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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광주.제주

숭림사와 두동교회

9/8 남궁찬 선생의 묘 상석을 돌아보고 숭림사로 왔다

 

숭림사 현판은 함라마을 이부자집 아들 하당 이집천선생의 글씨다

뒷면의 우화루는 윤선택이란 분이 썼다고 한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의 말사이다. 신라 경덕왕(재위:742∼765) 때 진표(眞表)가 창건하였다.

 일설에는 1345년(고려 충목왕 1)에 창건했다고도 하며, 절 이름은 달마가 숭산 소림사(少林寺)에서 9년 동안

 벽을 바라보며 좌선한 것을 기리는 뜻에서 지은 것이라고 한다.

 

 1592년(조선 선조 25) 임진왜란 때 보광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이 불에 탔다. 1697년(숙종 23)과 1819년(순조 19), 1892년(고종 29) 각각 전각을 중수하여

 절의 면모를 새롭게 했으며, 일제강점기 때는 황성렬(黃成烈)이 대대적인 불사를 일으키고 1957년
고광만(高光滿)의 시주로 시왕전과 나한전을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Daum백과 숭림사(익산)

 

 

 

 

보물 제825호.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多包系) 맞배지붕 건물이다. 지혜의 빛으로 세상을 비춘다는

 비로자나불을 모신 보광전의 건물 안쪽에는 보 끝에 용머리를 조각해 놓았고, 기둥 윗부분에 설치된 건축

 부재들은 각각 연꽃, 용의 몸, 용 앞발이 여의주를 쥐고 있는 모양으로 장식되어 있다

 

함열현(咸悅縣) 읍지(邑誌), 명문와(銘文瓦)의 기록, 불상의 복장문(腹藏文) 등의 사료를 종합하여 보면

 1345년(충목왕 1)에 창건되었고, 1613년(광해군 5)∼1614년에 중수하였다. 그리고 1628년(인조 6)에는

기와를 새로 얹었으며, 1682년(숙종 8)에 다시 중수하였다.Daum백과 익산 숭림사 보광전

 

 

보광전은 전혀 다른 시각에서 자신이 지닌 또 다른 조형미를 과시했다. 우선 나무를 세밀하게 조립한 태가 압권이다.

들보에는 용의 머리 위로 봉황이 난다. 신화 속의 동물들은 여기가 극락이요 열반임을 웅장한 몸짓으로 천명하고 있다.

 닫집 한편의 용은 내려가고 싶어 미치겠다는 표정으로 눈망울을 희번덕거렸다. 멀리서 보면 무섭지만 가까이서

보면 웃긴다. 그게 허상이란 걸 알기 때문이고 내려올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숭림사 보광전 닫집

닫집은 이른바 집 속의 집이다. ‘닫’은 ‘따로’의 옛말이다. 곧 집 안에 따로 지은 또 하나의 집인 격이다. 덮개라는 뜻도 된다.

인도는 더운 나라다. 부처님이 설법할 때면 햇볕을 가리기 위한 산개(傘蓋)를 설치했다. 이것이 훗날 불교조각으로

수용되면서 닫집이 된 것으로 여겨진다. 무엇보다 부처님을 기리는 집이 법당이다.

 

옛 사람들은 부처님을 위해 천장을 꾸미는 일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닫집을 설치하는 목적은 불국(佛國)의 성스러움을 법당에

 재현하는 것이다. 지광스님은 20년 넘게 절을 지켰다. 숭림사는 불교정화운동 이후 한동안 방치되다시피 했다.

 거의 모든 문화재를 도둑맞았다. 들고 갈 수 없는 보광전(普光殿, 보물 825호)만 몸을 건사했다.

 

17세기 무렵에 지은 건물로 조선 후기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는 성보다. 보광전의 닫집은 놀라웠다. 수평의 미학에만

길들여져 수직도 그만한 성적을 낼 수 있음을 미처 알지 못했다. 지장행자님 글에서

 

 

영원전

숭림사(崇林寺)의 영원전(靈源殿)에 모셔져 있는 지장보살상(地藏菩薩像)과 시왕 및 그 권속들로 모두 25구의

 불상들이다. 조선 인조 12년(1634)에 만들어진 것으로 옥구군 보천사(普天寺)에 있던 것을 숭림사(崇林寺)로

옮겨와 영원전(靈源殿)에 모신 것으로 알려졌다. 나무로 만들어진 지장보살(地藏菩薩)은 전체높이 104㎝, 머리 32㎝,

 어깨폭 53㎝, 무릎폭 71㎝ 정도의 규모로서 얼굴은 원만하고, 머리는 별다른 장식이 없는 민머리 형태이다.

 

 법의는 양쪽 어깨에 모두 걸친 형태로 앞가슴에 가로로 된 옷주름이 표현되었다. 지장보살(地藏菩薩)의 양옆에

 일렬로 배치된 무독귀왕(無毒鬼王)과 도명존자(道明尊者), 시왕 및 권속들은 지장보살좌상(地藏菩薩坐像)과 같은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지장보살좌상(地藏菩薩坐像)과는 달리 흙으로 만들고 베를 붙여 완성한 소조불이다.

지장보살좌상(地藏菩薩坐像)을 비롯한 25구의 불상들은 그 조성연대가 확실하여 조선 불상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정혜원은 종무소로 사용하고 있다

 

 

 

산신각

뜰에는 오래된 은행나무 한그루

 

정묵당

  

 숭림사의 설화!   

1345년 고려 충목왕 때의 일이다. 왕궁에서는 충목왕의 왕비 몸에 난 등창으로 근심이 가득하였다.

백방으로 수소문하여 여러 의원들이 병을 고치려 했으나, 등창은 갈수록 심해지고

왕비의 몸은 점점 야위어갔다

.

그러던 어느 날 왕비는 지난날의 일들을 회상하며 관세음보살을 부르다가 잠이 들어 꿈을 꾸게 되었다.

 꿈속에서 어느 사찰에 자신이 머무는 동안 병이 씻은 듯이 낫게 되었고,

꿈에서 깨어난 왕비는 그 사찰의 모습과 산세를 일러주며 절을 찾게 하였다.

 

마침내 찾게 된 절은 지금의 숭림사였으며, 왕비는 숭림사에서 자신의 몸을 바쳐 관음보살에게

일주일간 기도를 드렸다.

마지막 기도를 드리던 날, 기도 중 향긋한 향기에 취해 잠시 잠에 빠져든 왕비는 꿈속에서

파랑새 한 마리가 날아와서 자신의 몸에 난 등창을 핥아주는 꿈을 꾸었다.

 

그런데 잠에서 깬 왕비는 몸이 날듯이 가벼워졌음을 느끼고 등창을 살펴보니 깨끗이 나은 채

 미묘한 향내음이 풍기는 것이었다.

이에 왕비는 관음보살께 눈물로 기도를 드렸으며, 병이 완치되어 궁궐로 돌아간 왕비는

그 이후 숭림사에 전답을 하사하고

왕실의 원찰로 삼아 관음기도의 도량으로 삼게 되었다.  


 

숭림사를 돌아보고 성당포구로가는 도중에 있는 두동교회에 잠시들려 보기로 한다

지금의 두동마을은 예전에 상주박씨 집성촌이었고, 지형적으로 앞뒤가 막혀 있는 동네라

하여 두동이라 불러졌다고 한다

차를가지고 갔기에 못보고 지나처 빌려온사진임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79호. 1923년 익산시 성당면 두동리에서 박재신에 의해 설립된 두동교회는 1929년 건축된

기역자예배당이 남아 있는 곳이다.

익산시 성당면 두동길 17-1


일제강점기 익산시 성당면은 군산 주재 남장로교 선교사 해리슨(William B.
Harrison)의 활동 지역이었다. 두동마을의 초기 개신교인들은 인근 부곡교회에 출석하였는데, 이들이 삼천석 지기 부자였던 박재신의 어머니
황한라와 부인 한재순 등이었다. 처음에 박재신은 집안 여자들의 교회 출입을 반대했지만 부인 한재순이 임신하게 되자 자기 집 사랑채를 예배당으로
내놓게 되면서 1923년 5월 18일 두동교회가 시작되었다. 또 교회 부설로 배영학교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이후 박재신의 소작인들이 교회에
나오면서 1년 새 교인이 80명으로 증가하였다.
1929년 박재신의 어린 아들이 갑자기 사망하자 박재신이 교회를 떠나고 이에 새로운 예배당이 필요하게
되었다. 교인 가운데 이종규가 채마밭 100여 평을 제공해 안면도의 소나무를 헐값에 사서 기역자로 된 예배당 24평을 건축하게 되는데 바로 이
건물(구 본당)이 현재 남아 있는 예배당이다.

[Daum백과] 두동교회구본당

하얀건물이 두동교회 본래 건물


두동교회구본당은 전형적인 기역자 예배당으로 남자석과 여자석을 분리하여 남녀가 서로 쳐다볼 수
없게끔 설계되어 있다. 남녀유별의 전통과 서양종교의 결합이 바로 이러한 형태의 건물을 만든 것이다.

기역자 예배당은 홑처마에 우진각 형태의 양철지붕을 올렸다. 기역 자로 꺾인 모서리 안쪽 마당에 서 있는

 소나무는 건물을 지을 때 뒷산에서 옮겨다 심은 것인데 가지와 잎이 무성해 예배당을 덮고 있다.

연등천장의 상량문에는 별다른 내용 없이 상량 날짜만 적혀있다.


두동교회는 1960년대까지 이곳에서 예배드리다가 1964년 새로운 예배당을 지었고, 또 1991년에는
교육관도 설립했지만, 1929년에 지어진 기역 자 예배당을 허물지 않고 보존하고 있다. 두동마을 입구에는

1940년 성당면 유지들이 세운 박재신기념비가 서있다.Daum백과 두동교회구본당

 

 


''형 모서리 강단에서 바라봤을 때 오른쪽은 남자들이 왼쪽은 여자들이 앉아 예배를 드렸고,
양측 분리대 기둥에서 강단까지 1미터 공간에 휘장이 쳐져 있었다고 합니다
.

남녀유별적인 유교 전통이 막 무너져 가는 1920년대에 오히려 자형 예배당을 통해 남녀유별의

 전통을 보여 주면서 녀 모두에게 복음을 전파하려고 했던 독창성을 엿볼 수 있다

내부 바닥은 장마루가 깔려있으며, 강단은 회중석(會衆席)과 38cm의 단차를 두고 있다. 강단의 전면 모서리를 사선으로

 처리하고 그 중앙에 강대상을 놓았다. 강대상 전면에는 내진 기둥 하나가 세워져있는데, 다른 기둥은 모두 방주(方柱)를

사용한 것과 달리 이 기둥만 8각주(角柱)로 되어있다. 이 기둥은 구조적으로 회첨부를 받치는 기능을 하면서, 8각주와

 모서리 기둥 사이에 휘장을 둘러 예배시에는 남녀가 서로 볼 수 없도록 하는 역할도 하였다. 

 

구조는 5량 구조이고 남자석 종도리 밑의 상량문에는 1929년 5월 14일에 상량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외벽은 중방을 지르고 칸마다 미서기 유리창을 달아 채광을 얻음으로써 내부는 밝은 편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에

 창틀 목재가 뒤틀린 부분도 있어 창문이 잘 열리지 않는 곳도 있다. 물론 지금은 새로 지은 본당을 사용함으로

 창문으로 인한 불편함은 없다. 지붕은 홑처마 우진각의 형태이며 지붕재료는 처음부터 지금과 같이

골함석을 사용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예배를 보던 때라 갑자기 일본 경찰이 오는 것이 보이면 빨리 비밀 장소로 피하였다고 합니다.

그 당시 개신교 신자들의 절박한 믿음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습니다.

두동교회는 예배드리고 복음을 전파하는 장소와 어린아이들에게 나라사랑하는 일을 교육하였다고 합니다.

어린이들에게 애국심을 심어 주자며 노래를 가르쳤고 그때 배우고 불렀던 노래 내용은 이렇습니다

 

 

피도 조선 뼈도 조선 이 피 저 피는 살아 조선 죽어 조선 내 것이로다 
 에야 데야 우리는 조선의 아들 두 팔 걷고 내 달릴 조선의 아들 

두동교회에는 아직도 종탑이 보존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종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탑 아래서 긴 줄을 당기면 ~ ~ ~’ 하고 맑은 고음이 봄날 아지랑이를 타고 마을로 퍼져나갔다 한다.

그 종소리는 누구나 들을 수 있습니다.무인카페에서 차 한 잔을 하며 잠시 휴식을 취할 수도 있다

출처: 전북제발견에서

문화재자료 제179호

위치 : 전북 익산시 성당면 두동리 385-1

규모 : 1층 한식 목조건물. 부지 1,993

 

익산시 성당면 두동리에 오래된 한옥 교회가 있다. 성당면에 해리슨 선교사와 김정복이 복음을 전하면서 부인들이

 먼저 믿기 시작하였는데, 그 수가 점차 늘어나자 부곡리 교회로서는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그리하여 박재신은 두동리 436번지의 자기 집 사랑채를 빌려주어 예배를 보도록 하였다. 신자가 계속하여 늘어나자

전북노회에서도 교회분립을 결정하였고, 이종규성도가 헌납한 100여 평의 부지에 드디어 1923년 두동교회를 설립하였다.


교회를 세울 당시 목재를 구하는 중에 안면도에서 나무를 실은 배가 풍랑을 만나 파선되면서, 그 나무들이 때맞춰

성당포구까지 떠밀려 왔다고 한다. 그래서 이 나무들을 손쉽게 사들여 교회를 지으니 1929년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었다.

설립초기에는 박재신씨와 부인 김씨, 월남 이상재선생의 자부이며 박재신씨의 고모인 박씨, 임현숙씨 등이 구연직 전도사를

모시고 박재신씨 집에서 예배를 보기 시작하였다. 구연직 전도사는 훗날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장을 역임하였다.

 여성신도들이 많아서 여성에 대한 전도가 쉬웠었는지, 신현숙, 신영애, 박재신씨의 숙모인 김정숙, 황희만 장로의

딸인 황정옥, 황윤애 등이 기록에 남아있다.

잠시 내부를 들여다 보려 했으나 문이 잠겨있다

두동교회는 바로 옆에다가 1964년 5월 벽돌조로 72평의 새로운 교회와 1991년 4월 13일 교육관 40평,

 2005년 11월27일 150여 평의 선교교육관을 지었으며, 구 두동교회는 군산노회 소속으로 관리되고 있다.

2007년 5월 4일에는 예전의 종탑도 복원하였다. 두동교회에서 1982년 11월 26일 성광교회가 분리되어

나가기도 하였다.



 금강의 생태를 배울 수 있는 기획, 익산 성당포구마을

익산 성당포구마을은 서쪽으로 금강이 위치하며 고려에서 조선 후기까지 세곡을
관장하던 성당창이 있던 곳으로 성당포(聖堂浦) 혹은 성포(聖浦)라 불리던 곳이다. 전통적인 포구마을의 역사를

 그대로 담아낸 벽화와 황포돛배, 금강의 생태를 배우며 여유를 느낄 수 있다. 성당포구마을에서는 포구역사,

금강변 기행코스, 황포돛배타기, 포구 사진찍기, 포구 그림그리기 등을 통해 어부들의 삶의 시련과 애환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포구에서의 삶을 느낄 수 있는 포구기행 프로그램과 금강 생태탐방학습, 고란초자생지
관찰, 수리부엉이, 철새 관찰 등을 할 수 있는 금강 생태탐방 프로그램이 있다. 특히 익산시 성당포구 마을에는

 희귀보호식물인 고란초의 서식지가 위치하고 있어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다.Daum백과 익산 성당포구마을

 

작년에 군산에서 이곳 웅포 곰개나루까지는 답사를 했기에 이번에는 성당포구와

나바위 성당을 돌아볼 것이다

 

금강체험관

사진은 성당포구금강체험관으로 연립형 숙박시설인 금강체험관과 단독형 펜션이 갖춰져 있고, 이 외에도 데크형 캠핑장,

 풋살장, 수영장, 자전거(대여), 야외 바비큐장이 있어 가족여행이나 단체모임에 최적화된 시설을 갖추고 있습니다.

 지난 한해 2만여명이 성당포구마을을 다녀 갔으며, 금강체험관은 가족단위 여행객과 자전거길 순례객,

단체 체험객이 한 달 평균 700명이 이곳에서 묵었다.

특히, 작년 5월에는 950명, 휴가철에는 1천여명이 체험과 숙박을 하고, 기업체에서는 휴양 및 각종 업무보고

등 많은 사람들이이곳에서 여가를 즐긴 것으로 조사돼 사실상 금강의 새 관광 명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렇듯,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는 금강체험관은 지상 3층 연면적 980㎡(약 296평) 규모의 다목적 휴양시설로 식당과 세미나실,

 객실, 체험실, 바비큐장, 휴게실 등 편의시설을 고루 갖추고 있어서이다.

 객실은 총 7개로 최대 15명 이상이 숙박 가능한 큰 방 2개와 6명 이상 숙박할 수 있는 작은방 5개가 있다. 체험관 주변에는

 전북기념물 제109호인 은행나무와 600년 넘은 당산나무가 포구의 옛 영화를 말해주고 생태공원과 체육공원, 황룡산 산책로와

약수터, 금강자전거 순례길인 소달구지길, 문화예술 공연장, 야외캠핑장(12면)이 조성돼 자전거 여행과 산책, 여가활동을

동시에 즐길 수 있다.

바로 옆 금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산북천 저건너 산들은 충청도이다

금강과 신북천이 만나는지점

성당포구 바람개비길은 자전거길로 알려져 많은 분들이 찾는 유명한 둘레길입니다.
자전거길을 따라 느릿 느릿 거닐다 보면 다양한 풍경에 저절로 힐링이 됩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뱅글뱅글 돌아가는 형형색색 바람개비길이 5km가 넘게 이어져 있어 장관을 연출합니다.

조선시대 행정과 상업 문화의 중심지로서 대동청이 자리했던 익산 성당면 성당포구마을. 하지만 지난 1960년대말

포구가 기능을 상실해 해상 교역이 끊기고 산업화과정에서 이농현상으로 폐촌이 되다시피했던 성당포구마을이

 역사와 문화, 자연생태 자원을 통해 전통테마체험 마을로 새롭게 진화하고 있다.

성당포구마을이 도시민들의 역사문화생태체험지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은 마을주민들의 자활의지에서 비롯됐다.

 불과 30~40여년까지 만해도 생선과 젓갈 소금배 들이 드나들면서 번성했던 마을이 쇠락의 길을 면치 못하면서

 마을의 존립마저 흔들리자 주민들 스스로 마을살리기에 나선 것.

마을 뒤편 황룡산에 금강을 병풍처럼 끼고 도는 500여m 구간의 절벽 틈새에 자생하는 수만여 포기의 고란초 군락지를

 활용한 고란초축제를 매년 9월 개최해오고 있다. 고란초는 다년생 상록 양치식물로 고사리와 모양이 비슷하며

인접한 충남 부여 고란사에서 처음 발견돼 고란초라 이름이 붙여졌다. 서식지와 개체수가 줄어 환경부와 산림청에서

희귀 식물(제99호)과 보호 야생식물로 지정했다. 고란초 군락지는 현재 조성중인 금강변 산책로와 6만~30만㎡에

 달하는 대규모 습지 등과 연계해 자연생태체험 명소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해당화도 꽃이지고 열매를 맺고있다

 여기에 백제 성왕의 셋째아들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최대 권족인 오우치 가문의 시조가 된 임성태자가

익산 성당포구를 통해 해상교역과 교류를 했다는 최근 언론보도를 주목, 이를 역사자원화하는 방안도 연구중이며

여러가지방안을 강구해 마을을 살리려고 노력하고 있다 한다

 

번성하였던 포구도 세월따라 변천해 지금은 유람선 한척이 정박하고 있을 뿐이다

  

날씨도 덥고 잠시 휴식하며 셀카놀이도 하고

 

 

 

금강체험관에서 자전거를 대여해 자전거로 달려도 좋고 천천히 산책하기에도 적합한 들레길이다

이다리를 넘으면 용안면이다

산북천은 익산의 주산인 용화산과 미륵산에서 발원하는 산북천은  굽이굽이 돌고돌아

이곳 성당포구에서 금강과 만난다

 

 

 

 

용안 습지공원 연꽃단지

 용안습지공원 야영장

성당포구와 용안 생태습지공원 그리고 산북천의 바람개비 길을 걷다가 망성면 나바위성당으로

이동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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