 성지 입구에 닿게 된다. 김대건 일행이 첫발을 딛은

 축복의 땅임을 말해주듯 발모양의 입석이 서 있다.일설에 의하면 한강인 줄 알고 상륙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예전에는 여기가 포구였으나 일본인들이 매립해 농토를 만들어

지금은 논과 비닐하우스 지대가 됐다

 

 

 

이곳에 한국인 첫 사제 김대건 신부가 첫발을 내디딘 것을 기념하여 나바위 성당이 설립된 후

초대 대구교구장이신 드망즈 주교가 해마다 5, 6월이면 연례 피정을 화산 정상에 있는 나바위에서 가졌다.

개인 피정 장소로 더 할 나위 없이 좋은 장소인 이곳의 아름답고 조용한 분위기에 감탄한 베로모렐 신부는

피정을 하시는 주교님을 위해 1915년 정자를 지어 드렸다. 이 정자를 드망즈 주교는 망금정이라 이름 붙였다.

금강을 바라보며 세분 성직자의 아름다운 영혼을 기억하고 기도하는 장소이다.

 

 

 

화산 정상의 김대건 신부 순교비는 김대건 신부 순교 100주년에 세워졌다.

상해를 떠나 42일간 바닷길로 입국할 때 타고온 라파엘호의 크기를 본떠 세운 것이다.

목선의 길이 15자가 순교비의 높이가 되고 넓이 6척이 순교비의 둘레가 된다.

 

 

망금정 아래절벽에 삼존불이 조각 되어 있다.

성당이 들어서기 전에 마애불이 새겨진 것으로 .

이 곳은 과거 암자로도 사용되던 곳이었다고 한다.

 

 

 

 

 

 

 

 

1991년에는 피정의 집을 건립하였다. 300여 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피정의 집 대건 교육관 외에도 소규모

피정자들을 위한 피정의 집이 따로 있고, 취사를 할 수 있는 설비도 마련되어 있다. 또 피정의 집 앞 운동장은

 2천 평 규모의 대지로서 야영장으로도 활용된다.

 

동양 최대의 사찰 미륵사지

원불교의 산 역사를 느낄수 있는 원불교 익산성지

한국인 최초의 신부이 김대건 성인이 첫발을 내디딘 나바위성당.

한국 기독교 사적지 제 4호로 지정된 두동교회까지 

 유서깊은 4대종교 유적을 품고 있는 익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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