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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울산

사명대사 유적지와 노무현 전대통령 묘지



사명대사 유적지는 밀양시 무안면 고라리 399번지에 소재하는데 생가 터와 유적지로 구분된다.

생가 터와 유적지는 작은 길을 사이에 두고 마주해 있다. 유적지에는 상징광장, 사명대사 기념관, 추모마당, 수변광장이 있다.


밀양 출신 사명대사의 호국정신과 애민애족의 숭고한 얼을 기리기 위해 1999년부터 2006년까지 부지 면적 49,146m2

사명대사 동상과 사명대사 기념관, 추모공원 기념비 등을 조성하여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유적지 및 생가

복원사업은 2006년 4월 7일 완료되었다

비 뒤쪽 검은 부분은 어명을 받아 포로로 잡힌 백성들을 구하러 일본에 가는 사명대사 행로를

그린 그림을 조각해 놓았다


우리 대사의 가르침은 온 세상을 구제하는 것이지만

자기 몸으로 돌아와서는 물병과 밥그릇 한벌 뿐이오

세상에 나아가서 사용하면 국위를 크게 선양하게 된다

이제 이 돌에 새기노니 거룩한 공덕 천년만년 밝게 나타나리라.

 


입구에 송운대사구택 현판(사명대사)


사랑채


안채 육영당 모습


이곳 생가지에는 사명대사계서 생전에 사용하셨던 물품 그대로 보존 보관되어 있습니다.


외부에서 바라본 사명대사 생가 전경

분충서난문 - 충성을 분발하여 난을 잠재운다는 깊은뜻

숙청사 대문채 사명대사 위패를 모신곳 입니다.




충의문 (외삼문)

"사명대사" 법명:유정( ) (1544∼1610) 사명대사의 본명은 임응규이다.

 

풍천 임씨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승려로서 국가가 위기에 봉착하자 분연히 일어나 왜병에 대항하여

전공을 세운 사명대사(四溟大師)인데, 그는 자순의 6세손으로 본명은 응규(應奎), 법명은 유정(惟政)이며

형조판서를 지낸 수성(守成)의 둘째 아들이다.

경상남도 밀양출신이며,  1558년(명종 13)에 어머니가 죽고, 1559년에 아버지가 죽자 김천 직지사(直指寺)로

출가하여 신묵(信默)의 제자가 되었다.그뒤 직지사의 주지를 지냈다고 합니다.

밀양시는 2006년 4월 무안면 고라리 4만9146제곱미터에 83억700만원을 들려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한 사명대사를 기리는 유적지를 개관했다 유적지에는 사명대사의 기념전시관, 충의문,

사명대사 동상, 정침, 사랑채, 사당채 사명대사 생가지, 주차장 2개소 등이 조성돼 있다.


어명을 받아 포로로 잡힌 백성들을 구하러 일본에 가는 사명대사

승병장으로 일본군을 무찌르는 사명대사 모습



사명대사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스승인 서산대사의 뜻에 따라 서산대사의 휘하에 들어가 승병을

 모집하고 조직했다. 승병을 이끌고 명나라 군과 협력하여 평양성 수복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 기여했다.

사명대사 가계도

아버지 임수성(任守成)과 어머니 달성 서씨(達成徐氏)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나다.

 







대마도로 간 사명대사

 





사명대사 동상


난세에 영웅이 난다 했던가 바로 이분이 사명대사 유정이다

1604년 2월 오대산에서 수행 중 스승 休靜(휴정)의 부음을 받고 妙香山(묘향산)으로 가던 중 宣祖(선조)의 부름을

 받고 급히 조정으로 가서 일본과의 강화를 위한 사신으로 일본을 다녀오라는 임명받았다.


1604년 8월 일본으로 가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덕천가강)]를 만나 8개월 동안 능숙한 수완과 외교적

 노력을 하여 성공적인 외교성과를 거두었고, 전란 때 잡혀간 3,500 여명의 동포를 데리고 1605년 4월에 귀국하였다.

그해 6월 국왕에게 복명하고 10월에 妙香山에 들어가 비로소 休靜의 영전에 절하였다.


그 뒤 병을 얻어 海印寺에서 요양하다가 1610년 8월 26일 마지막 설법을 하고 결가부좌한 채 입적하였다.

제자들이 다비하여 홍제암(弘濟庵) 옆에 부도와 비를 세웠다.


일본에 갔을 때 도쿠가와 이에야스[德 川 家 康](1542-1616) 는 일본 전국을 통일하고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 할 때인데, 먼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사명대사를 조롱하는 시를 보냈다.

石上難生草

房中難起雲

汝彌何山鳥

來參鳳凰群

돌위에는 풀이 나기 어렵고

방안에는 구름이 일어나기 어려운데

그대는 어느 산의 이름 없는 새이기에

감히 봉황이 노는 무리 속에 찾아왔느냐

그 시를 보고 四溟大師는 즉석에서 붓을 잡고

我本靑山鶴

常遊五色雲

一朝雲霧盡

誤落野鷄群

나는 본래 청산의 학이어서

항상 오색찬란한 구름 위에서 놀았는데

하루아침에 구름과 안개가 사라져서

들닭 무리속에 잘못 떨어졌다.


상대의 위세에 위축됨이 없이 肺腑(폐부)를 찌르는 名文을 즉석에서 지은 것을 보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감탄하며 고개를 숙였다고 한다.그리하여 대가사 보통사람이 아니고 큰 인물임을 안 도쿠가와는 회담을

 순조롭게 진행시켜 조선인 포로 3500명을 조선의 품으로 돌려보냈다.



밀양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데 길을 착각해 지방도로로 들어와 봉하마을 부근을 지나게 돼서

노무현 전 대통령 묘소를 둘러보고 왔다

예전에 업무차 이부근을 한달에 한번씩 몇년을 다녔는데 정작 들어갈 기회가 없었다



진영 봉하마을과 고 노무현 대통령 생가
진영 봉하마을은 진영읍내에서 동부쪽으로 4.5km 떨어진 봉화산(해발 140m) 아래에 위치하고 있으며 진영단감과

 벼농사를 주로 하고 있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봉화산(烽火山) 봉수대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봉하(烽下)마을"이라고 불리고 있으며, 봉화산에는 봉화사란 절과 옛날에 도둑이 많이 나왔다고 하여 붙여진

도둑돌(봉화산 동쪽)과 여우가 엎드려서 꼬리를 돌아본다하여 복고고미형의 야시골(봉화산 서쪽)이란

두개의 유명한 골짜기가 있다




생가지를 둘러보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살던집은 4시반부터 개방을한다기에 안내문만 읽어보고 묘지로 향했다




여민정

시민과 함께하는 쉼터 라는 뜻으로 공원 안내 및 프로그램 정보등을 제공하는 방문자 센터이다


앞에 묘소가 보입니다


묘역에 들어서면 여러사람들이 모여서 같이 분향하고 묘역을 돌아보는데 분향소에서

내가 대표로 분향을하고 묘역을 돌아본다


위에 바위가 부엉이 바위인줄 알았는데 여기는 사지바위 봉수대라고 한다

조금 아래에 있는 바위가 부엉이 바위라해서 밀려온 사진이다







대한민국의 제16대 대통령이다. 군사독재 정권 치하에서 인권변호사로 맹활약하며 양심수·노동자의 인권옹호와

권익신장을 위해 헌신했으며, 한국 민주주의의 분수령인 6월민주화운동(1987)의 주요 지도자로 활약했다.

 42세 때 정계에 입문한 뒤 민주민족세력의 정치적 대변자, 노동자·농민·도시영세민 등 사회적 약자의 권익옹호자,

 군사독재의 유산인 영·호남간 지역대립 극복을 위한 동서화합의 전도사를 자임하며 남다른 정치 역정을 걸었다.

 풀뿌리 민주주의의 열렬한 신봉자이자 한국 사회의 비주류를 대표하는 정치인으로서 2002년 21세기 첫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며 한국 정치사에 큰 획을 그었다. 퇴임 후 정치활동을 접고 고향 김해의 봉하마을로 내려가

생활하다가 재임중 친인척 수뢰 혐의로 검찰의 수사를 받던 중 사저 뒷산에서 투신하여 서거하였다. 다음백과에서



풀뿌리 민주주의의 열렬한 신봉자이자 한국 사회의 비주류(非主流)를 대표하는 정치인으로 알려졌다.

초기 생애

노무현은 8·15해방 이듬해에 경상남도 김해군 진영읍 본산리 봉하마을에서 빈농의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가난한 환경은 향학열을 자극하는 한편 사회적 불평등에 일찌감치 눈을 뜨게 만들었으며, 가정교육을 통해

불의에 대한 저항감을 물려받았다. 입학금이 없어 외상 입학한 중학교 1학년 말, 제4대 정·부통령 선거

(3·15부정선거, 1960)를 앞두고 집권자인 이승만의 생일을 기념하는 교내 글짓기 대회가 열리자 그는 백지동맹을

 선동하다 정학(停學)을 당하기도 했다. 이후 가세가 더욱 기울어져 한 해 휴학한 뒤 장학금을 얻어 가까스로

 중학교를 마쳤으며, 지방 명문이던 부산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해 장학생으로 마지막 학업을 마쳤다.

이후 농업협동조합 입사시험에 낙방하고 한 어망 제조업체에 취직해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으나,

 최저생계비에도못 미치는 저임금과 발등을 다쳐도 치료비조차 주지 않는 고용주의 비정함에 실망해

 곧 직장생활을 포기하고 막노동판을 전전하며 사법고시 공부에 매달렸다. 고시 준비생 시절 사상범

 권오석의 딸 권양숙과 결혼(1973)했으며, 1975년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사법연수원을 거쳐

 1977년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발령받았으나 이듬해에 법복을 벗고 부산에서 변호사로

 개업해 세무·회계 전문 변호사로 명성을 쌓았다.

인권변호사 활동

1981년 전두환 정권의 대대적인 반정부세력 소탕작전에 따라 부산지역의 민주인사 22명이 무더기로 구속된

이른바 부림사건(釜林事件)은 노무현이라는 열정적인 인권변호사의 출현을 알렸다. 약 3개월간의 구금과 모진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학생운동가들과의 만남은 치열한 시대정신과의 만남으로 이어졌으며, 그의 삶에

 일대 전환점이 되었다. 그는 동료 인권변호사들과 함께 이 사건이 조작되었음을 지적하고 군사독재 정권의

전가의 보도인 국가보안법에 대한 재평가를 재판부에 요구했다

1987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으로서 6월민주화운동을 이끌었으며,

같은 해 8월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평화시위 도중 경찰의 최루탄에 희생된 거제도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 사망 사건을 수습하다 제3자 개입, 장식(葬式)방해 혐의로 구속되었다.

 여론의 강한 반발에 힘입어 20여 일 만에 풀려났으나, 변호사 업무정지처분이라는 정치 보복을 당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그는 대중적 지도자로 발돋움했다.

그러나 그 해 12월, 12·12사태(1979)로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 출신의 노태우 민주정의당(민정당) 후보의

 당선으로 귀착된 제13대 대통령 선거는, 전국의 거리를 뜨겁게 달구었던 6월민주화운동은

 물론 이 운동의 야전사령관 격이었던 그에게도 찬물을 끼얹었다.

정계 입문

이듬해(1988) 4월 그는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의 권유로 제13대 총선을 통해 정계에 입문했다.

 박해받는 노동자·농민·도시영세민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서는 의회에 진출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었다. 그는 다른 정치인들이 낙선을 우려해 맞대결을 기피하던 신군부 실세

 허삼수 민정당 후보의 대항마를 자청해 부산 동구에 출마, 승리함으로써 화려한 정계 입문 의식을

 치렀다. 이어 같은 해 11월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된 국회 제5공화국 비리 특별조사위원회

청문회에서 일약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그는 장세동 전 국가안전기획부장, 안현태 전 청와대 경호실장, 이종원 전 법무장관,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등을 상대로 한 증인신문에서 차분하고 논리적인 질의와 치밀한 추궁으로 이들의

 습관성 '기억상실증'과 위증(僞證)·발뺌에 쐐기를 박으며 궁지에 몰아넣어 국민들의 환호를 받았다.

불굴의 정치 역정

그러나 국민적 각광을 받는 이른바 '청문회 스타'가 된 그에게 보수적인 정치·언론 풍토는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옹호하며 "사람을 위해 법이 있는 것이지 법을 위해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다

"(1987. 12 현대중공업 파업 현장에서 행한 연설)고 한 발언으로 언론의 포화를 맞은 그는 1989년초 국회

 5공비리·광주특위 증인 출석을 둘러싼 정부·여당의 집요한 방해 책동에 항의해 의원직 사퇴서를 냈다가 이를

 다시 거둬들였다.


1990년 1월 노태우 대통령의 집권 민정당, 김영삼의 제2야당 통일민주당, 김종필의 제3야당 신민주공화당 간의

이른바 '3당합당'은 여소야대(與小野大)의 민주화 국면을 일거에 뒤집고 국민을 호남 대 비호남이라는 '2개의

국민'으로 갈라놓았다. 그는 이를 민주화운동에 대한 배신으로 규정해 부산·경남의 정치적 맹주인 김영삼과 결별했다.

 그는 3당합당을 거부한 일단의 통일민주당 의원들과 함께 소수야당 민주당을 출범시켰다.

이후 1991년 지방의회 선거에서 야권이 참패하자 제1야당인 신민주연합당(평민당의 후신)과의 통합을 성사시켜

 통합야당 민주당의 대변인, 부총재로 활약했으며 1992년 제14대 총선에서 부산 동구에 출마해 허삼수 민자당

 후보와 재대결했으나 강한 지역감정에 밀려 재선에 실패했다. 그의 패배는 1995년 부산시장

선거에서도 그대로 재연되었다.

그의 좌절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제14대 대통령 선거(1992)에서 김영삼 집권 민자당 후보에게 패한 뒤 정계를

은퇴했던 김대중이 지방의회 선거 직후인 1995년 9월 정계에 복귀해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자 그는 이를 야권분열로

 규정하고 김대중과 결별했다. 보스 중심의 줄서기와 이합집산을 거부한 결과 그는 이듬해 제15대 총선에서 민주당 공천으로

서울 종로에 출마했으나 다시 낙선했다.이후 지방자치실무연구소를 설립해 풀뿌리 민주주의를 본격 연구하며 자신의

지방분권 철학을 다듬었다.

15대 대통령 선거(1997)를 앞두고 자신이 속한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 구성원들의 의견이 엇갈리자

정권교체를 명분으로 김대중의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류해 '50년 만의 첫 여야 정권교체'를 이끌었다.

이듬해 서울 종로 보궐선거를 통해 6년 만에 원내입성에 성공했으며, 평생의 꿈인 동서통합을 실현하기 위해

제16대 총선(2000)에서 부산 북-강서 을에 출마했으나 또다시 낙선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이를 계기로

최초의 정치인 팬 클럽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노사모)이 결성되었다.

이후 그는 해양수산부 장관(2000. 8~2001. 3)을 역임하며 행정가로서 수완을 발휘한 뒤 새정치국민회의의

 후신인 집권 새천년민주당(민주당) 상임고문으로 정치권에 복귀해 제16대 대통령 선거 후보 경선에 나섰다

대통령 당선

마침내 12월 그는 민주당 후보 경선 승리, 후보직 사퇴 위기, 야권 후보단일화를 통한 극적 반전 끝에

유효표의 48.9%를 얻어 46.6% 득표율에 그친 이회창 후보를 누르고 제16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의 당선은 많은 국민들에게 정부수립 이래 50여 년 간 이어온 보수독점 정치에 대한 국민참여형

 새 정치의 승리, 사대외교에 대한 자주외교의 승리, 기득권 세력에 대한 서민대중의 승리,

흑색선전·폭로전에 대한 정책선거의 승리로 받아들여졌다. 또한 7만 명에 이르는 '노사모'의 자원봉사,

미디어·인터넷을 이용한 선거운동, 희망돼지 저금통으로 표상되는 국민의 자발적 후원금 등

그가 선보인 선거운동은 자금과 조직, 지역주의라는 낡은 방식에 의존한 이회창 후보의

 선거운동과 크게 대비되었다.출처 다음백과에서

가장 서민적인 대통령 솔직 담백한 대통령 이시대에 민주주의가 가장 발달했고

이웃집 형님 같은 대통령 이었다는 것이 나만의 생각일까? 평가는 사학자들의 몫이아닐까

20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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