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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광주.제주

능가산 내소사



관음봉

곰소만을 바라보고 내소사 뒷편에 우뚝 솟아 있는 관음봉(424m)은 변산면, 진서면, 상서면 등 3면 경계에

세봉과 함께 솟아 있는 바위산이다. 서쪽은 망포대, 신선암 줄기가, 동쪽은 옥녀봉 줄기가 역시

 곰소만 쪽으로 뻗어내려 곰소만을 북쪽으로 함께 에워싸고 있는 모습이다. 그 남쪽 기슭에 품고

있는 고찰 내소사에서 바라보면 동서북에서 에워싸 아늑하고 포근한 맛을 준다.

관음봉은 동쪽의 세봉과 함께 능가산, 봉래산이라고도 부르며 지금도 내소사 일주문에는 '능가산내소사'란

현판이 걸려있다. 이 산은 바위를 깍아 세운 듯 내소사를 병풍처럼 둘러서있는 형상으로 바위봉과

울창한 수림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 곳이다. 내변산의 최고봉인 의사봉을 비롯 쌍선봉과 천홀산

(또는 천총산) 그리고 북으로 흘러내리는 직소천과 백천내, 해창천이 굽이굽이 흐르는 계곡과

남으로는 곰소만이 작은 강이나 호수처럼 아름답게 보인다.

일주문

블로그나 카페에서 보면 석가산이라 많이들 써놓았는데 어느 문헌을봐도

석가산이라고 표기한 곳이 없는데 착각이 아닐까?능가산이 옳다






전나무에서 퍼저나오는 은은한 송진 향기가 퍼저나온다 언젠가 옆지기와 왔을때 송진냄새

기분이 상쾌해진 적이 있었는데 그뒤로는 여러번 왔어도 그냄새를 못느꼈는데 비로소 오늘

다시 송진향을 맡을 수가 있다 아마 아침과 석양에만 발산하는게 아닐까?







전나무 숲이 끝나고 여기서 부터는 단풍나무 숲으로 이어진다


가는 곳마다 단풍이 붉게 물들어 기분을 상쾌하게 만들어준다

금년에는 원 없이 가을을 느끼고 살고 있다


천왕문

천년 됐다는 느티나무와 내소사 전경도 담으며 경내로 진입을한다




내소사 경내 서편에는 보종각(寶鍾閣)이 있다. 이 보종각에는 보물 제227호인 <내소사 고려동종(來蘇寺 高麗銅鐘)>이

보존되어 있어 보배로운 종을 보존하고 있는 종각이란 뜻의 건물이다. 그러나 이 종은 원래 내소사의 종이

 아니고 청림사(靑林寺)의 종이었다.

  이 고려 동종은 그 주조형식이나 뛰어난 솜씨와 아름다움에 있어서 고려시대의 동종을 대표하는 가장 훌륭한 종으로 여긴다.

 주조된 연대는 고려 고종(高宗) 9년인 1222년으로 지금으로부터 780여 년 전의 작품이다.

크기는 높이가 103㎝이고 입 지름은 67㎝다.

  이 종은 원래 변산의 4대 사찰의 하나였던 청림사(靑林寺)에서 주성(鑄成)되어 사용했던 청림사의 종이었는데

청림사가 폐사된 후 땅속에 묻혀 있었던 것을 1853년(哲宗. 4년)에 어느 농부가 우연히 밭을 갈다가 발견하여

내소사로 옮겨 놓은 것이다.
  청림사(靑林寺)는 우슬재(牛膝峙)를 넘어 내변산으로 들어가는 도중 우측으로 첫 번째에 있는 청림마을에 있었다.

 지금도 마을사람들은 마을의 중앙지대를 「탑거리」라 하고 마을의 남쪽 시냇가 주변을 부도거리」라 부르고 있다.

 이 절이 언제 어떤 연유로 폐사가 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이 청림사 종이 내소사로 옮겨지게 된 데에는 재미있는 승전설화(僧傳說話) 한토막이 전해지고 있다.

 종을 땅속으로부터 캐어낸 후 아무리 처 보아도 울지 않는 벙어리 종이어서 변산 안의 여러 절 이름을

웨치며 종을 쳐보는데 “내소사요!” 하면서 치니까 비로소 웅장하고 아름다운 종소리가 변산 안에 울려

퍼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 종이 안치되기를 원하는 곳이 내소사라 하고 내소사로

 옮겼다는 이야기다. 이는 이 종이 그만큼 신비롭고도 영험한 종이라는 뜻도 있고 그런 신종(神鍾)을

안치할 곳은 내소사 같은 .명찰(名刹)이어야 한다는 뜻도 은근히 담겨진 이야기라 하겠다.

내소사 고려동종, 종신 하단에 "..邊山 靑林寺 金鐘鑄成入重七百斤...' 이라고 새겼는데,

 이는 종을 주조하던 당시의 명이 아니고 1853년에 내소사로 옮겨 안치하면서 새긴 것으로 여겨진다

세번째 문인 봉래루



봉래루


내소사 봉래루 가람의 누각 건물은 주로 법회를 여는 공간이다. 본전 건물에 들어가려면 원래는 이 건물의

 마루높이가 낮아 왼쪽으로 우회해서 들어가야 됐었는데, 언젠가부터 마루를 들어 올려 마루 밑으로 진입하도록

 접근방식이 바뀌어 있다.

그러니까 ‘봉래루’의 앞 두 글자 ‘봉래’는 이 건물의 이름이고, 뒤에 붙은 ‘루’자는 이 건축물의 형식과 용도를

 나타내는 글자가 되겠네요?

‘루(樓)’자가 붙는 건축물의 용도는 회합과 연회, 강연 등이 열리는 곳입니다. 형식은 마루를 지상보다 높게 들어

올려 1층에는 기둥만 있는, 이른바 필로티(Pilotis) 구조 방식으로 돼 있다

내소사 삼층석탑 전라북도 유형문화재124호


내소사(來蘇寺) 대웅전 앞에 서 있는 3층 석탑으로,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우고 꼭대기에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633년(백제 무왕 34) 백제의 승려 혜구 두타()가 창건하여 처음에는 소래사

()라고 하였다. 창건 당시에는 대소래사(大)와 소소래사(小)가 있었는데, 지금 남아 있는

내소사(來蘇寺)는 소소래사(小寺)이다. 내소사(來蘇寺) 삼층석탑의 위·아래층 기단과 탑신부의 각 몸돌에는

 기둥모양을 조각하였다. 급한 경사가 흐르는 지붕돌은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다. 꼭대기에는 네모난 받침돌 위로

둥근 형태의 크고 작은 석재 2개가 남아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1층 탑신에 비해 2층부터는 그 높이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규모가 작은 탑으로, 통일신라의 일반적인 석탑양식을 따른 고려시대 석탑으로 추정된다.  

요사채선화당

요사채 설선당

요사채 내소사


대웅보전

보물 제291호.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건물. 막돌허튼층쌓기로 된 높은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두리기둥[圓柱]을

 세웠으며 기둥의 밑부분은 그랭이수법을 썼음이 뚜렷하다. 1633년(인조 11) 청민대사가 절을 고칠 때 지은 것이라 전한다.


공포의 짜임은 외3출목(外三出目)과 내5출목(內五出目)으로서 기둥 위에는 물론 주간(柱間)에도 공간포(空間包)를 놓은

 다포계 양식이다. 주두(柱頭: 대접받침)는 굽면이 사면(斜面)으로 끊기고 굽받침이 없으며 소첨차(小檐遮)나 대첨차

모두 교두형(翹頭形)으로 조각되었다.


초제공(初諸工)에서 3제공까지의 살미첨차[山彌檐遮] 끝은 앙서[仰舌]로 되어 있고, 4제공은 수서[垂舌]로 되어 있다.

내부의 공포(貢包)는 살미첨차가 모두 판형(板形)으로 되어 그 끝에 연꽃봉오리를 조각하여 장식하고 있다.

가구(架構)는 대들보 앞면에서는 평주(平柱)에 걸고 뒷면에서는 내고주(內高柱)에 걸었으며 그 위에 동자기둥을 세워 종보

[宗樑]를 받치게 하였는데 종보부터는 우물천장을 가설하여 천장 속을 가리고 있다.


또한, 양측면의 평주에서는 충량(衝樑: 대들보의 직각방향으로 얹힌 짧은 대들보)을 내어 대들보 위에 걸었는데,

보머리에는 용이 목어(木魚)를 물고 있는 모습으로 되어 있다. 불단 뒤에는 후불벽(後佛壁)이 있으며,

그 좌우의 벽기둥은 대들보에 고정되어 있다.


바닥에는 마루를 깔았으며 불단 위에는 닫집을 따로 만들지 않았다. 건물의 정면 3칸은 모두 정교하게 조각한

소슬빗꽃살창호를 달았고, 측면에는 협문(夾門)을 각각 한짝씩 달았으며 나머지는 벽으로 처리하였다.



대웅보전 내5포


대웅보전 내부   수많은 목재로 화려하게 결구된 공포와 대들보 천장의 각종 문양들로 가득하다.
들보 끝머리에 목침이 한짝이 없는데 이는 법당 건립시의 전설 들보위에 눈을 부릎뜬 용이 물고기

한마리를 입에 물고 있는데 이는 이 물고기를 안락한 곳으로 옭겨 주려는 자비를 상징함이다

아름답고 정교한 꽃살문은 옛날 단청이 살아 있었을 때에는 더욱 아름웠을 것

내소사는 대웅보전의 꽃살문은 현존하는 사찰의 꽃살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고 한다

돋을새김된 모란,국화,연화의 단청은 사라젔지만 문 가득 만개한 모란꽃잎이  바람에 흩날리는 듯하고

싱싱한 국화는 정연한 모습이며, 탐스러운 연꽃 봉우리는 다소곳하다.


살도 민살이 아니라 모두 잎사귀 형태로 조각하여 한층 정성을 다하였음을 알 수 있다.

누렇게 변한 나무의 속살이 고색창연함을 더하는데, 세월의 흔적에도 불구하고 나무꽃의 화려함에는

변함이 없다. 단청이 사라지고 형태만 남은 여기에서 꽃살문의 진정한 모습을 본다.

 

솟을꽃살문은 가장 화려한 문 장식이다.

솟을살이 교차되는 부분에 모란, 국화, 연화 등의 꽃들을 새겨 넣고 단청하여 장엄한 것이다.

잎시귀 형태의 살에는 녹색으로 단청을 하고 꽃에는 청,적, 백,황색으로 화려하게 꾸민다.



내소사 대웅보전 천장에는 천상의 극락세계가 펼쳐져 있으며

 그곳에 천음(天音,梵音)을 연주하는 악기들이 그려져 있다고 한다

 비파, 북, 장고, 나팔, 가야금 등의 악기들을 천상의 선녀들이 범음을 연주하고 있으며.

또 천장에는 극락으로 향하는 문이 있고, 그곳에 문고리가 달려 있고 그 문고리를 열면

극락세계로 들어간다고 한다

공포(栱包)

능가산 내소사    대웅보전  편액  - 원교 이광사 書(圓嶠 李匡師 : 1705~1777) -
조선 후기의 문인 서화가 양명학자로서, 본관은 전주. 자는 도보(道甫),
호는 원교(圓嶠) 수북(壽北)이다. 
해서 초서 전서 예서에 두루 뛰어났고 그림에도 뛰어나 산수 인물 초충(草蟲)을 잘 그렸고
소박한 문인 취향의 화풍을 이루었다.

대웅보전 외삼포


공포(栱包)

일반적으로 궁궐·사찰·기념적 건축에 쓰이며, 기둥과 보, 기둥과 도리 등의 수직재(垂直材)와 횡재(橫材)가 맞추어질 때 장식적

 또는 구조적으로 짜여져서 여러 부재가 결속된 것을 말한다.


이것은 건물 내부에서 낮은 도리와 높은 도리 사이, 또 동자주(童子柱)와 종보[宗梁]와 종도리의 맞춤에도 사용될 수 있고,

대공(臺工)과 종도리 사이에도 짜일 수 있다.


또, 외부로는 창방(昌枋)·평방(平枋)과 처마도리 사이, 외목도리(外目道里)와 주심도리 사이에도 짜이는 것이 보통이고,

기둥 위 주두(柱枓 : 대접처럼 널찍하고 네모진 나무)에 놓이는 것과 주두 밑에 놓이는 것 등 실로 다양하다.


공포는 건물 지붕의 무게를 분산 혹은 집중시켜 구조적으로 안전한 완충적 기능을 하기도 하고, 내부공간을 확장시키고 건물을

높여 웅장한 멋을 낼 뿐 아니라, 그 구성과 공작이 섬세하고 화려하여 장식적으로 중요한 기능을 가진다.


그러므로 우리 나라와 중국·일본 등지의 전통 목조건축에서 공포는 그 건물의 가장 중요한 의장적 표현(意匠的表現)으로서

 각 시대에 따라 특징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특징의 변화는 건물 어느 부분보다도 민감하여 문헌기록이 없는 건축이라도 시대의 추정과 건물의 구조 및 양식 분류를

 할 수 있는 중요자료가 됨은 물론이다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요약 불교 사찰 내에 설치되는 절집의 하나.선종 사찰에서 그 종파를 연 조사()를 봉안한 절집이다. 조사당이라고도 한다. 
조사전이 없는 절에서는 영각()을 짓고, 국사를 배출한 절에서는 대신 국사전(殿)을 짓기도 한다.
고려시대 16국사를 배출한 송광사가 국사전을 짓고 16국사의 영정을 모시는 것이 그 예이다.


지장보살을 모신곳


모신 부처를 기준으로 전각 이름을 붙인다. 석가모니불을 모신 곳은 대웅전, 아미타불을 모시면 극락전,

 무량수전, 비로자나불을 모시면 대적광전이나 비로전, 약사여래를 모시면 약사전이라 한다.

 보살을 본존불로 모신 곳도 있는데 관음보살은 관음전이나 원통전, 지장보살은 명부전 지장전,

  미륵보살은 미륵전 용화전이라 한다. 문수보살, 보현보살, 대세지보살은 협시불로 모신다.

삼성각 이런 전통신앙의 산악 숭배가 사원 내부에 자리잡은 것이 산신각이다.

우리는 예로부터 산악 숭배 관념이 지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일찍부터 신성한 곳으로

 믿어지는 산에 제사를 드리고, 산에는 산신(山神)이 있다고 생각해 왔다. 신라 때는 국가적으로 중요한

다섯 산, 곧 동 토함산, 남 지리산, 서 계룡산, 북 태백산, 중 팔공산을 오악(五岳)으로 지정하여 국가가

 주재하는 제사를 올렸으며 이는 고려나 조선시대까지 지속되었다.

진화사 큰스님의 요사채인듯







영산교주 석가모니불

                                문수보살,관음보살,증청묘법다보여래불                                                  보현보살,세지보살,극락도사아미타여래불



템플스테이

보호수

수령 약 1000년 수고 20m 나무둘레 7.5m

래소사에 대한 전설

대웅보전은 인조 11년에 청민선사가 중창한 것으로 약 400년 된 건물입니다.

400년 전에 이 법당을 지을 때 목수가 3년 동안 목침만 깎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절의 사미승이 목수에게 다가와 궁금해서 말을 걸었습니다.

 “손님! 손님은 목침만 깎고 절은 어느 세월에 지을 거요?”

하지만 목수는 아무 말대꾸도 하지 않고 목침만 깎았습니다.

그러자 화가 난 사미승은 은근히 미운 생각이 들어 목침 한 개를 감춰버렸습니다.

이때 목수는 묵언 수행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꼭 3년째 되는 날 목수는 집을 지어야겠다며 대패를 놓고 일어서 목침들을 하나 둘 세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목침 하나가 모자랐습니다.

목수는 아주 절망적인 표정으로 망태기 속에 연장을 챙기기 시작했고 절에 온 처음으로 스님에게 말을 했습니다.

“소인은 법당을 지을 인연이 없는 것 같사옵니다.” 스님이 연유를 묻자

“3년간 켠 목침 하나가 부족합니다. 제 경계가 부족하여 업연을 이루지 못하게 된 것 같사옵니다.”

그러자 스님이 “목침이 그대의 경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니 서둘러서 법당을 지으시오”

“스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법당을 짓겠지만 목침 하나를 빼놓고 짓겠습니다.”

결국 목수는 목침 하나를 빼놓고 집을 완성하게 됐는데 이 대웅보전은 못하나 박지 않고 짜 맞춰진 보물291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이후에 단청을 하게 되었는데 100일 동안 법당 안을 아무도 들여다보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또 사미승이 장난기가 발동하여 백일에서 하루 부족한 날 그만 문을 열어버렸습니다.

안을 보니 화공은 온데간데없고 새 한 마리가 입에 붓을 물고 날개에 물감을 묻혀서 벽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사미승이 문을 열자마자 새는 그림을 그리다가 날아가 버리고 아직도 하루 동안 색칠하지 못한 곳이 남아있습니다.

이 새는 바로 관음세음보살의 화신이었습니다.


천정을 보면

천인들이 황룡을 타고 날아다니면서 경전을 나르는 모습이 보인다고 합니다

이와 똑 같은 그림이 빠져있습니다.

지금도 대웅보전 안에서 목침 빠진 것, 하루 동안 단청 하지 못한 곳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하는데 내눈에는 .....





대장금을 촬영했던 연못이라고한다



내소사 가는 길

김 용 택

서해바다
내소사 푸른 앞바다에
꽃산 하나 나타났네
달려가도 달려가도
산을 넘고 들을 지나
또 산을 넘어
아무리 달려가도
저 꽃산 눈 감고
둥둥 떠가다
그 꽃산 가라앉더니
꽃잎 하나 떴네
꽃산 잃고
꿈 깨었네 


김용택 시인의 내소사 가는길을 생각하며 전나무 숲길을 따라 식사 장소로

작년 9월달에 왔을 때는 이렇게 노란 상사화가 많이 피어 있었는데

이렇게 내소사를 한바퀴 돌아보고 저녁노을을 보며 하루를 마무리 하고


내소사입구 음식점에서 버섯전골로 저녁식사를하고 우리는 변산 국립자연휴양림숙소로 이동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