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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울산

표충비각과 남계서원

10월중순에 다녀왔는데 이제야 올립니다

        삼비문

                   표충비는 '삼비(三碑)라고도 부르는데요

                      그 이유는 비석에 세가지 내용이 담겨있기 때문이지요.

                   (1)  비석의 정면에 씌어있는 '송운대사영당비명병서(松雲大師影堂碑銘幷序,)

                         - 사명대사의 행적과 임진왜란 때의 활약을 기록한 거구요

                   (2) 뒷면의 '서산대사비명(西山大師碑銘)

                         - 서산대사의 공덕과 기허대사의 사적을 적은 거구요

                   (3) 측면의 '표충사사적기(表忠祠事蹟記)

                        -  표충사의 사적을 담고 있기때문 이라고 합니다.






이 향나무는 마치 큰 우산을 펴 놓은 듯 독특한 모습이네요


 



높이 380cm   비신이 275cm   넓이 98cm   두께 56cm 로  그 모습이 장중합니다.

                   몸체는 재질이 검은색의 대리석이며  받침돌과 머릿돌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져 있어요

                   홍살문이 촘촘하게 짜여져 있어서  비석의 사진찍기가 매우 힘들어요


             (1)사명대사는 스승인 서산대사의 입적후 지금의 무안면 중산리에 백하암이라는 

                   조그마한 암자를 지어 지냈다고 합니다

             (2)그후 사명대사가 입적한 뒤 백하암에 표충사(表忠祠)라는 사당을 지어

                 사명대사를 제향하였습니다.

            (3) 병자호란 후 사당이 퇴락하자 숙종 36년(1710) 밀양부사 김창석이 나서서

                 사명대사의 영정을 봉안하는  영당을 짓고 규모를 넓혔습니다

            (4) 이에 사명대사의 법을 이은 5대 제자 남붕대사가  나라로부터'표충서원'

             이라는 사액을 받는 한편, 사당어귀인 현재의 자리에 비를 세우게 되는데요.

 

           (5) 그 뒤 헌종 4년(1838) 표충서원은 사명대사의 8대 법손인 천유대사의 주도로

               밀양재약산 아래 유서깊은 영정사(靈井寺)로 옮겨가고 표충비만 지금의 자리에 남게 되었지요.

          (6) 함께 있던 표충서원이 이전 된 후 덩그러니 남은 표충비를  보호하기 위하여

              비각이 세워지고 주변 영역이 넓게 정비되면서 오늘의 표충비각으로  탄생한 것입니다.

        (7) 한편, 천유대사가 표충서원을 옮겨간 영정사는 이를 계기로 '표충사'라는

            이름으로 바꾸게 되는데요,  지금의' 밀양 표충사'가 그것입니다.

 전지현님 글에서



표충비각 앞에는 오래된 느티나무가 단풍이들기 시작하여 볼만하다


                                                   


언제부터인가 남계서원을 한번 와보고 싶었는데 드디어 오늘 부근을 지나 게 돼서

들려보았다

문은 굳게 닫혀 있어서 한바퀴 돌아보는데 관리동에 사는 사람이 있는 듯하여  들어가니

인기척은 없고 서원쪽 문이 열려 있어 들어갈 수가 있었다


정문을 안내문에는 숭덕문이라 했는데 현판은 상덕문이라 했으니 어느것이 맞는지?


   남계서원에 모시는 분은 고려 고종 때 재상이었던 김지대(金之岱)이다. 그는 고려 원종 때(1266) 졸 한 것으로

 지금부터 738년 전 인물이다. 김지대의 행적에 대해서는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에 기록이 있다.

  고려사에는 열전(列傳) 난에 공명정대하다는 인물로 설명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신라 말기부터 고려,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유명한 詩와 文을 수록산 동문선(東文選)에는 그의 유명 시 몇 편과

산문이 실려 있는 것을 보기도 한다. 그는 고려시대 고급관리이면서 시문에 뛰어난 유학자였다.

 특히 그는 당율시(唐律詩)에 고려조에서 1인자라는 평을 받았다. 당율시는 중국 당나라에서 유행하였던 시체였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칠언율시가 그것이다. 그는 시문에 뛰어나기도 하였지만 재상으로서 명재상

이였다는 평가도 받았다.



충효가와 내삼문인 대보문

제사를 준비하고 대기하는 곳을 전사청이라 한다

대보문

남계서원

이 서원은 조선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한동안 문을 닫기도 하였다. 남계서원이란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은

 그 서원 앞에 내가 흐르고 있다고 해서 작명된 것이 아니고 유명한 유학자 주희(朱憙)가 살았던 곳인

남계의 지명을 따서 붙인 것이다. 주희는 주자(朱子)를 말한다. 주자는 동양에서 성리학의 대가이다.

오늘날 유학은 이 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청도면은 원래 청도군에 속했지만 일제치하 밀양군으로

 편입된 것이다. 그리고 김지대는 청도 김씨의 최초 조상 즉 시조이다. 대동여지도를 제작한 고산자(古山子)

 김정호와 천재시인 김소월(청도 김씨에서 분파된 공주 김씨로 본관이 바뀜)이 그의 후손 중 한사람이다.

강당인 쌍수당


촉석루를 김지대가 진주목사를할때 지었다고하며 지금도 김지대의 시가 걸려 있가고 한다

서원의 강당 방문이 이렇게 정교하게 잘 만들어져 있다

김지대선생과 5세손 오산군 한귀와 7세손 호강공 점을 같이 배향한다고 한다

남계서원(南溪書院)은 밀양 지역에 소재한 유명 서원의 하나로 조선 숙종 28(1702)에 지역 유림들에 의해

세워졌던 것으로 배향 인물은 청도김씨의 시조 영헌공 김지대조선 태종조 권신 호강공 김점(호조. 형조판서)이다.

영헌공 김지대는 고려 고종 때 명신으로 고려사 열전에 상술되어 있는데 유명 시인이며 청백리로도 알려져 있다.

이 두 인물에 대한 향사가 매년 청도면 두곡리 소재의 서원에서 밀양유림들에 의해 올려지고 있다.

금년은 오는 414(목요일) 향사를 준비하고 뜻있는 분들의 많은 참례를 주최측은 바라고 있다.

남계서원이라고 하면 충효쌍수(忠孝雙修)의 전당으로 알려져 있는 것으로 이 말의 뜻은

<나라에 충성하는 것과 부모에 효도하는 것은 다 같이 해야 의의가 있다>하는 것이다

강의제

 학생들의 기숙사 같은 곳

원청재

학생들이 기거하는 기숙사와 같은곳

산수유가 빨갛게 익어가는 모습

함양에도 남계서원이 있는데 여기는 일두 정여창선생을 모시는 곳이다

경북군위에도 남계서원이 있는데 여기는 유성룡 선생을 모시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