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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광주.제주

익산 함라 삼부자 고택과 향교

함열리(함라마을)

함라산의 산세는 장삼을 입고 염주를 두른 스님이 두 팔을 펼쳐 마을을 감싸고 있는 형국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해발 240.5m의 함라산 정상에서 양쪽으로 수려하게 뻗어나간 산자락은 온화한 느낌의 선을 그리는 장삼자락과

 닮아 있고, 특히 산 중턱에 5백 미터 가량 줄지어 늘어서 있는 바위들은 스님이 목에 걸고 있는 염주와 같다고

 하여 염주바위라고 불린다.

 
함라 삼부자집의 터가 명당인 이유도 이와 관련이 있다. 세 가옥의 위치가 함라산의 스님이 시주를 받는 주발에

 해당하는 곳이어서 큰 부를 이룰 명당이라는 것이다.
그 때문인지 독특하게도 세 가옥이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지 않고 한곳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서광덕님 글에서 

마을마다 향교가 있는 마을을 교동이라 불렀다

 

 

 

 

전북 익산시 함라면 함열리 314번지 일원은 1500m 길이의 옛 담장이 있는 곳이다.

이곳의 담장은 토담, 돌담, 전돌을 이용한 화초담 등 혼합적인데, 이 담을 조성한 것은 마을이 생겨나면서

 부터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함라마을 옛 담장은 현재 등록문화재 제263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함라마을의 담장이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전국의 옛 담장들 중

많은 수가 등록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다. 거창 황산마을, 강진의 병영마을, 고성 학동마을,

담양 창평 심지천마을, 대구 옻골마을, 무주 지전마을, 부여 반교마을, 비금도 내촌마을,

산청 남사마을과 단계마을, 성주 한개마을, 영암 죽정마을, 의령 오운마을, 정읍 삼학마을과

익산 함라마을의 옛 담장 등이다

밖에서 바라본 조해영가옥

조해영 가옥의 고방채,왼쪽 골목 안에 솟을대문이 있는데 굳게 닫혀있습니다.

 

 조해영 가옥 안내문과 배치도,

왼쪽에 살짝보이는문패에는 "조효·이연순"으로 쓰여있습니다.

조효님은 아마 교수로 계시나봅니다

조해영 가옥은 돌담길의 초입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집으로, 풍수가의 말에 따라 대문을 서쪽으로 냈으며,

12대문집이라고 불릴 정도로 규모가 커서 90칸의 방에 50여 명이 살았다고 한다. 현재는 옛 영화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곳곳이 헐리고 사라져 본채와 농장채, 솟을대문 등만이 남아 있다. 이는 한국전쟁당시 대식구의

피난생활에 일부를 헐값에 팔았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조해영 씨의 가문이 부를 축적하게 된 것은 그의 고조부인 조한기 때부터였다. 조한기는 1838년(헌종 3년) 함열에서

 출생해 사천군수, 정읍군수를 지냈는데 이때 기반을 다져 이미 3만석지기의 부자가 됐다. 정읍군수를 지낼 당시에는

사재를 털어 관헌을 짓고 백성들을 굶주림에서 구하는 일에 앞장서 칭송받기도 했다. 태인 피향정에 ,

기근에 사재 5백석을 들여 군민을 도왔다는 조한기의 송덕비가 남아 있다.

지금도 함열리 주민들은 조해영 가옥을 정읍집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정읍에서 와서 집을 지어서 그렇게 불렀다고 얘기한다.
조해영 가옥은 궁궐을 짓던 대목장을 불러다 지었으며 상량문에 1918년이라고 적혀 있어 이배원 가옥(1917) 보다

 1년 늦게 지어진 것이라고 알려졌으나 조해영의 동생 조교영씨에 따르면 그 훨씬 전부터 집을 짓기 시작해 몇 대에 걸쳐

 지어졌다고 하므로 이배원 가옥보다 앞선 것으로 보인다

나도 샤프란

조해영 가옥에 서있는 "김육 불망비 (金堉 不忘碑)"

 

2002년 12월 14일 익산시 향토유적 제11호로 지정되었다. 나라에서 선정을 베푼 벼슬아치에게 내린

일종의 선정비로, 영의정 김육이 사망한 이듬해인 1659년(효종 10)에 건립되었다.
김육(金堉, 1580∼1658)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실학적 개혁 정치가이다. 1605년(선조 38) 사마시에

 합격하여 관직에 입문하였다. 광해군 때 조정에서 쫓겨나 10년 동안 은거하다가 1623년 인조 즉위 후

 복귀하여 의금부도사에 제수되었다. 이후 충청도관찰사와 한성부우윤·도승지·병조참의·대사헌·예조판서·

개성부유수 등을 거쳐 1651년(효종 2)에 영의정에 이르렀다. 상평통보의 유통과 대동법 확산에 힘을

기울였고, 후대의 실학자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출처; 두산백과>

 

 

 

안채 1동과 별채 1동, 문간채가 남아 있는데 원래 안채를 비롯하여 여러 채가 배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안채는 건물에 기록된 글로 미루어 1918년에 지은 것으로 보이며 별채는 안채보다 조금 늦은 1922년경에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안채와 별채는 둘 다 남북으로 길게 평행을 이루어 자리잡고 있다. 안채는 남쪽을

향하고 있고 별채는 서쪽을 향하고 있다. 안채와 별채에 둘러 쌓인 지역을 빼고는 담도 없이 거의 텃밭을

 경작하고 있다. 별채 동편 울 밖에 김육(1580∼1658)의 선정비가 서 있고 울 안에 2개의 비가 가로 놓여 있는

 것을 볼 때, 집 가까이에 비석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출처; 문화재청> 

안채 뒤뜰에는 개한마리가 몹시 짖어댄다

장독대

조해영 가옥의 안채는 남쪽을 향하고, 별채는 서쪽을 정면으로 하고 있다.

함라마을 담장은 몇 집의 문화재로 지정된 집들의 담으로 연결된다.

그 중 조해영 가옥은 현재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21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조해영 가옥은 너른 마당 등으로 보아 안채와 별채 외에도 여러 채의 집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안채와 별채, 그리고 변형된 형태로 남아있는 문간채가 있다.

대문간은 굳게 닫혀있고 뒤에 길을 새로 냈나보다

보수는 조금 했는데 관리를 제대로 안해서 잡초만 무성하다

조해영 가옥 안채, <사진; 두산백과>

 

1986년 9월 8일 전라북도문화재자료 제121호로 지정되었다. 

안채는 상량문에 '대정(大正) 7년'이라 명기되어 있어 1918년에 건축된 것을 알 수 있으며,

별채는 안채보다 조금 늦은 1922년 또는 그보다 조금 이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 두산백과>

예전에 장독대도 같고 집터도 같고 아리송

별채,

별채는 안채보다 조금 늦은 1922년경에 지은 것으로 추정하는데

일제강점기의 시대상을 반영하여 일본풍을 많이 따른 것으로 보입니다.

 

뒤에서 바라본 안채

넓은 뜰에는 나무와 숲이 어지럽게 방치돼있다

건물하나를 철거한 흔적이 보인다

 

 

 

내외벽인 사랑채와 안채를 구분하는 십장생벽돌꽃담

학, 사슴, 거북, 대나무, 소나무, 해와 구름, 영지, 포도, 연꽃 등을 그린 문양이 소박하면서도 아름답습니다.

경복궁 대조전 뒤뜰의 굴뚝꽃담을 본뜬 것이이라고 합니다.
 

 

 

 

문화재인 김안균, 조해영, 이배원 3부자집 함라 가옥은 1910년대에서 1920년대 한옥과 일본식, 근대 건축문화가

조화되어 건축된 근대 건축 문화재의 으뜸으로 꼽히고 있다. 이 3부자는 전국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부자들로

당시 함라뿐만 아니라 임피를 거쳐 군산지역까지 이들이 소유한 땅을 밟지 않고는 익산을 빠져나갈 수 없다는

 말이 오갈 정도의 전국에서 명성이 높은 부잣집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지난 2005년 익산시가 이 3부자 가옥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인부들이 당시 이 집에서 보유하고 있던

 토지조사부(토지대장), 소작료 납입통지서, 소작료수납부, 소작료 지급부 등과 같은 역사적 기록 및 소장 가치가

 있는 문화재 자료들을 춥다는 이유로 인부들이 불태워버렸다는 것이다. 당시 보수공사 현장을 돌아보던 한 연구가에

 의해 타지 않은 자료들이 수거돼 현재 보관 중

 

조해영가옥의 행랑채

익산 함라마을 옛 담장은 주택의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데도 담장이 높은 점이 특징이다.

또한 마을의 담장을 보면 거푸집을 담장의 양편에 대고, 황토와 짚을 혼합하여 축조한 것들도 보인다.

 이 함라마을의 담장을 돌아보다가 들린 조해영 가옥. 그 집 안에는 정말로 아름다운 꽃 담장이 자리하고 있다

 

김안균가옥의 행랑채

김씨 가문이 부자가 된 내력은 신비한 전설과 함께 한다. 
김안균의 선조는 가난한 선비였는데 마차를 끌며 생계를 유지하던 어느 날 황등에 갔다가 말을 끌고 돌아오는

 길에 쓰러져 있던 스님을 발견한다. 스님을 마차에 태우고 집으로 데려와 극진히 보살피자 스님이 깨어나

 그에게 자기가 쓰러진 자리에 묘를 쓰면 부자가 될 거라고 해 그렇게 했더니 가세가 회복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후 후손이 벼슬을 하게 되고 기반을 잡자 부를 축적하기 시작했고, 김안균의 부친인 김병순에 이르러 만석꾼이 된다.

 김병순은 1926년 함열현 와리에 함화농장을 설립했는데 익산, 김제, 옥구 등에 많은 소작지를 두었고 천명이 넘는

 소작인을 두었다. 김해균도 사업 운영에 힘을 쏟아 부를 확대해 나갔다.

김안균 가옥은 현재 99칸으로 지어진 전라북도에 남아 있는 가장 큰 고택이며 비교적 잘 보존돼 있다. 상량문에

 따르면 안채와 사랑채는 1922년,행랑채는 1930년에 지어졌으며 경복궁을 짓던 목수를 불러다 지었다고 한다.

안채와 구분하는 담장이있고...

 안채

 

김안균 가옥은 대지 2318평에 건평이 188평이나 될 만큼 규모가 커서 토석담과 붉은 벽돌담 길이만 무려 340m에 이른다.

조선 말기의 양반 가옥 형식을 기본으로 삼으면서 거실과 침실을 구별하고 사랑채와 안채 앞뒤로 복도를

둘러 유리문을 달았다. 일본식과 서양식 건축기법을 병용한 것이다. 사랑채 옆에는 세면대가 딸린 화장실을 행랑채

 끝에는 목욕탕을 배치했고, 대청은 누마루 형식으로 세밀하게 살을 짠 '아(亞)' 자 모양의 난간을 둘렀으며,

 주춧돌은 정교하게 잘라낸 희고 매끄러운 화강암을 사용한 것도 특징이다.

 

백두산 소나무를 가져다가 나라에서 손꼽히는 도목수가 지었다. 안채·사랑채·행랑채로 구성되어 있는

이 집은 백두산에서 직접 소나무를 가져다가 나라에서 손꼽히는 도목수가 지었다고 전한다. 상량문의 기록으로

 보아 안채와 사랑채는 1922년, 행랑채는 1930년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김안균 가옥은 전북지역의

보존 가옥중 규모도 크고 보존 상태가 양호한 상태지만 한동안 빈집으로 방치되어 골동품을 수집하는 사람들의

 손을 타기도 했다. 지금은 대문이 굳게 닫혀 집 구경이 어려워 아쉽다.

위에 2장 아래 18장의 사진은 빌려온사진이다

 근래 보수를 한 모습

행랑채

안채정면

일제강점기 전통적인 상류가옥의 변모를 보여주며 조선 말기 양반가옥 형식을 기본으로 구조와

의장에 일본식 수법이 가미되었다.
서양식을 본떠 거실과 침실을 구별하였고, 사랑채와 안채 앞뒤로 복도를 두르고 유리문을 달아 채광을 조절하였다.

 사랑채 옆에는 세면대가 딸린 화장실을, 행랑채 끝에는 목욕탕을 배치하였다. 대청은 누마루 형식으로

 정교한 아자(亞字) 난간을 둘렀으며, 주춧돌은 정교하게 잘라낸 희고 매끄러운 화강암을 사용하였다.
행랑채 끝에 정문(旌門)이 있고, 곳간은 정면에 기둥을 세워 지붕을 연결한 포치 형식으로 바닥에 시멘트를 발라서

통로로 이용하였다. 뒤쪽 집들을 사들여 점차 넓힌 탓에 넓은 대지에 비해 건물이 앞쪽으로 몰려 있다

. <출처; 두산백과>

 

사랑채로가는문

이것을 보면 청나라영향을 받은것이 아닌가싶다

이유는 대원군의 별장 석파정에도 이것과 비슷한 것이 있는데, 청나라풍이라고 들었기때문이다

사랑채

누마루인 청풍루(淸風樓)는 사방에 분합문이 설치되어 있다. 분합문은 들쇠를 달아 모두 개방할 수 있어서

 여기에 앉아 정원의 풍광을 감상할 수 있는데, 정원은 일본식 조원(造園)수법이 가미되어 있다.

 사랑채와 안채는 날개부를 서로 마주하고 나란히 배치하였는데 사이에 벽돌담을 쌓아 공간을 분리하였다.

 그러나 내부는 복도를 통하여 서로 연결되게 함으로써 전통적인 상류주택의 공간구획을 기본으로 하며

실생활의 편리함을 취하였다. 이와 같은 주거의 근대성은 평면과 구조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끝에는 정자풍의 방이다

사랑채와 행랑채를 구분하는문

행랑채. 저 앞의 문은 닫혀있어 용도를 알수 없었다

 

정려문인지 열녀문인지는 들어갈 수가 없어서 비문을 볼 수 가 없다

밖에서 바라본 조해영가옥

자율적인 마을 지킴이 '함라노소(咸羅老所)'

함라마을의 돌담으로 이어지는 고샅길을 사드락 사드락 걷다 보면 '함라노소(咸羅老所)' 를 만나게 된다.

 300여 년 전인 1682년 7월, 수동마을 노인들이 만들어서 자율적 규율을 바탕으로 마을 대소사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지금껏 이어져 내려온 노소이다. 쉽게 말하자면 향약(鄕約)이나 동약(洞約)과 비슷한 성격을

 지녔다고 이해하면 된다.

 

고샅길을 사드락 사드락 걷는다. 함라노소에는 매년 정월 15일이 되면 읍강법을 시행했다고 전해진다.

읍강법이란 노소의 승인을 얻은 군수가 상하분별 못하고, 불효하고, 게으른 자를 체포해 벌을 준 것을 말한다.

이날이 다가오면 뒤가 구린 사람들은 자신의 신상이 위급해질 것이 두려워 미리 행방을 감추기도 했다고 하니

불량배를 경계하려는 의도가 잘 반영된 셈이다.

함라노소 앞마당에는 '함라노소 3백주년 기념비' 가 세워져 있고 왼편에는 경로당 같은 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

건물이 현대식으로 지어진데 반해 오른편의 연못가 정원은 고풍스런 분위기를 자아낸다. 화단에는 세월이

묻어 나는 배롱나무 한그루와 언제부터 서있었는지 모를 문·무관석이 자리잡고있다

 

노소정원

 

 

이씨 가문의 부는 가장 최근의 일로 기억되고 있었다.
임피에 살던 이배원의 부친 이석순은 형편이 어려워 처가살이를 위해 웅포로 가던 중 함라 객주에서

하룻밤 머물게 됐다. 그곳에서 신세타령을 하게 됐는데 사람들이 처가살이하러 가지 말고 차라리

누룩장사를 해보라는 권유를 받고 그날로 고산이나 완주에서 누룩을 가져다 팔아 돈을 벌었다.

그 뒤 현재 가옥 옆에 초가를 지어 함라에 눌러앉게 된 이석순은 웅포에 배2척을 마련해 곡식장사에

나섰고 돈을 크게 벌었다. 

전하는 이야기로 배가 겨우 가라앉지 않을 정도로만 엽전을 싣고 왔으며, 엽전이 너무 무거워 배가 가라앉았다는

 이야기, 몰락한 이배원 가옥의 창고에 엽전으로 가득 찬 항아리가 나왔고 창고 바닥을 긁으면 지금도 엽전이

 나온다는 설도 있다.
이배원은 아버지의 부를 물려받아 함열면 와리에 삼성농장을 설립·운영했고 축산업과 농업 등도 관여하며

 부를 확대했다. 
이들 삼부자의 부가 얼마만큼 인지 한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한다면 쉽게 감이 잡힐 것이다. 

이배원 씨의 장자이며 당대 유명한 서예가였던 이집천 씨가 지은 별장이 함라마을에 있는데 사람들은 이를 따로

 구별해 이집천 가옥이라고 부르고 삼부자집과 합해 사부자집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대규모 별장과도 같은 이집천 가옥은 서벽정이라는 사랑채와 육모정, 사모정 등 세 개의 건물로 이뤄져 있고

 정원 조경이 특히 아름답게 꾸며져 일본인들이 그림엽서로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이 가옥을 짓는데 당시 돈 2백여만 원이 들었으며 4년간의 공사와 연간 유지비만 1백만 원이었는데 2백만 원을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자그마치 약 2천억 원에 달한다. 그야말로 엄청난 부가 아니면 꿈도 못 꿀 규모가 아닌가.  

원불교 교당이 된 이배원 가옥

수동마을 바로 곁 천남 마을엔 이배원 가옥이 있다. 임피가 고향인 이배원의 부친은 함열에서 누룩장사로 기반을 닦았다.

사업수완이 좋았던 그는 배를 사서 군산과 웅포를 오가면서 장사를 해서 했는데 배에 싣고 온 엽전이 너무 많아 배가

가라앉을 만큼 많은 돈을 벌었다고 한다.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은 이배원은 함열면 와리에 삼성농장을 설립하여

 부를 확장했다.

 

배가 가라앉을 만큼 많은 돈을 벌었다. 함라마을 세 부잣집 중 가장 먼저인 1917년에 지어진 이배원 가옥도 건립

당시에는 안채, 사랑채, 행랑채, 문간채, 곳간채 등 여러 채가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지금은 원형을 잃은 개조되었고

사랑채는 원불교 교당으로 이용되고 있다. 옛 모습을 유지하는 것은 함라마을 특유의 토석담장이 유일하다.

 

이배원의 큰아들인 이집천은 1920년대에 함열향교 옆 함라산 자락에 경사진 산세를 이용하여 서벽정(棲碧亭) 등

 3동의 별장을 지었는데 공간 배치가 뛰어나고 경치가 빼어나 전국적인 승경지로 손꼽혔다. 별장 사진을 담은

엽서가 제작되기도 하고 이리(익산의 옛 이름)에서 서벽정까지 소풍을 왔을 정도였다니 가히 그 규모가 얼마였을지

 짐작되고 남음이 있다. 지금은 화려했던 별장의 흔적은 자취를 감추었고, 별장 문으로 쓰이던 돌기둥 4개와

 옛 영화를 그리워하며 이집천의 손자가 세웠다는 비석만 호젓이 남았다.

좌 안채 우 사랑채

이 집은 현재 주인인 이서영의 조부인 이배원이 1917년에 초창(初創) 하였는데, 건축 당시에는 안채, 사랑채,

 행랑채, 문간채, 곳간채 등 여러 채가 있었으나 현재는 안채와 사랑채, 담장과 대문 일부만이 남아 있다.

 안채와 사랑채는 사이에 내담을 두고 복도를 설치하여 통행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1959년 사랑채를

원불교 교당으로 사용하면서 분리되었고, 현재 대문 좌측에는 창고가 있는데, 이는 증조부가 살던

 초가가 위치하고 있었다고 한다..

사랑채는 현재 원불교 교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한편, 함라 3부자 가옥은 1900년대 초 급격히 부를 형성하면서 1917년 이배원, 1918년 조해영,

 1922년 김안균 순으로 연달아 지어진 화려한 가옥이다. 부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가옥에는 당시

최신식 건축자재들과 양식이 절충되어 전통방식과 일본식, 근대식이 복합된 독특한 분위기의 한옥으로,

 안채와 사랑채가 복도로 이어진 전국에서 유일한 문화재 가옥이다.

곰개가서 소금가마니 져오세

삼부자가 한 마을에 가까이 사는 것도 신기한 일인데 이들이 서로 경쟁적으로 곳간을 풀어 인심을 행한 일은

 지금까지 회자되는 이야기다. 이들의 이런 선행은 토지개혁과 한국전쟁으로 인한 몰락 과정에서도 별 탈 없이

 지낼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조상호 씨는 “예전 농한기에 할 일 없는 소작인들이 삼부자집 담장에 줄지어 서 있으면 누가 와서 ‘이보게 할 일

 없으면 곰개 가서 소금이나 져오세’ 했다는 겁니다. 그 말은 부잣집에 가서 빗자루라도 들고 왔다 갔다 하면 밥은

 줬거든. 그게 미안해서 조금이라도 보은코자 재 너머 곰개에 가서 소금 한가마 지어다 주고 밥을 얻어먹자는 말입니다”

 고 말했다.  

이들의 선행은 곧잘 동아일보를 비롯한 신문에도 여러 차례 보도가 될 정도로 전국적으로 유명했다.

 옛 과거 보러 가던 선비들이 삼례에서 논산으로 가지 않고 꼭 함라에 들려 쉬어 갔다는 얘기도 있는데 함라 고을의

 인심이야말로 대대로 내려오는 소중한 유산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건설하고 있는 한옥 체험마을

 

 

이원배의 아들 이집천의 서벽정이란 별장터는 현재 한옥체험마을로 대변신 공사가 한창이다

 

 

함열 향교'

주소 : 전라북도 익산시 함라면 함라교동길 27-4 (함라면)

  • 함열향교는 1437년(세종 19)에 창건되었으며. 1491년(성종 22) 명륜당이 건립되었고, 1591년(선조 24) 금곡(金谷)으로
  •  이건하였다가 1592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 영조 때 중건되었다가 1831년(순조 31)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현존 건물로는 대성전·영소전(靈昭殿)·명륜당·동재(東齋)·서재(西齋)·난심재(蘭心齋)·교직사 등이 있다.
    대성전에는 5성(五聖), 송조4현(宋朝四賢), 우리 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 1명이 정원 30명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奉行)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  

     

    승당문인 외삼문

    승당이란 학문의 경지로서 당(堂)에 오를 수 있는 경지를 나타내는 말로 학문이 점점 깊어짐을 비유하는 말임

     

    명륜당을 중앙에 두고 서재와 왼쪽 동재가 측면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가운데에 명륜당이 있고 동쪽과 서쪽에 동재와 서재가 있습니다.

    동재가 서재보다 규모가 큰 것은 이곳에 양반의 자제들이 기거했기 때문이라고 함

    대성전은 공자를 제사지네는 사당이며 영소전은 공자의 영정을 모신 곳이다

    인조 4 사신으로 중국에 갔던 남궁경이 귀국하면서 공자 영정을 가져와 보관하고 있다는 것을

    1717년(숙종 43) 도제조 김창집이 함열 유림으로부터 전해 듣고 숙종에게 공자 영정의

    사우(祠宇)를 세워 봉안할 것을 상소하여함열향교 경내에 영소전이 세워졌다고 함.

    이곳에 모셨다는 공자의 영정은 현재 행방을 찾을 길이 없다고 한다

    관아터는 흔적만 있어서 그냥통과 하고 숭림사로 출발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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