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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광주.제주

자연휴양림과 직소폭포

변산 국립자연휴양림에서 하룻밤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니 창밖으로 바다와 산이 보인다

앞에보이는 산은 위도이고 저 뒤로 보이는것은 신시도인 것 같다

저앞에 손에 잡힐듯 위도가 보이니 최정순님의 위도의 꽃을 옮겨본다


위도의 꽃

           博川 최정순

 

 

해무에 온몸 포박당한 격포항
잠시 갈 길 잃고 서성이다
핵 폐기물에 몸살 앓았다던
궁금하고 궁금하여 찾은 위도
허균의 이상세계 율도국
고슴도치 닮았다 위도蝟島라네
가파른 망월봉 비척비척 오르니
넓디넓은 해변 그림처럼 누워 있고
험준한 봉우리 내려가다 보니
자장율사 창건한 내원궁 내원암
나를 잠시 쉬어 가라 하네
암자 대청마루 앉아 눈길 멀리 던지니
망망한 푸른 물결 보며 퍼렇게 울다 지쳐
길마다 산등허리마다 꽃 피운 상사화
하얀 미소로 육지 향해 하늘거리며
포구 버리고 떠난 사람들에
그리움 가득 안고 하얀 손짓하네


창넘어로 보이는 숲속의 집들

해가 떠오르는 듯 한데 점점 물안개가 짙게 드리워진다

아침에 간단히 떡라면으로 식사를하고 8시40분 해안가 부안 마실길로 트레킹을 나간다

휴양림앞 습지를지나 바닷가길로 접어드니 양식장에가는 어선인지 일찍부터

물살을 가르며 지나간다


우리가 머물렀던 자연휴양관 A동과B동

숲속에 집들은 독채로 가족형으로 운영되는듯

대밭 턴널도 지나고 1.5km를 걸은 것 같은데 벌써 종착점에 도착했다

왼쪽 집들은 별장 이덕화 집도 있다던데 지금도 소유하고 있는지?

오른쪽으로가면 모항 해수욕장이 있는 것 같고

다정큼나무

남쪽 지방 바닷가 모래땅에서 자란다. 키는 2~4m 정도지만 줄기 아래에서부터 많은 가지가 나와 반구형을 이룬다.

 잎은 어긋나지만 모여난 것처럼 보이며 잎가장자리에는 끝이 둔한 톱니가 있다.

꽃은 하얀색이며 5월에 가지 끝에서 달리는 원추꽃차례를 이룬다. 열매는 동그랗고 가을에 까맣게 익는다.

반그늘에서 잘 자라나 해가 비추는 곳에서도 자란다. 생장속도가 늦고 새순이 잘 나오지 않기 때문에 될 수 있으면

 나뭇가지를 자르지 않아야 한다. 1월평균기온이 0℃ 이상인 곳에서만 자랄 수 있기 때문에 서울 근처 온실

 안에서 키우고 있다. 나무껍질에서 갈색 염료가 나온다.

3km를 트레킹하고 다시 짐을 싸서 내변산 직소폭포로 향한다

변산 반도 국립 공원

변산 반도 국립 공원은 전라 북도 부안군 변산 반도 일대에 있는 국립 공원이다.

 1971년에 변산 구릉지를 중심으로 52.9㎢가 도립 공원으로 지정되었다가 1988년에 국립 공원으로 승격되면서

 공원 면적이 157㎢로 늘어났다. 변산은 예로부터 호남 지역 5대 명산의 하나로 꼽혀 왔으며, 이름도 능가산

· 봉래산 · 영주산 등으로 불려왔다. 변산의 경치는 크게 구릉 지역인 내변산과 해안 지역인 외변산으로 나뉜다.

내변산에는 해발 300~400m의 산봉우리들이 연봉을 이루며, 맑은 계곡과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숲 속에는 내소사 · 개암사 · 월명암 등 오래 된 절이 있다. 진서면 석포리에는 신라 선덕 여왕 때인 633년에

 지은 절 내소사가 있다. 이 절에는 보물 제277호로 지정된 '내소사 고려 동종'을 비롯하여 '법화경 절본 사본

(보물 제278호)', '내소사 대웅보전(보물 제291호)' 등 많은 문화재가 있다. 절의 뒤쪽에는 봉래산 가인암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고, 경내에는 전나무 숲이 울창하다. 또, 절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높이 약 20m 되는

 직소 폭포와 그 아래로 이어지는 제2, 제3 폭포가 있다. 이 곳은 내변산에서 경치가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알려져 있다.

직소폭포 주차장에서 직소폭포로가는 초입부터 단풍턴널이 기분 좋은 하루를 알리는 듯

상서면 감교리에는 고려 숙종 때에 지은 개암사가 있다. 이 절에서는 조선 효종 때인 1658년에 지은 대웅전이

 유명한데, 보물 제292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 변산면 중계리에는 신라 신문왕 때 지은 절 월명암이 있다.

 지금의 건물은 6·25 전쟁 때불에 탄 것을 헐고 다시 지은 것이다. 월명암의 뒷산은 해발 448m의 봉우리인데

낙조대라 한다. 낙조대에서 서해로 지는 해를 바라보는 경관이 매우 아름답다. 그 밖에 내변산에는 실상사

 옛 터의 유적과 울금바위 · 선계 폭포 등의 경승지가 있다.


외변산에는 서해안 3대 해수욕장으로 꼽히는 변산 해수욕장과 전국 최대 규모인 계화도 간척지가 있다.

 또, 한 달에 두 번씩 바다가 갈라지는 현상으로 유명한 섬 하도, 띠뱃놀이로 잘 알려진 섬 위도가 있다.

 변산면 격포리에는 변산 제1의 경치를 자랑하는 채석강과 적벽강이 있다. 바닷물에 침식된 해안 퇴적암의

 모습이 마치 수만 권의 책을 쌓아 놓은 듯하다. 이러한 퇴적암과 밀물에 깔리는 자갈 등이 뛰어난 해안

경관을 만들고 있다. 그 밖에도 변산 반도에는 부안 도청리의 호랑가시나무 군락 · 부안 격포리의 후박나무

군락 · 부안 중계리의 꽝꽝나무 군락 등 천연 기념물도 많이 있다.


선인봉

저녁에 밤공기가 차더만 아침에 햇볕이드니 물안개가 피어오른다








반영이 아름다운 직소보 전망대에서 버라본 모습


직소보는 과거 부안댐이 건설되기전에 부안군민의 비상식수원으로 사용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인공보다 직소폭포에서 떨어진 물이 분옥담 선녀탕을 지나 이곳 직소보에

 모이면서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이루고 있다




날이 많이 가물어 물줄기가 시원치가 않다

2년전 물이 많았을 때의 직소폭포





직소폭포위 주상절리군

선녀탕

2년전의 여름 선녀탕의 모습





지금은 물이 적어서 건너가서 봉래구곡과 소금강이라는 글씨를 볼 수 있는데 2년전

여름에는 아래와 같이 계곡물이 많아서 건너가 보지를 못했다


蓬萊九曲, 김석곤의 글씨


김석곤(金晳坤, 1874~1948)】 일제강점기 유학자. 자는 천안(薦按), 호는 동초(東樵) 또는 눌어(訥語).

 본관은 김해이고, 전북 태인(泰仁) 출생. 부친은 김연추(金演秋).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문인으로,

수당(秀堂) 김교윤(金敎潤)과 교유. 명승지를 두루 유람하며 바위에 글씨를 새기기를 즐겨, 내장산 서래봉

불충암(佛充庵)의 뒤쪽 바위에는 ‘내장풍악(內藏楓嶽)’, 정읍두승산 정상에는 ‘수두목승(水斗木升)’이라고

 새겼다. 또 칠보산(七寶山)에는 ‘도불원인(道不遠人)’, 상두산(象頭山)에는 ‘산명수류(山明水流)’,

백운대(白雲臺)에는 ‘유수불부(流水不腐)’라고 새겼다.

 <출처;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_한국학중앙연구원>








실상사

실상사는 통일신라 신문왕 9년(689)에 초의선사가 세운 절로 조선시대에 양녕대군이 고쳐지었다고

 전하나 한국전쟁으로 불타버렸습니다. 그후 실상사는 그동안 폐사지 상태로 내려오다가 1995년부터

복원불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실상사는 내변산의 4대 사찰 중의 하나였으나 현재는 절터에는 조선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기와조각이

출토되고 있으며, 석조부도가 3기 남아있습니다. 현재 미륵전과 삼성각 그리고 요사채가 세워져 있습니다.

인장바위



변산 제법성지(邊山 制法聖地)

 소태산대종사가 1920년(원기5)부터 1923년까지 4년간 머물며 보림()하고 교법을 초안한 제법성지().
 전북 부안군 변산반도 일대의 봉래산(예로부터 능가산ㆍ영주산ㆍ봉래산으로 불렀음) 중앙지인 실상사 옆으로,
소태산은 이곳에 봉래정사를 짓고 교법을 초안했다.

소태산이 1919년 봄에 구수산에서 맑은 기운이 뜨는 것을 보고 찾아간 곳이 변산 월명암. 법인성사 후 8월에 정산종사를
 월명암에 먼저 보내었으며, 소태산이 변산에 간 것은 그해 12월이었다. 이때부터 변산에 입산하여 월명암에 얼마 머물다
전주, 원평 등지에서 온 강일순의 제자들에 의해 실상동에 초당을 잡고 수양하는 한편 교강을 초안한다. 이때 실상사
월명암 선승들과 성리문답을 하며 관심입정()과 견성성불하는 법문을 설하여 많은 선화가 전해진다. (중략)

봉래정사와 실상사는 한국전쟁 때 불타 버렸고, 월명암만 현재까지 남아 있다. 봉래정사는 터만 겨우 보존되어 오다가
1980년(원기65)에 와서 소태산의 제법을 기리는 ‘일원대도비()’를 세우고, 1979년에는 월명암의 청정 기운이
그대로 뻗어 내린 말마동에 터잡아 건축한 원광선원을 매입하여 성지 수호를 하고 있다.

특히 이 작업 중에는 부엌 터에서 백자(중발) 1점이 발굴되어 중앙박물관에 기증하기도 했다. 1980년(원기65) 7월 17일에는
 변산 제법성지터에 ‘봉래정사 석두암터’ 비와 ‘일원대도’ 비를 건립했다. 석두암터 표시 비는 자연석 사이에 기석을 놓고
 그 위에 120㎝ 높이의 오석()에 새겼으며, 일원대도 비는 자연석 위에 기각을 세우고 그 위에 3층 기단을 얹은 후
다시 그 위에 높이 180㎝의 오석으로 기념비를 세워 총 높이 369.6㎝ 크기로 건립했다. (중략) 2001년(원기86) 10월에는
 원광선원에서 ‘실상초당 복원’과 ‘순례객을 위한 기도시설’을 목적으로 ‘실상초당 기도실’을 기공하여, 2003년(원기88)
 4월에 59.4㎡ 규모의 한옥으로 건축되었다. <출처; 원불교대사전, 원불교100년기념성업회>

봉래정사(蓬萊精舍)

전북 부안군 변산면 실상동의 실상초당과 석두암을 통칭하여 봉래정사라 한다. 봉래정사라고 이름하는 것은 변산을

 소금강()으로 여기어 금강산의 별칭인 봉래산의 이름을 따 그 수양처를 봉래정사라 했다.

소태산대종사는 1919년(원기4)부터 1924년(원기9)까지 5년간 봉래정사에 머물렀다. 소태산이 하산한 뒤,

경상도에서 이주해 온 이춘풍이 산외() 변산 초입인 신복리 종곡에서 산내(: ) 실상동으로 들어와

봉래정사를 수호하며 스스로 봉래산인()이라 칭했다.

 이춘풍의 가족들이 길룡리로 이사한 뒤에 이보국ㆍ이준경 등이 한때 봉래정사 수호주로서 주재하다가

 이후 관리하는 사람이 없어 퇴락되어 버렸고, 1948년(원기33) 오창건이 1개월간 머물며 개축공사를 하여 초가지붕을

 양철지붕으로 개수했으나 한국전쟁으로 실상사 등 일대가 소실되어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출처; 원불교대사전, 원불교100년기념성업회>

 엽토51님


    일원이라 함은 우주의 근본되는 진리를 상징한 말. 일원의 진리는 절대 유일하여 상대가 끊어진 자리요,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으며 무한히 돌고 돌아 그침이 없다는 뜻에서 대도라 한다.

또 대도란 만생령을 제도하고 전 인류를 불보살의 세계로 이끌어주는 크고 넓은 길,

또는 진리. 일원대도란 말은 소태산대종사가 진리를 크게 깨친 후에 비로소 처음 사용되었다

엽토 51님






부안에는 유명한 기생시인 매창을 기리는 공원이 있는데 이번 여행에 계획에 빠저 간단히 소개를 합니다


전라북도 기념물 제65호 매창의 묘


조선 시대 대표적 여류시인 중에 규수(閨秀)시인으로 허난설헌(許蘭雪軒)을 꼽는다면,

기녀(妓女)시인으로는 황진이와 매창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매창(梅窓)은 아버지에게서 한문을 배웠다고 하며, 

시와 거문고에 뛰어나 김제군수를 지낸 이귀(李貴) 같은 고관이나 유희경(劉希慶),

허균(許筠) 같은 시인들이 그를 제대로 알아주고 깊이 사귀었다.  


매창(梅窓)의 문학적 재질이 빛을 발하고

그의 뛰어난 시문학이 세상에 알릴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을 만나게 되면서 부터다.

당시 서울 장안의 시선(詩仙)으로 이름이 자자하던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은 48살의 천민 출신

유부남이었다. 매창의 나이 20살' 


유희경의 촌은집(村隱集)에서는 오로지 시문(詩文)만을 

풍류를 삼던 유희경은 매창을 만난 뒤로 평생 지켜오던 

선비의 지조를 처음으로 파계 하였다고 술회하였다.

매창 또한 유희경을 만난 일을

신선이 땅위에 내려왔다(謫下當時壬癸辰 此生愁恨與誰伸)고

표현하였다.



이화우

이화우 흩날릴제 울며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라.


이 시는가곡원류와 교과서에 실렸을 정도로 유명하다.

불과 10여 일(어떤 기록은 2년 여),

시로 마음과 몸을 주고받던 그들에게 이별이 찾아온다.

1592년 일어난 임진왜란이 그들을 갈라놓은 것이다.


유희경은 의병이 되어 매창을 떠났고,

님을 보낸 매창이 유희경을 그리며 쓴 시가 유명한 '이화우'이다



임색각/매창


애끓는 情 말로는 할길이 없어

밤새워 머리칼이 半 넘아 세었구나

생각는 情 그대도 알고프거든

가락지도 안 맞는 여윈 손 보소


매창과 헤어진 유희경 역시 그리워 하기는 마찬가지.


매창을 그리워하며/유희경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보고
오동나무에 비 뿌릴제 애가 끊겨라.



 옛님을 생각하며


  春來人在遠 (춘래인재원), 봄은 왔지만 임은 먼 곳에 계시어

                對景意難平 (대경의난평) 경치를 보면서도 마음을 가누기가 어렵습니다

  

   鸞鏡朝粧歇 (난경조장헐), 난새 거울에 아침 화장을 마치고 

            瑤琴月下鳴 (요금월하명) 달 아래서 거문고를 뜯으니 눈물이 나네요

  

 看花新恨起 (간화신한기), 꽃 바라 볼수록 새 설움이 일고

        聽燕舊愁生 (청연구수생) 제비 우는 소리에 옛님 생각 솟아나니

 

 夜夜相思夢 (야야상사몽), 밤마다 임 그리는 꿈만 꾸다가

            還驚五漏聲 (환경오루성) 오경 알리는 물시계 소리에 놀라 깬다오.


 


매창과 가장 가까웠던 남자는 세 사람,

광해군 시절, 불우하게 지내다 인조반정의 주인공이 된 이귀'

매창이 첫 순정을 바친 유부남 시인 유희경,

여류 시인으로 명성 높은 허난설헌의 동생 허균(홍길동의 저자),

이 가운데 매창이 일생 그리워 한 남자는 유희경뿐이었다.

그러나 홀로 사는 천한 기생 매창을 유혹하는 사내들이  너무 많았다.


이 때 지은 시가 '취하신 님께'다


취하신 손님이 명주 저고리 옷자락을 잡으니
손길 따라 명주 저고리 소리를 내며 찢어졌군요
명주저고리 하나 쯤이야 아까울게 없지만
임이 주신 은정 까지도 찢어졌을까 그게 두려울 뿐.


의병이 된 유희경은 그 뒤 어찌 됐는가,

임진왜란이 끝난 후 그는 면천(천민에서 벗어나는 일)이 되었으며

광해군의 폐모론에 반대하여 이조반정 이후 승승장구,

통정대부(정3품), 가의 대부(종2품), 한성부윤(정2품)의 벼슬을 받았다.


첩이 허용되던 당시,

왜 유희경은 산골에서 외롭게 멸시받고 살아가는 

그의 연인 매창을 서울로 부르지 않았을까? 


거문고를 타면서

몇 해 동안이나 비바람소리를 내었던가

여지껏 지녀온 작은 거문고

외로운 난새의 노랠랑 뜯지를 말자더니

끝내 백두음 가락을 스스로 지어서 읊었거니


 매창과 유희경의 재회는 15년이 흐른 1607년이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둘의 사랑은 변하지 않았다.


반가움도 잠시, 또 다시 유희경과 헤어져야 했다.

 매창은 유희경과 함께 걸었던 곳을 

혼자 배회하며 재회를 추억하하거나 거문고로 밤을 새우다


3년 후인 매창의 나이 38살(1610년)에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매창은 그의 죽음을 유희경에게 알리지 않았다.

아마 유희경에 대한 깊은 사랑때문이었으리라.



매창이 죽으며 남긴 절명시(絶命詩)가 있다.


結約挑園洞裏仙(결약도원동이선)-도원에 맹세할 땐 신선같던 이 몸이

豈知今日事凄然(기지금일사처연)-이다지도 처량할 줄 그 누가 알았으랴.

坐懷暗恨五絃曲(좌회암한오현곡)-애달픈 이 심정을 거문고에 실러 볼까

萬意千事賦一篇(만의천사부일편)-가닥가닥 얽힌 사연 시로나 달래볼까.

塵世是非多苦海(진세시비다고해)-풍진 세상 고해에는 말썽도 많아

深閨永夜苦如年(심규영야고여년)-홀로 새는 이 밤이 몇 해인 듯 길구나.

藍橋欲暮重回首(남교욕모중회수)-덧없이 지는 해에 머리를 돌려보니

靑疊雲山隔眼前(청첩운산격안전)-구름 속에 첩첩청산눈앞을 가리우네.


 위의 시는 유희경이 매창의 무덤에 성묘를 한 다음 집으로 돌아와 보니,

누군가의 정성어린 손길에 의해 궤연(几筵)이 모셔져 있고 궤연(几筵)옆에는

거문고와 매창의 마지막 작품인 위의 절필(絶筆) 유작시(遺作詩) 가 놓여 있었다.


유희경은 절명시를 써가면서 죽어간 이매창을 생각했다.              

 유희경은 붓을 들어 탄식과 후회가 가슴을 후비는 아픔으로 아래의 시를 썼다

                                                  明眸皓齒翠眉娘(명모호치취미낭)-맑은 눈 하얀이 푸른눈섭 계랑아

    忽逐浮雲入杳茫(홀축부운입묘망)-홀연히 뜬구름 따라 간 곳이 아득하구나
縱是芳魂歸浿色(종시방혼귀패색)-꽃다운 넋은 죽어서 저승으로 갔는가

   誰將玉骨葬家鄕(수장옥골장가향)-그 누구가 너의 옥골을 고향에 묻어주랴


유희경은 92살에 죽었다.

너무도 대조적이다.

한 여인은 일생 연인을 그리다 요절했고,

그 남자는 사랑과 부귀영화를 누리며 천수를 다 했다.


홍길동의 저자 허균과 매창과의 시 교류도 활발했다.

허균이 매창의 죽음을 알고 쓴 시다.


 매창의 죽음을 슬퍼하며

妙句土甚擒錦(묘구토심금금)- 아름다운 글귀는 비단을 펴는 듯하고

淸歌解駐雲(청가해주운)- 맑은 노래는 머문 구름도 풀어 헤치네

兪桃來下界(유도래하계)- 복숭아를 훔쳐서 인간세계로 내려오더니

藥去人群(약거인군)- 불사약을 훔쳐서 인간무리를 두고 떠났네

燈暗芙蓉帳(등암부용장)- 부용꽃 수놓은 휘장엔 등불이 어둡기만 하고

香殘翡翠裙(향잔비취군)- 비취색 치마엔 향내 아직 남아있는데

明年小挑發(명년소도발)- 이듬해 작은 복사꽃 필 때쯤이면

誰過薛濤墳(수과설도분)- 누가 설도의 무덤을 찾으리

 

허균이 이매창을 알게 된것은

그의 큰형 허성이 전라도 관찰사로 재직 중이던 1601년에

허균은 충청, 전라도 지방의 세금을 거둬들이는 수운판관으로

호남지방을 자주 순시하면서 부안의 명기이자 시인인 매창을 알게 되었고

시문학을 통하여 애틋하고 순수한 사랑을 나누게 된다. 

이때가 허균이 33살, 매창이 29살 로 전한다.

 


그때를 허균은 그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신축년(辛丑年) 1601(선조34)년 벼슬을 내놓고 부안에 왔는데

비가 쏟아져서 그곳에 머물렀고 그때 매창을 만났다

얼굴이 비록 아름답지는 못했지만, 재주와 정취가 있어 이야기를 나눌만하였다.

하루 종일 술을 주고받았으며 시로 화답했다. 저녁이 되자 조카딸을 침실로

 보내주었는데 경원하며 꺼리었기 때문이다."


국문학자이자 시조작가인 가람 이병기 선생이 매창을 그리며 쓴 시

 

돌비는 낡아지고 금잔디는 새로워라     

덧없이 비와 바람 오고가고 하지마는    

한줌의 향기로운 이 흙 헐리지를 않는다

 

이화우 부르다가 거문고 비껴두고        

 등아래 홀로앉아 누구를 생각는지         

 두 뺨에 젖은 눈물이 흐르는 듯 하구나   

 

 나삼상 손에 잡혀 몇 번이나 찢었으리    

 그리던 운우도 스러진 꿈이 되고           

그 고운 글발 그래도 정은 살아 남았네



그녀가 죽은 후 몇 년 뒤에 그의 수백 편의 시들 중, 고을 사람들에 의해 전해 오던

시 58편을 부안 고을 아전들이 모아 목판에 새겨 <매창집>을 간행하였다.

당시 세계 어느 나라를 둘러보아도 한 여인의 시집이 이러한 단행본으로 나온 예는 없다.


문화재 사랑님 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