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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광주.제주

장성 필암서원과 고창 문수사

필암서원


사적 제242호. 1590년(선조 23) 호남 유림들이 김인후(金麟厚)의 도학을 추모하기 위해 장성읍 기산리에

 사우(祠宇)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597년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어 1624년 복원하였으며, 1662년(현종 3) 지방 유림들의 청액소(請額疏)에 의해

 ‘필암(筆巖)’이라고 사액(賜額) 되었다. 1672년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고 1786년에는 양자징(梁子澂)을

추가 배향(配享) 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훼철(毁撤) 되지 않은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경내의 건물로는 사우·신문(神門)·동서 협문(夾門)·전사청(典祀廳)·장서각(藏書閣)·경장각(經藏閣)·진덕재(進德齋)·

숭의재(崇義齋)·청절당(淸節堂)·확연루(廓然樓)·장판각(藏板閣)·한장사(汗掌舍)·고직사(雇直舍)·행랑·창고·홍살문·

계생비(繫牲碑)와 하마석(下馬石) 2개 등이 있다.


주요 전각들은 남북 자오선(南北子午線)을 중심축으로 하여 좌우 대칭으로 배치되었다.

남북이 길게 장방형으로 담장을 쌓고 정면 중앙에 누문(樓門)인 확연루를 두었으며,

 그 중심축 선상 북쪽에 청절당이 위치하고 있다.


확연루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중층 팔작기와집으로, 낮은 장대석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원기둥)을 세워 주두(柱頭)·첨차(檐遮)·소로[小累]·쇠서[牛舌]로 결구한 이익공식

(二翼工式)을 이루고 있다.

이 청절당은 장대석으로 마무리한 낮은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민흘림 두리기둥을 세웠는데, 

기둥 위에는 주두를 놓고 쇠서 하나를 내어 초익공식으로 꾸몄다.

 가구는 오량으로 대들보를 앞뒤의 평주 위에 걸고, 판대공으로 종도리를 받친 일반적인

가구수법을 이루고 있다. 처마는 홑처마이며,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경장각 



청절당은 서원의 강당으로, 원내의 모든 행사와 유림의 회합, 학문의 토론 장소로 사용되었다


동재 진덕재

동재는 서원에서 공부하던 원생들이 생활하며 잠을 잤던 동쪽에 위치한 건물이다.

진덕재 현판은 송준길 선생이 썼다.

서재 숭의재

서측의 숭의재와 동측의 진덕재는 영조와 고종 때 중·개수된 것으로 서원의 동·서재를 이루고 있다

정방

지금의 화장실로 뒷간 혹은 측간이라고도 부른다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된 청절당은 중앙에 정면 3칸, 측면 3칸의 대청을 두고, 좌우에 정면 1칸, 측면 3칸의 온돌방을

 하나씩 두었다. 이는 본래의 진원현(珍原縣) 객사를 1672년에 옮겨 온 것이라는 사실을 입증한다.

이 청절당은 장대석으로 마무리한 낮은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민흘림 두리기둥을 세웠는데, 기둥 위에는 주두를

 놓고 쇠서 하나를 내어 초익공식(初翼工式)으로 꾸몄다.

가구(架構)는 5량(五樑)으로 대들보를 앞뒤의 평주(平柱) 위에 걸고, 판대공으로 종도리를 받친 일반적인 가구 수법을

 이루고 있다. 처마는 홑처마이며,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우동사 문이 잠겨 있어 안으로 들어가 보진 못하였다.

4칸 반의 사우이다. 북벽에는 김인후를 동벽에는 양자징을 향사하고 있다. 

1957년 이 사우를 우동사라 현액하였다.



사우의 중앙에는 김인후의 위패가, 왼쪽에는 양자징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장판각에는 『하서집(河西集)』 구본 261판과 신본 311판을 비롯한 637판의 판각이 보관되어 있으며,

장서각에는 인종이 하사한 묵죽과 『하서집』 등 1300여 권의 책, 보물 제587호인 노비보(奴婢譜)

외 문서 69점이 소장되어 있다.

유물로는 벼루와 기준(奇遵)이 방문 기념으로 기증한 붓 등이 있으며, 재산은 전답 1만 2700평과 임야 10정보가 있다

경장각에 대하여 설명을 하시는 산대장님

전사청

제사에 필요한 물건을 보관하고 제사 지낼때 음식을 마련하던 건물이다


1.동방의 대학자 하서 김인후(金麟厚)
김인후(金麟厚) 1510(중종 5)~1560(명종15)
조선의 문신. 유학자. 자는 후지(厚之), 호는 하서(河西)·담재(澹齋), 김안국(金安國)의 제자로 성균관에

들어가 이황(李滉)과 함께 학문을 닦고, 1540년(중종35)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에 등용되었다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다. 후에 정자(正字)·박사(博士)·

설서(說書)·부수찬(副修撰)을 거쳐 부모의 부양을 위해 옥과 현령(玉果縣令)으로 나갔다. 명종이 즉위하고

 15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난 후에는 병을 이유로 고향 장성(長城)에 돌아가 성리학의 연구에 정진,

누차 교리(校理)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성경(誠敬)의 실천을 학문의 목표로 하고이항(李恒)의 이기일물설(理氣一物說)을 반대하여 이기(理氣)는

 혼합해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천문·지리·의약·산수·율력(律曆)에도 정통했다.

문묘(文廟)를 비롯하여 장성(長城)의 필암서원(筆巖書院), 남원의 노봉서원(露峰書院), 옥과(玉果)의

영귀서원(詠歸書院) 등에 제향(祭享), 시호는 문정(文正).하서 김인후 선생은 중종5년(1510년)

 이곳 장성군 황룡면 맥동리에서 태어나 명종15년(1560년) 51세를 일기로 별세한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유학자였다.

김인후는 8세에 조광조의 숙부(叔父)인 조원기가 전라감사로 있을 때 신동이라고 칭찬했을 정도로

 뛰어난 자품을 타고났다. 10세에 전라감사로 부임한 모재 김안국에게 소학을 배웠는데 김안국이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경기도 이천으로 귀향을 가자 18세 때까지 독학으로 사서오경을 공부하였다.

그러나이 무렵 태극도설에 정통하고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던 신재(新齋) 최산두(崔山斗)와 눌재(訥齋)

 박상(朴祥)이 기묘사화로 광주에 귀향하자 그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중종26년(1531년) 22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성균관에 입학하여 퇴계 이황 등과

 교류하였는데 퇴계와는 매우 돈독한 친교를 맺었다. 후일 퇴계가 "함께 교유한 사람은 오직 하서

한 사람뿐이었다."고 술회했을 정도다.

중종35년(1540년) 31세 때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에

등용되었으며, 이듬해에 사가독서(賜暇讀書)의 은전을 입게되어 선망의대상이었던 호당(湖當)에 들어갔다.

 호당에는 퇴계 이황을 비롯하여 박형수, 정유길 등 희대의 명사들이 13명이 있었는데 이들이

이때 교유하면서 사상적 토론을 하여 성리학 이론을 확립한 것이 조선 성리학 형성에 큰 자취를 남긴것이다.

 

중종38년(1543년) 34세에는 홍문관박사겸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이 되어 후에 인종(仁宗)이 되는 세자와깊은

 사제(師弟)의 연을 맺게 된다. 세자는 하서의 학문과 도덕에 깊이 감복하여 집에 직접 찾아가기도 하고

주자대전 한 질을 기증하기도 하였다.

 

1543년 6월에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으로 승진하여 기묘사림(己卯士林)들의 신원을호소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자 관직을 사퇴하고 향리로 내려갈 것을 청하였다. 12월 옥과현감을 제수받아 고향근처로 돌아왔다.

 

중종이 승하하고 제12대 인종이 즉위하자마자 불과 8개월만에 31세로 죽자 하서는 일체의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장성으로 돌아왔다. 그 후 인종의 기일이 되면 집 남쪽 산중에 들어가 종일토록

 통곡하고 돌아오기를평생을 한결같이 하였다. 하서는 순창 점암촌에 초당을 세우고 주자학

연구와 후학 양성에 몰두하였다.

 

48세 때에 주역관상편 (周易觀象篇)과 서명사천도(西銘事天圖)를 저술하였으며, 일재 이항과

고봉 기대승 등과 태극도설(太極圖說)을 놓고 논변을 하였다. 후에 퇴계와 고봉간의 사단칠정논변

(四端七情論辯)때 고봉의 이론은 하서와의 논변을 통해 정립된 이론이라고 보고 있다.


하서의 학문은 성리의 정학뿐만 아니라 천문, 지리, 의약, 산수, 율력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고 한다. 하서는 또 시문에도 능해 당대의 유명한 면앙정 송순과 교유하였으며

10여권의 시문집을 남겼다.



1560년 51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면서 인종에 대한 절의의 표시로 임종 후에도 옥과현감 이후의

 관직은 쓰지 말라고 유언하였다. 하서는 정조20년(1796년)에 문묘에 배향 되었으며 영의정에 추증하고

 문정(文正)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필암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남겨진 곳으로 호남의 대표적 서원이다.

이석수님 글에서

평생교육원

정면에서 바라본 필암서원



필암서원을 뒤로하고 고창 문수사로 간다

주차장에서 바라본 청량산

단풍나무 사이로 비치는 햇살


문수사는 전북 고창과 전남 장성과의 사이에 놓여 있는 청량산(621m)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고수면소재지에서 고수도요지를 지나 위로 올라가면 조산 저수지가 나오고, 왼쪽 골짜기를 타고 6km 정도

 포장길을 오르면 울울창창 숲이 우거진 산등 서향으로 문수사가 있다. 물이 맑고 숲이 좋은데도 인적이 드물어

 오염이 전혀 되지 않은 곳이다. 신라의 명승 자장율사가 당나라로 건너가 청량산에서 기도를 거듭한 끝에

 문수보살의 가르침을 받고 귀국한 후, 우연히 이곳을 지나다가 산세가 당나라 청량산과 흡사하여 문수산에 있는

 굴속에서 며칠간 기도하자 역시 문수보살이 나타나므로 이곳에 절을 지었다고 전하나, 지어진 시기는 확실치 않다.

지방유형문화재 제51호인 대웅전과 52호인 문수전이 있으며 기타 명부전, 한산전 등이 남아 있다. 대웅전은 소규모의

 건물로 맞배지붕이 특이하다. 우거진 녹음 사이로 계곡 물과 가을 단풍이 천년 고찰과 잘 어우러져 보는 이의

발길을 잡는다. 수령 100~400여 년 된 단풍나무 수십 주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고창 은사리 단풍나무숲은 청량

 입구에서부터 중턱에 자리한 문수사 입구까지의 진입도로 약 80m 좌우측 일대에 수령 100년에서 400년으로 추정되는

 단풍나무 500여 그루가 자생하고 있는 숲이므로 2005년 천연기념물 제463호로 지정되었다

문수사로 오르는 곳곳에 이렇게 우람한 단풍나무들이 즐비하다




아직 단풍이 들지는 않았지만 크고작은 단풍나무들이 길 양쪽에 수도 없이 들어서있다


천연기념물이라니 우리가 잘 가꾸고 보존하여 후대에도 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되겠지요



불이문











문수사 산신각

산신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이고 겹처마에 맞배지붕으로 만든 목조기와집이다.

 혹은 금륜전으로도 불리는데, 맞배지붕에 앞면 3칸, 옆면 1칸 규모로서 산신각 기능도 함께 한다.

산신각의 편액으로는 맨 오른쪽부터 ‘산신각’, ‘금륜전(金輪殿)’, ‘응향각(凝香閣)’의 세 개의 편액이 걸려 있다.

 이중 응향각은 현재 추사의 낙관이나 관지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추사체로 인지되고 있는 중요한 편액이다.

 내외부에 단청이 되어 있지 않고, 문짝은 ‘卍’자가 상하에 조각되어 있는 뛰어난 것으로 2분합이 3짝으로 되어 있다.

내부 천장은 우물반자이고, 마루는 우물마루이며 수미단 위에 아주 작은 형태의 석조불좌상이 선정인의

자세로 앉아 있다. 불화는 칠성탱, 독성탱, 산신탱의 세 가지라 봉안되어 있다. 이들 탱화는 전부 근래에 조성했다.

 


산신각 금수전 응향각

문수전

溪山 安秉煥씨가 시주하고

居巖 金奉官 씨가 글을 씀

거암 김봉관 편액은 고창 도솔암,무주 안국사, 덕유산 백련사에도 있습니다.

문수사 석조승형문수보살상

문수전 내부에 있는 문수보살상은 신라 자장율사의 전설이 얽힌 석불좌상으로서 문수사에서

 가장 영험하다는 보살상이다. 또한 이 문수보살석상은 일명 미륵보살상이라고도 한다.

 이 승형의 석조문수보살좌상은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181호로 지정되어 보호되어 있다.

이 보살상은 정중히 의자에 앉아 남향한 모습인데, 두 손을 모두 배에 얹었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보살상이라기 보다는 조사상(祖師像)일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얼굴과 머리, 수인의 형태가 보살상과는 너무나도 현격한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양식을 보면 두 어깨에 장삼을 걸치고 두 팔과 가슴에 옷주름이 나타나 있다.

머리는 민머리이며 두 볼이 두둑하고, 짙은 눈썹에 우뚝 솟은 코, 두툼한 입술은 매우 소박한 인상을 준다.

 두 귀는 얼굴에 비해 상당히 늘어져 있고, 짧은 목과 치켜올린 두 어깨의 뒷부분이 살이 쪄 보여 자비로운 모습이다.

 이 좌상은 수법으로 보아 고려 말 조선 초에 조각된 것으로 여겨진다.


문수사 만세루

만세루는 앞면 5칸, 옆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대웅전 앞 마당 건너에 남북간으로 길게

늘어서서 한산전 앞에까지 이르고 있다. 자연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세우고 두리기둥

위에 8각으로 짠 민도리집으로서 주심포 건물이며, 맞배지붕에는 풍판을 대지 않은 채이다.

 편액은 <문수사>가 붙어있고, 2분합씩 5쌍의 문짝이 세워져 있다. 마루는 우물마루로

짜여져 있고 기둥은 각기둥으로 평범하다. 이 만세루는 주로 법회장소로 사용되었다.

 


요사채


山寺

    - 고암 유종택

淸凉山에 막 들어서면

수십년 단풍나무가

청록 삿갓을 둘러쓴 채

육환장을 땅에 짚고

禪客을 맞이하네.

부서진 기왓장을 밟으니

까맣게 잊혀버린

高僧의 법문들이

천년 세월 변함없이
그날인양 향기롭네.
동백꽃 하니
모란꽃 念佛하고
수선화 參禪하니
영산홍 說法한다
장엄한 노을탱화
미륵불 오시려나.
淸凉山에 고이 있으면
박새 다람쥐 모두 모여
별빛 가슴 달빛 마음으로
바라춤 절로 추며
하루가 영겁이네.

 

 







여기도 어김 없이 단풍은 붉게 물들어 가고 조금있으면 나목으로 변하겠지


가을의 산국도 여기저기 피어있다

주차장 위에 무슨 기념공원인가 하고 올라가 보니 김해 김씨 기족묘를 이렇게 웅장하게 조성해놨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