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동 유적지 = 조선 왕조가 들어서자 '고려 후기 성균관 진사' 이오 선생이 고려 충절을 지키기
위해 거처로 정한 곳이다. 선생은 이곳에 고려 유민 거주지임을 뜻하는 '고려동학'이라는 비석을 세웠다.
현재 이 마을에는 '재령 이씨' 후손 30여 가구가 모여 살며 선조 뜻을 기리고 있다.
위치: 산인면 모곡리 580
마을 전체사진
모은(茅隱) 선생의 절의(節義)상징인 고려동(高麗洞)
‘고려동’은 고려말기의 절사(節士) 모은 선생이 둔적은거(遯跡隱居) 하면서 망복수의(罔僕守義)의 표적으로 삼은 마을 이름인데,
곧 지금의 경남 함안군 산인면 모곡리 장내동(墻內洞)이다. 모은 선생은 고려 사재령 이일선의 넷째 아들이다.
그는 일찍이 포은 정몽주, 목은(牧隱) 이색(李穡) 두 선생의 문하에 종유하면서 의리의 학문에 독실하여 당세의 사림에게
추앙을 받았었다.
공양왕 때 성균관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국운이 이미 쇠진함을 보고는 벼슬하지 않았으며, 이내 고려가 망하자 여려 현인들과
송도 교외의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서 망복수의의 결의를 표명하고는 남쪽으로 내려와서 함안군의 모곡리에 터를 정해
은거 하였다. 그는 자신이 끝까지 고려왕조의 유민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자기 복거지(卜居地) 주위에 담장을 쌓아 이 담 밖은
신왕조(조선왕조)의 영토이지만 담 안은 고려유민의 거주지인 ‘고려동’ 임을 명시하여 망복수의의 표적으로 삼았던 것이다.
후에 조선 태종 때 여러 번 나라에서 불렀으나 끝내 출사(出仕)하지 않았으며, 또 항상 그의 아들 개지(介智)에게 경계하기를
“너도 또한 고려왕조의 유민이니 어찌 신왕조에 벼슬할 수가 있겠는가. 내가 죽은 후에는 절대로 신왕조에서 내려주는
관명은 사용하지 말고, 또 내 신주도 이곳 ‘고려동’ 담 안을 떠나 다른 곳으로 옮겨가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그의 유명에 따라 아들 개지는 끝내 벼슬하지 않고 한평생을 마치었다.
고려가 망하자 함안의 충절 모은(矛隱)도 처음엔 두문동으로 들어갔으나 만은(晩隱) 홍재(洪載), 전서(典書) 조열(趙悅)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갈 것을 결심하였다. 이윽고 함안 땅 모곡(矛谷)에 이르러 자미화(紫薇花)가 만발한 곳을 보고는 길지로 생각하여
평생 살 곳으로 정하였다. 일명 배롱나무라 부르는 자미화는 여름철이면 백일동안 꽃을 피우므로 백일홍이라고도 하는데
그 모습이 한결같은 선비의 일편단심을 상징하기에 선비들이 집안에 즐겨 심었던 나무이다.
이다리 밖에는 조선땅 다리 안에는 고려땅 안에는 자급자족할 수 있는 땅 3천평을 마련 경작했다고함
고려가 망하자 선생은 여러 현인들과 송도의 두문동에서 망복수의(罔僕守義)의 결의를 표명하고 남쪽으로 내려와
거처를 찾던 중, 산간벽지에 띠만이 우거진 숲 속에서 백일홍이 만발한 것을 보고 그 자리에 마을의 터전을 일궜다.
그 자리는 오늘날 자미단(紫微壇)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율간선생(모은선생 아우) 승수지 .모은선생 유적처 안에는 자미단 사적비
이오는 끝까지 고려의 유민임을 나타내기 위해 은거지 주변에 담을 쌓아 밖은 조선의 영토라 할지라도 안은 고려 유민의
거주임을 명시하는 ‘고려동학(高麗洞壑)’이라는 표비를 세웠다. 여기서 ‘담안’ 또는 ‘장내’라는 마을이름이 유래되었다.
이오는 세상을 뜰 때까지 조선에 벼슬하지 않았다. 아들에게도 신왕조에 벼슬하지 말 것과 자신의 신주를 이 곳을 떠나
딴 곳으로 옮기지 말도록 유언하였다. 또한 담 안에 주거를 만들고 우물을 파 전답을 개간하여 자급자족할 수 있는
후손들의 터를 만들었다.
자미정이란 현판이 보인다
선생의 유언을 받든 종손들은 19대 600년에 이르는 동안 이 곳을 떠나지 않았고 이에 고려동(高麗洞)이라는 이름으로
오늘까지 이어왔다. 현재 이 마을에는 30호의 후손들이 재령이씨(載寧李氏) 단성의 동족마을로 그 순수성을 지켜가고 있다.
마을 안에는 고려동학표비(高麗洞壑表碑), 고려동(考慮洞)담장, 고려종택(高麗宗宅), 자미단(紫微壇), 고려전(高麗田) 30,000여 평,
자미정(紫微亭), 율간정(栗澗亭), 복정(鰒井) 등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건물들이 6.25동란 때 소실되어 이후 재건된 것이다
현재 주택으로는 호상공의 생가로 알려진 주택이 유일하게 동란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도
200년을 넘지 않았다. 자미정을 포함하는 종가는 비교적 정교하게 재건되긴 했지만 조선 초기의 모습을 찾기는 어렵다.
[Daum백과] 고려동유적지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자미단
후손들은 이곳에서 선조의 유산을 소중히 가꾸면서 살았다. 뿐만 아니라 벼슬보다는 자녀의 훈육에 전념하여
학덕과 절의로 이름 있는 인물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선생의 손자 때부터는 조선의 조정에 벼슬을 하였다.
조선 건국 이후에 태어났으니 조선의 백성이라는 이유에서다.
조선왕조의 정권이 안정되자 장손 이맹현은 세조 때 출사하여 벼슬이 홍문관 부제학에 이르니 나라에서 서울에
제택과 향사를 동생인 율간(栗澗) 이중현(李仲賢)에게 맡겼으며, 후에 율간의 장자 이순이 김해로 이주하게 되자
그 또한 선대의 종택과 향사는 그 아우인 이무에게 맡겼다. 이후로 종택은 이무의 후손에 의해 지금까지 대대로
거주해 내려오고 있다고 전한다.
경모당
우죽헌
이곳은 두문동에서 함께 남하하여 군북에 복거하였던 전서 조열과 합천의 만은 홍재와 더불어 담장 밖
자미단에 백일홍이 피면 그것을 바라보며 시화를 나누던 곳이라 한다. 자미정은 6.25때 공비의 잔당을
없애려는 아군에 의해 불타버린 것을 옛 주춧돌위에 복원한 것이라 한다.
안채
모은선생의 시
밤마다 바다에서 떠오르는 외로운 달을 맞이하고
해마다 구기자·국화 심을 작은 밭을 개간하네
끝내 돌아봐도 요순시대 만날 수 없으니
소먹이 나무꾼 동무됨을 만족하게 여기려 하네
패망한 고려의 백성으로 나라를 생각하며 고려동에서 농사짓고 사는 것을 만족하게 여기는 선생의 평소 절개와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시가를 듣고 사람들은 선생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옛날 은(殷)나라 백이(伯夷),
숙제(叔齊)의 채미가(採薇歌)와 기자(箕子)의 맥수가(麥穗歌)에 비하였다고 한다.
한이정 선생의 글에서
곡간(창고)
곡간문도 장석으로 다른곳에서는 보지 못했던 형식이다
아래채
사당인가 본데 굳게 문이 잠겨있다
장독대도 4각으로 담장을 친 모습
모계정사
모계정사의 청간문
율간정
화청문
회천정사
고려동의 종택까지 돌아보고 모은 선생의 충절을 다시 한 번 새기며 나오는 길에 고려동의 풍수를 살피기로 했다.
전설이야 자미화를 보고 터를 잡았다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설화에 불과하고 진사시에 급제한 선생이 풍수를
몰랐을 리가 없다. 무엇을 보고 이곳을 평생 은거지로 삼은 것일까.
고려동 장내마을의 진산은 자양산(紫陽山 401.8m)이다. 동으로 출맥하는 낙남정맥이 함안에 이르러 칠원면과
산인면을 경계 짓는 용맥하나를 서북으로 내려 보내는데 기복을 거듭하던 지맥이 솟구쳐 오른산이 자양산이다.
이 지맥은 장내마을의 청룡이 된다. 물결치듯 꿈틀거리는 완연함이 생기가 넘치는 모양이다.
다시 진산에서 서남으로 비스듬히 뻗어 내린 용맥이 백호를 이룬다. 백호는 준거한 모습이다. 청룡과 백호가
감싸는 가운데에 고려동이 자리 잡고 있다.
전형적인 와혈(窩穴)이다. 안산은 한 쪽으로 기울게 솟은 매봉이 되고 몇 개의 봉우리가 모여 주작을 이룬다.
안산의 모양이 혈을 배반하는 형국이다. 더구나 매봉의 낮은 과협 사이로 멀리 규봉(窺峰)이 보인다. 옥의 티다.
다행인 것은 마을 입구에서는 규봉이 보이지만 고려동 안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주산인 현무봉의 형상은 둥그런 금성산이다. 노적가리봉이라고도 하며 재물발복을 상징한다.
둥글고 후덕한 모양이 혈에 부드러운 지기를 내려보내고 있다.
한이헌 선생 글에서
고려동의 외당수는 멀리 익산 쪽에서 발원하여 흘러내리는 신산천이 검암천을 만나 마을 앞 벌판을 적시고
다시 함안천과 합류하여 남강으로 흘러드는데 그 모양이 마을을 감싸는 궁수를 이루어 마을에 풍요를
안겨주는 길수이다.
내당수는 고려동의 동쪽에서 자미단을 지나 흘러내리는 물줄기와 서편 마을 한 가운데를 지나며 흐르는 물줄기가
솟을대문 바로 앞에서 만나 합수되어 마을을 빠져나간다. 두물머리 명당으로 부자가 많이 나는 행주형국이다.
남해고속도로가 지나가는 부근에서 마을의 형국을 정면으로 잡아보니 풍수형국은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이다.
청룡과 백호 사이로 내려온 내룡은 닭의 머리가 되어 장내마을에 이르러 다소곳이 머리를 숙였다. 고려동은 내룡의
끝자락에서 백호쪽으로 기울어 자리를 잡았다. 봉황이든 금계이든 포란형의 국세에서는 날개죽지 쪽이 혈처가 된다.
이는 새가 알을 품을 때 날개깃을 모아 품기 때문이다. 더구나 오른쪽은 새가 날아오를 때 먼저 훼를 치는 쪽이 아닌가.
그런데 종택의 좌향을 보면 남향이 아니고 서쪽으로 약간 기울은 남서향이다. 간좌곤향(艮坐坤向)이다. 풍수언에
간좌곤향은 부자가 많이 나는 좌향법이다. 이렇게 좌향을 틀어 배치하고 위치마저 마을의 안쪽으로 비스듬히
들어와 앉힌 종택에서는 안산이 매봉이 아니고 백호자락이 된다. 고려동의 종택이 마을의 안산을 마주하지 않고
안쪽으로 돌아앉은 것은 정면에 있는 매봉을 피하기 위함이다.
매는 닭의 천적이다. 따라서 금계포란형에서는 매가 병아리를 채어가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 병아리는
사람에게는 후손이 된다. 모은 선생은 고려동 축조 당시에 이런 풍수형국을 이미 간파하고 혈처를 배반하는
모양의 안산인 매봉을 피하여 종택의 좌향을 잡았던 것이다.
모은선생이 풍수의 고수라는 확실한 증거가 하나 더 있다. 선생이 평소에 기거하였던 자미정의 뒤뜰에는
작은 연못이 하나 있다. 일반적으로 연못은 집의 앞에 조성하는 것이 기본이다. 그런데 이런 일반적인 원칙을
어기고 특이하게도 자미정의 연못은 뒤뜰에 있다. 이것은 매봉으로부터 혈을 보호하기 위한 비보책이다.
명당 앞에 고이는 연못의 물은 재물을 뜻하며 고인 물의 양만큼 재물이 쌓인다는 풍수언이 있다.
따라서 후손들의 양식이 매봉에게 탈취당하지 않게 하려면 집 뒤에 숨기는 것이 제일이다. 이것이 자미정의
연못이 뒤뜰에 조성하게 된 이유이다. 이렇게 기발한 풍수비보책은 풍수의 고수가 아니면 구사할 수 없지 않겠는가?
자미정 뒤뜰의 연못은 네모지게 만들었다. 그 안에 조성한 섬도 네모난 모양이다. 전통가옥에서 정원을
꾸밀 때 네모난 연못에 둥근 섬을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다. 연못에 섬을 만드는 것은 신선사상에서 유래하는데
섬은 신선이 사는 곳을 상징한다.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 하여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 따라서 네모난
연못은 땅을 나타내고 둥근 섬은 하늘을 상징한다. 즉 땅 위에 우주를 담았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가끔은 이렇게 네모난 섬을 꾸미는 경우도 있다. 강원도 강릉의 선교장 정원에도 네모난 연못에 네모난 섬을
조성해 놓았다. 이럴 경우의 의미는 네모난 땅 안에 또 다른 땅을 담았으니 하늘이 아닌 땅 중의 땅, 즉 이 땅위의
이상세계를 구현한다는 의미가 된다. 이는 조선왕국 속의 고려성지, 즉 고려동학을 뜻하는 것이다. 풍수를 통해
나타내고자 했던 모은의 숨은 정신이 살며시 엿보이는 순간이다.
한이정 선생글에서
모은은 고려동을 지으면서 먼저 둘레에 담장을 쳤다. 그리고는 약 3천평 정도 되는 고려전(高麗田)을 조성하여
여기에도 담장을 두르고는 이를 터전삼아 생계를 유지하면서 담장 밖에서 들어오는 일체의 것은 조선왕조의
것이므로 먹지 않겠다 맹서하였다.
고려동학(高麗洞壑)의 의의
세계역사를 살펴보더라도 한 왕조가 600년을 지속하기는 정말로 어려운 것이다. 고려왕조가 475년, 조선왕조가 519년,
미국의 건국역사도 200여년에 불과한데, 하물며 민가에 있어서는 어떠하겠는가?
600년 동안이나 조상의 정신을 계승하여 본지(本支)가 서로 이어가면서 고적(古蹟)?유사(遺事)를 최대한 옛 모습그대로
유지하였을 뿐 아니라, 중간에 끊어짐 없이 대대로 지키고 있다는 사실은 그 유례가 없다. 또한 이 고려동학을 유림에서는
‘재령이씨 세장지(載寧李氏世庄地)’라 한다. 이 세장지를 일족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고려 절신(節臣)이 살던
오랜 역사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또 집집마다 있는 주춧돌, 흔하게 야생하는 자미수(紫薇樹) 한 그루, 문중마다
있는 정자, 오래된 곳이면 흔하게 전설 같은 곳도 있을 수 있는 복정(鰒井)의 고사(故事)에 그치는 것도 아니며,
종가를 지켜온 이들 모두가 충효, 문장, 도덕으로 한 시대에 사표가 될 만한 인물들이었다는 데에 연유가 있다.
이를 뒷받침할 만 한 증거는 선현들의 유집(遺集)을 정독해보면 누구나 수긍할 수가 있다.바람산님글에서
상의문
모은선생 경모비
또한 마을 입구에는 고려동학(高麗洞壑)이라는 비석을 세워 이곳이 고려의 영역임을 나타내었다.
이로써 천하는 조선의 땅이지만 고려동만큼은 고려의 세상이 된 것이다.
'경남.울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표충비각과 남계서원 (0) | 2018.12.22 |
---|---|
함안 무진정과 무기연당 (0) | 2018.12.17 |
함안 악양루와 말이산 가야고분군.함안 박물관 (0) | 2018.11.05 |
밀양 구절초와 영남루 (0) | 2018.10.31 |
북천 코스모스 축제 (0) | 2018.10.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